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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berte Aug 31. 2024

D+1. 자, 젊은 친구, 결정하슈

7시쯤 눈을 떴다. 영양제를 손에 털어 넣는다. 어떤 영양제와 어떤 것을 함께 먹어야 좋고, 피해야 하는지 따위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냥 무조건 털어 넣는다. 오피스를 연다. 오늘은 책상을 닦고, 창문을 열고, 룸스프레이를 뿌리고, 체크인 세팅을 배웠다.


J와 만나 자전거를 빌렸다. 산방산 자전거길을 달렸다. 바다가 보였다. 주저 없이 달려갔다. 허벅지 위까지 물이 튄다. 그럴수록 더 뛰어 들어갔다.


점심 먹으러 자전거를 타고 이동했다. 그리고 짜이를 마시러 인도식 카페로 향했다. 다행히 문이 열려 있었다. 이런 카페는 갈 때마다 ‘오늘은 열었을까?’ 하고 가슴 졸이며 가야 한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헛걸음한 적은 한 번도 없다.


사장님의 말투는 마치 물결과 말줄임표가 섞인 듯했다. 목소리는 선풍기 소리보다도 작고, 부드러워서, 자꾸만 고개를 가까이 내밀게 만든다.


“짜이와 베트남 커피 나왔어요오~(…….)”

“감사합니다!”

“저도 감사해요오~(………)”


책장에 S가 제주도에 가면 꼭 읽어보라고 했던 <그리스인 조르바>가 꽂혀 있다. 그 책을 몇 장 읽다 이 글을 쓴다.


아침부터 제주 바다, 자전거, 짜이까지 만끽하고 거하게 놀다 벌겋게 탄 J와 나는 오피스로 돌아와 개인 일들을 했다.


한참 후, J가 시무룩한 얼굴로 내 뒤로 다가와 종이에 뭔가를 적는다.

‘혼자 있을 네가 걱정돼. 울면 안 돼?’

새삼스러운 나는 쓴다.

‘너 피곤해?’

삐죽해진 J는 다시 적는다.

‘괘씸해. 내가 널 신경 쓰는 게 내가 피곤할 때 생기는 건가 뭐.’


그렇게 저녁이 됐다. J와 드라이브를 할 때 자주 듣던 러브홀릭 노래가 흐르는 식당에서 밥을 먹었다. J가 나 많이 먹으라고 골뱅이무침에서 골뱅이를 열심히 골라내는 동안 그 옆모습을 바라본다.


예쁜 쌍꺼풀 선, 어디서 생긴 건지 마음 아프게 만드는 볼의 상처, 장난스러운데도 어딘가 슬퍼 보이는 입꼬리.


하나하나 기억해 두려고 더 자주, 더 자세히 본다. 나도 두려우니까. 매일 보던 J가 없는 제주가, 네가 없는 낯선 여기서 다시 우울증에 잠식당할지도 모르는 내가, 강박에 몸 웅크릴 내가.

“같이 있을 남은 이틀 동안 잘해줘 봐~”라고 장난스럽게 넘겼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렵다.


다시 책장을 넘겨 <그리스인 조르바>를 몇 장 더 읽는다.



'나는 나의 원고 나부랭이를 내팽개치고 행동하는 인생으로 뛰어들 구실을 찾았다.'


'내가 바라던 기회는 한 달쯤 전에 왔다. 나는 리비아에 면한 크레타 해안에 폐광이 된 갈탄광觸候鍵 자리를 하나 빌려둔 게 있었다. 나는 그곳에서 책벌레들과는 거리가 먼 노동자, 농부 같은 단순한 사람들과 새로운 생활을 해보기로 마음먹었던 것이다.'


'나는 이 여행이 신비로운 의미를 갖는 것처럼 들뜬 마음으로 떠날 채비를 했다. 내 삶의 양식을 바꾸려고 결심한 것이다. 나는 나 자신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제까지 너는 그림자로만 만족하며 살고 있었지. 자, 이제 내가 너를 본질 앞으로 데려가 줄 테다.’'


“왜요? 같이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해서요?”

그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러고는 못마땅하다는 듯 소리쳤다.

“‘왜요’가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하시오? 가령, 하고 싶어서 하면 안 됩니까? 자, 날 데려가슈. 난 요리사라고나 할까요. 당신이 먹어 보지도 들어 보지도 생각해 보지도 못한 수프를 난 만들 줄 압니다.”


“무슨 생각을 하슈? 혹시 당신도 저울 한 벌을 가지고 다니는 건 아닙니까? 모든 일을 정밀하게 달아보는 버릇 말이오. 자, 젊은 친구, 결정하슈. 눈 한번 질끈 감고 해버리는 거요.”




내가 바라던 기회는 사실 얼마 전 이미 왔을지도 모른다. 가끔 겁이 나도 그 기회를 깊이 받아들이기로 마음먹는다. J는 또 놀러 오겠다고 했다.







음악

밤, 바다 - 최유리


그리스인 조르바 - 니코스 카잔차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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