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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우영 Jan 24. 2023

로망 뒤에 감춰진 열등감

미국 이민의 두 번째 이유

이민의 시작이 ‘순진한 로망’이었다는 건 반만 사실이다.


솔직히 말해 순진하고 귀여운 로망 외에도 나의 콤플렉스와 열등감이 있었다.




중학생 때 나는 수업 시간에 졸아본 적이 없는 모범생으로 성실한 태도와 나쁘지 않은 머리 덕분에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 특목고에 진학하게 된다. 그때까지만 해도 표현은 안 했지만 ‘내가 꽤 공부를 잘하는군’ 하는 우쭐한 마음이 조금은 있었다.


하지만 전국에서 내로라하는 수재들이 모인, 간혹 천재들도 보이는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오래지 않아 깨달았다.

아, 나는 그저 우물 안 개구리였구나.


그중에서도 나에게 가장 큰 좌절과 절망을 안겨준 과목은 ‘영어’였다. 경기도의 한 신도시 출신이었던 나는 당시 유행했던, 국영수과사 모든 주요 과목을 하나의 학원에서 가르치는 종합 학원에서 영어를 배웠다. 그리고 그 방식은 단어 외우기와 문법을 중심으로 하는 그야말로 아주 구시대적인 방식이었다. 외국인? 여행지에서 말고는 본 적도 없었으며, 회화 수업?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었다.


그러던 내가 진학한 고등학교는 교내에선 영어만 사용하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 국어와 국사를 제외한 모든 수업은 영어로 진행됐으며, 따라서 원어민 교사 숫자가 꽤 많았다. 입학한 지 며칠 안 된 어느 날, ‘Johnson’이라고 적힌 명찰을 단 선생님의 수업에 들어갔고, 긴장한 와중에도 ‘존슨, 미스터 존슨’ 선생님의 이름을 속으로 되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같은 반 친구가 부르던 그 선생님의 이름, 그 혀에 버터를 바른 듯 유창하게 굴러가던 그녀의 발음이 아직도 귀에 생생하다. “헤이~ 미스터ㄹ 좌안슨~”




세월이 20년도 더 흐른 지금에야 그깟 발음이 그다지 중요한 게 아니라는 걸 안다.


그렇지만 아직도 생생한 그날의 그 충격, 그때부터 시작된 나의 좌절, 고작 의사소통의 수단에 불과한 영어라는 놈 때문에 느꼈던 내 어린 날의 열등감은 오랫동안 묵직하게 내 안에 자리 잡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지금도 여전히 남아있다.


머지않아 모든 사람이 각자의 모국어로 떠들어도 AI 동시통역이 가능한 시대가 올 수 있겠지만, 그때 되면 영어를 잘하는 것보다 머리에 뭐가 들었는지가 훨씬 더 중요해지겠지만,


그럼에도 나는 내 아이들에게는 ‘아무것도 아닌데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닌’ 장벽이 없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삼십 대 중반이 넘어 언어를 배우기에 다소 늦은 나이라지만, 이제라도 내 장벽도 무너뜨릴 수 있기를 바란다.




이민을 선택한 두 번째 이유, 어쩌면 첫 번째보다 솔직한 이유는 이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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