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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음정원사 안나 Jul 31. 2020

회사가 행복한 곳이어야 하는 이유

학교는 사회의 축소판이다

나는 비교적 행복한 학창 시절을 보냈는데 나의 아름다운 학창 시절의 말미를 장식한 고등학교 생활은 그렇지 못했다. 고등학교 3년은 내 인생에서 가장 회색빛 가득한 시기였다. 우리 동네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교육열이 극심하다고 하는 강남의 한가운데 위치하고 있었다. 사실 강남이라고 하더라도 배밭에서 아파트 촌으로 변한 지 채 20년이 안되었던 시절이라 대다수 평범한 사람들이 모여서 살던 곳이었다. 하지만 내가 고등학교를 들어갈 무렵에는 타워팰리스가 생기면서 무슨무슨 회사 사장 아들, 무슨무슨 사업체 딸과 같은 학생들이 학교에 들어왔다. 높은 부지에 하얀 병원처럼 지어진 학교는 첫인상부터가 차갑고 삭막했는데 같은 강남이었어도 산에 둘러싸여서 풀어놓은 닭처럼 길러지던 중학교 시절과 달리 이곳은 시스템으로 돌아가는 공장 같았다.


휴게소처럼 들렀다 가는 곳 - 강남의 고등학교

학교는 진리에 대한 탐구도 인성에 대한 교육도 이루어지지 않는 곳이었다. 아이들은 학교를 지나가는 휴게소 정도로 여기는 것 같았다. 입시를 위한 공부는 대부분 학원에서 했고, 학교는 대학을 가기 전에 잠시 서류상 필연적으로 거쳐가야 하는 곳에 불과했다. 고등학교 2학년이 되니 반에서 절반에 가까운 아이들이 예체능으로 진로를 바꿨다. 고3 때는 중간중간 해외에서 아이들이 우르르 전학을 오더니 얼마 안 가 특례로 상위권 대학에 수시로 입학했다는 소식과 함께 자취를 감췄다. 한번 제대로 모인 적도 없는 것 같은 학생들은 각자 입시 전략에 따라 해외 유학, 외국인 전형 등등 각기 다른 방향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그 와중에 공부를 끈기 있게 하는 아이들의 전략은 사자 직업을 가지는 것이었다. 부모들도 모두 자기 자식이 의사, 변호사가 될 수 있게 만드는 데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어떻게 해서든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자식들을 사자 직업 반열에 올려놓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자식 교육에 열을 올리는 부모 중 그 어느 누구도 본인의 자식이 '의사가 되어서 사람을 살리고', '변호사가 되어서 억울한 사람들을 대변해 주기를 바란다'는 사람은 없었다. 그들은 자식이 그저 높은 자리에 올라서 호의호식하며 '잘 먹고 잘 사는' 것에만 관심이 있었다.


한 번은 당시 가장 유명하다고 한 여자 강사의 언어영역 학원을 결제했다. 언어영역이라면 언어능력을 측정하는 과목인데 이 과목이 존재하는 이유는 글을 읽고 말하고자 하는 바를 이해하는 능력을 측정하기 위해서 아니겠는가. 근데 여기서 능력의 측정이라는 것은 사실 결과론 적인 것이고 그 기본이 되는 핵심은 글을 제대로 이해하고 뜻을 헤아리는 능력을 기르는 것이다. 그런데 강남에서 가장 유명하다고 한 그 강사는 독해 능력을 길러 주지 않고 질문의 앞 단어 하나만 읽고 답을 유추하는 방법을 가르쳤다. 수능은 정답의 확률을 높이는 게임이라며!!! 철저히 학원에 목적에 맞는 가르침이었을 지 모른다. 하지만 바보같이 더 높은 수준의 교육이라는 것을 기대했던 나는 너무나 무참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나만 이상한가?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

독해를 못하는 학생을 길러내는 국어학원, 교육이 없는 학교, 환자의 병을 고치는 것에 관심이 없는 의사, 정의에 관심이 없는 판사. 진리탐구에 관심 없는 교수.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나는 뭔가 다 이상하다고 생각되었다. 뭔가 정상이 아니라고 느꼈는데 아무에게도 이런 이야기를 할 수는 없었다.

 나는 우리가 칸칸이 짜인 닭장에서 대규모로 길러지는 닭 같이 느껴졌다. 자유롭게 한번 푸드덕 날지도 못한 평생 갇혀서 주어진 모이를 쪼아 먹다가 철저히 등급에 나뉘어서 팔리는 닭 말이다. 우리는 서로의 칸막이에 막혀서 이웃 닭들이랑 제대로 된 교제라는 것을 하지 못하고, 사료를 먹고 최대한 살을 찌우는 것만을 삶의 유일한 목표이자 달성해야 할 과제로 생각하며 열심히 오늘을 살아낸다. 내가 가진 두 다리와 날개를 활용해서 초원을 한번 달려 보지도 못한 채 그렇게 태어날 때부터 철저하게 성과주의 사회에 따라 최고 등급의 고기가 되기 위해 칸막이에서 최선을 다해 스스로 사육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닭이라는 존재 자체로서의 존엄성이란 것은 무참하게 짓밟힌 채 말이다.


학교는 사회의 축소판이다.

어느 책에서 이런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아이들은 누군가 직접적으로 이야기해 주지 않아도 이 세상의 기류를 무의식적으로 느끼고 가장 민감하게 반응한다고. 나는 이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리고 이런 아이들이 모여 있는 학교라는 곳은 어찌 보면 이 사회의 축소판과 같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학교에서 아이들이 감히 입에 담지도 못할 단어로 상대적으로 열악한 환경에 사는 아이들을 놀리는 것이나 학교 폭력이 일어나는 것이 결코 아이들만의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단지 사회에서 일어나는 문제가 작은 공간에서 그대로 재현되었을 뿐이다.


누가 나한테 한마디 설명해 주지 않았는데도 나는 학교에서 자본주의의 서늘함을 느꼈던 것 같다. 그것은 차가움, 냉담함, 이기주의, 그리고 무관심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것이 어른들의 세계에서 내려오는 것이라는 걸 무의식적으로 알았다. 기업에서, 공무원 조직에서 어른들이 삶을 일구어 나가는 방법은 아마도 학교에서 진리에 대한 추구나 진실에 대한 갈망 없이 정답을 맞혀나가는 것처럼 그저 껍데기를 최대한 빨리 만들어가는 것이었을 테고, 각자 주어진 위치에서 옆사람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철저히 자신만의 이익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효율적이지만 무섭도록 차가운 조직이었을 것이다. 그런 어른들의 사회가 아이들의 세계에 반영된 것이고 나는 그 사회를 피부로 느끼고 있었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불행한 것은 어른들의 사회에 책임이 있다. 어른들이 인간답지 못하고 지옥 같은 회사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은 곧 아이들에게도 그런 학교생활이 펼쳐진다는 말이나 마찬가지다. 이것이 내가 감히 어른들이 속한 조직인 회사가 좋은 곳이 되어야 한다고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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