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요술램프 Sep 07. 2020

사랑한다고 지금 말할게

         - 장폴 뒤부아,  상속

  한 남자가 죽었다. 그는 의사였으며, 자살 조력자였고, 애벌레가 온 몸에서 활개치는 것 같은 강박증에 시달리다 끝내 자살했다. 44세의 폴 카트라킬리스, 그는 스스로 자신의 죽음을 선택하고 실행했다.



  함께 살던 할아버지, 외삼촌, 어머니의 자살로 카트라킬리스 집안에는 아버지와 폴만 남게 된다. 스탈린의 주치의였던 할아버지의 뒤를 이어 의사가 된 아버지와 달리 그는 의사면허를 가지고 있음에도 펠로타 선수의 길로 들어서고 마이애미로 떠난다. 연락조차 없이 살아온 아버지의 자살, 이후 펠로타 선수로서의 삶마저 구단의 횡포로 위태롭게 되지만, 아르바이트를 하던 식당의 여사장과의 연애로 행복한 날이 다시 오는 듯 싶다. 그러나 모성애와 이성애를 동시에 느끼며 빠져들었던 여인의 느닷없는 거부의 몸짓으로 절망에 빠지고 만다. 폴에게 잉빌은 또 하나의 구원의 대상이었지만 펠로타 경기나 잉빌이나 모두 그에게는 넘어서지 못할 거대한 운명의 벽이 된다. 생계유지를 위해 프랑스로 돌아와 결국 아버지의 병원을 물려받아 살아가지만, 자유로운 삶, 운명에 저항하는 삶이란 불가능하다는 사실 앞에서 좌절하고 만다. 퇴행성 뇌질환인 헌팅턴병 환자가 된 잉빌을 수소문 끝에 찾아가지만, 인지능력을 상실한 그녀는 알아보지 못한다. 폴은 툴레즈로 돌아온 후 애벌레 강박증에 시달리다 결국 자신의 생을 스스로 끝내기로 결정한다.



   ‘상속’은 일반적으로 물질적 승계를 의미하지만 폴에게 있어 상속이란 유전자의 계승, 피의 대물림을 뜻한다. 주인공 폴에게 암울한 가계의 분위기에서 벗어나 활력 있고 자유롭게 살아가는 구원의 길은 펠로타 경기뿐이었다. 그가 펠로타 선수로서의 삶을 선택한 데에는 부계와 모계 모두에게서 자신에게로 상속되는 우울하고 음습한 자살유전자를 거부하고 싶은 심리가 작용했을 것이다.



  자살의 대물림에서 벗어나고 싶은, 살고자 하는 그의 열망은 느닷없는 연인의 절교 선언으로 관계맺기가 실패하는 시점에서 사그라들고 만다. 나와 연결되어있는 모든 끈이 끊어졌다고 느껴질 때 우리는 어디로 갈 수 있을까. 사랑하고 사랑받을 수 있는 대상이 사라진 후의 세상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소설 『상속』은 처음부터 끝까지 어둡고 우울하고 절망적이다.



  원하지 않았으나 의사로서의 길을 가게 된 폴은 자신의 아버지가 했듯 목숨이 끊어지기를 소망하는 환자들의 자살을 도와주는 일을 하게 된다. 결국 그는 아버지의 병원뿐 아니라 아버지가 비밀리에 수행하던 일까지 이어받게 되는 것이다. 중증 질환을 앓는 환자의 고통은 상상도 못 할 만큼 괴롭다는 것을 환자 본인이나 곁을 지켜본 사람은 안다. 그러나 우리에게 생의 마감을 선택할 자유가 있는 것인가는 의문이다. 우리는 선택에 의해 세상에 나오지 않았듯, 세상을 떠나는 것 또한 임의로 선택할 수 없다. 나도 마지막까지 존엄한 인간으로 살다가기를 소망한다. 고통 없이, 잠자듯이 세상을 떠나게 되기를 바라지만, 고통스러운 삶을 이어가게 되더라도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이 존엄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못지않게 ‘어떻게 죽음을 맞이할 것인가’도 진지하게 생각해 볼 문제이다.



