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른 시작!
전역을 며칠 앞두고,
나는 마치 시간이 멈춘 사람처럼 지냈다.
아무도 관심 없던, 곧 사라질 말년 병장.
그래서인지 더 눈치 보지 않고
하루 종일 연필만 굴렸다.
OMR 카드 칸 하나씩 색칠하듯
남은 날들을 조금씩 지워나갔다
처음 수송부에 왔을 땐
좁고, 춥고, 각 잡힌 세계가 나를 눌렀는데
익숙해지니… 이게 또 다정해 보이더라.
내무반 홀아비 냄새조차.
그러다 진짜 그날이 왔다.
관물대를 텅 비우고,
전역 신고를 하고,
위병소를 지나 바깥으로 걸어 나오는 순간—
구보도 없고, 구호도 없고,
그냥 각자 조용히 사라지는 흐름.
누구는 빨리 뛰어가고,
누구는 뒤돌아보고,
누구는 그저 멍하니 걸었다.
나는… 그냥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켰다.
버스에 앉아 창문을 보는데
거기 낯선 얼굴 하나가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군번줄이 사라졌는데
왜인지 가벼워진 느낌은 아니었다.
‘이제 뭐 하지?’
하고 싶은 게 많았는데
막상 자유가 눈앞에 오니까
걸음이 이상하게 굼떠졌다.
그때 처음 알았다.
제대란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다시 시작하는 것’이라는 걸.
터미널 앞 편의점 벤치에서
따뜻한 우유 하나를 마셨다.
혼자가 되니 세상이 너무 조용해서
괜히 눈물이 찔끔 날 것 같았다.
이제 나를 부르는 소리는
“오 병장!”이 아니라
“아저씨!”였다.
말맛이 묘하게 씁쓸했다.
다음날,
군번줄을 벗고 맞이한 첫 아침.
기상나팔도 없고
복도에서 누가 고함치는 소리도 없고
햇살은 느슨하게 흘러들고
나는 누군가의 호출이 아니
‘아… 일어나 볼까?’ 하는 마음으로 눈을 떴다.
사실 너무 오래 누워있어
허리가 먼저 일어나자고 난리를 쳤다.
제대란 단어는
생각보다 시끄럽지 않았다.
환호도, 축포도 없었다.
그냥 몇 년 전
멈춰둔 자리로 돌아가야 하는
현실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하지만 나는 곧장 복학하지 않았다.
몸은 민간인이 됐는데
마음은 아직 군복을 반쯤 입고 있었다.
사람 많은 곳이 어색했고
버스에 앉아 있으면
괜히 고개를 들이밀며 창밖을 살피는 버릇이 남아 있었다.
습관이란 게 참 질기다.
‘그냥 좀 더 쉬자.’
그건 계획도 아니고, 누가 시킨 것도 아니었다.
그냥… 나한테 시간이 좀 필요한 거였다.
글/그림 : 오쌤
※ 이 글은 일기를 바탕으로, 제가 겪은 실제 경험과 기억을 재구성한 이야기입니다.
등장인물의 이름은 모두 가명이며, 묘사된 상황에는 개인적인 시선과 해석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누군가에겐 또 다른 이야기일 수 있음을 이해하며, 이 글이 상처가 아닌, 공감으로 닿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