  절대고독과 의사로서의 죄책감 속에서 신경쇠약과 강박증에 시달리게 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결과였을 것이다. 지치고 힘들 때 옆을 지켜주는 존재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힘을 내고 다시 일어설 수 있다. 그런 면에서 폴의 삶은 눈물 나게 가련하고 마음 아프다. 그의 모습은 외로운 현대인의 모습이며, 내 이웃의 모습, 나의 모습일 수도 있다. 그러나 조금만 눈을 돌리면 안개 자욱한 날도 안개가 걷히면 눈부신 푸른 하늘이 드러나고, 괴력의 태풍이 휩쓸고 간 자리에도 목숨을 지탱하고 있는 풀 한 포기가 있다는 것을 끝내 알아채지 못한 것이 안타깝다.          



  그 당시 우리가족의 삶을 돌이켜보면 어떤 기괴한 서커스 장면이 떠오른다. 머리가 잘려나간 닭들이 그들이 살기에는 너무 큰 집에서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장면이었다. 성인 네 사람과 아이 하나가 삶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각자의 세계에 몰두해 순전히 자기 자신에게 맞춰 행복과 불행의 지대를 답사하고, 그 탐사결과에 따라 스스로 고통을 가하고 쾌락을 계발해나갔다.

  

  가족의 따뜻함, 특히 어머니의 따뜻한 사랑을 경험하지 못한 주인공이 자신의 과거를 회상하며 가족의 모습을 단적으로 묘사하는 대목이다. 인간은 때로 우울감이나 고립감을 느끼기도 하지만, 이때 서로의 삶과 고통의 무게를 함께 지탱해주며 가장 따뜻한 위로가 돼주는 것이 가족이다. 그런데 가족 구성원의 시선이 자신에게만 고정되어 있을 때 그들이 갈 길은 자명하다는 것을 작가는 말하고자 한 듯싶다.      




삶은 길을 잘못 들면 안 돼. 후진이 안 되거든.


  쥘 삼촌이 사춘기에 들어선 폴에게 들려주는 이 말은 쥘 삼촌의 인생관이며 자신의 생에 대한 회한의 감정을 토로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쥘 삼촌의 자살에는 죽기 전 식사시간에 받은 전화가 관계된 것으로 짐작이 되나 자세한 언급이 없다. 그렇다면 실체가 밝혀지지 않은 전화 장면이 굳이 꼭 필요한 것이었는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 전체적으로 할아버지와 쥘 삼촌, 어머니의 자살 동기는 자세한 서술이 없어 독자가 추측하는 수밖에 없는데, 우울이 그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이라면 그 원인에 대한 조금 더 진지한 작가적 접근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일련의 사건들이 불과 몇 주 사이에 한 인간을 얼마나 변화시킬 수 있는지 목도할 수 있었다. 그 사건들이 한 인간의 정신을 새롭게 빚어내고, 욕구와 갈망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조이의 말투와 화법이 달라졌다.


  선수조합 지부장이 된 에피파니오의 모습을 통해 주변 상황이 인간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를 깨닫는 장면이다. 이 대목은 가족들의 극단적인 선택이 폴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밝히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폴이 결국 극단적 선택을 하게 되는 데에는 가족 모두의 책임이 크다. 그들은 모두 폴을 죽음으로 몰고 간 간접 살인자인 셈이다.     



  책을 덮은 후 글을 쓰기까지 며칠은 독자로서의 내가 무엇을 해야할까를 진지하게 고민해 본 날들이었다. 나는 미루지 말고 주변 사람들의 안부를 물을 것이며, 쑥스러워 자주 하지 못했던 사랑한다는 말을 가족에게 건넬 것이다.      

이전 01화 상처 없는 인생은 없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