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와도 젖은 자는 다시 젖지 않는다

청춘예찬

by 무대가리

고3이었다. 1년 넘게 해오던 짝사랑은 더이상 가망이 없었다. 사실 진작에 알았지만 어린마음에 다른 사람을 좋아한다는 것이 그애를 배신하는 것인 냥 느껴져 그냥 계속 좋아했다. 친했던 친구들은 대부분 반이 달라 흩어졌다. 그나마 가장 친한 친구와 같은 반이었지만 고3이 지나며 자연스레 관계가 멀어졌다. 내가 아닌 다른 친구와 있을 때 더 재밌어보이는 그 친구가 가끔은 밉기도 했다.

입시는 답이 보이지 않았다. 공들여 준비한 일본 유학 시험에서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하고 수능을 준비해야했다. 3개월 가량 남아 죽을둥 살둥 미친듯이 공부를 했지만 매일매일이 불안했다. 그 때, EBS 언어영역 문제를 풀다가 한참을 울었다. 평소였으면 가, 나, 다 시를 빠르게 분석하고 문제풀이로 넘어갔을텐데 이 시는 그러지 못했다.



비가 와도 젖은 자는 다시 젖지 않는다 / 오규원

강가에서
그대와 나는 비를 멈출 수 없어
대신 추녀 밑에 멈추었었다
그 후 그 자리에 머물고 싶어
다시 한 번 멈추었다

비가 온다, 비가 와도
강은 젖지 않는다 오늘도
나를 젖게 해놓고, 내 안에서
그대 안으로 젖지 않고 옮겨 가는
시간은 우리가 떠난 뒤에는
비 사이로 혼자 들판을 가리라

혼자 가리라, 강물은 흘러가면서
이 여름을 언덕 위로 부채질해 보낸다
날려가다가 언덕 나무에 걸린
여름의 옷 한 자락도 잠시만 머문다

고기들은 강을 거슬러올라
하늘이 닿는 지점에서 일단 멈춘다
나무, 사랑, 짐승 이런 이름 속에
얼마 쉰 뒤
스스로 그 이름이 되어 강을 떠난다

비가 온다, 비가 와도
젖은 자는 다시 젖지 않는다


정확하게 왜 울음이 터졌는지는 기억이 나질 않는다. 입시가 힘들어서 였을수도, 나를 떠난 친구와의 시간들이 그리워서 였을수도, 지독한 짝사랑을 이제 그만 하고 싶어서 였을수도, 아니면 이 모든 감정의 복합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이미 젖을 대로 젖어버린 만신창이 같았던 인생을 위로해주는 거라곤 시 밖에(?) 없어서 서러웠던 것 같기도 하다.


돌이켜보면 그 시절, 하루하루가 참 치열했다. 점심시간이 아까워 밥 먹고 돌아오자마자 양치도 안하고 자리에 앉아 공부했다. 고2때 친구들과의 시간이 너무 행복해서 매일 아침 학교에 가고싶었던 시절이 있었으나 어쩐일인지 그들 모두와 소원해졌다. 경쟁심에 스스로 벽을 쳤었던 것 같다. 그런데 사실 나는 그들이 부러웠다. 안정적인 또래 집단 안에서 서로 장난치며 웃고 떠들던 그들이 무척이나 부러웠다 .그러나 그럴수록 더 이를 악물고 공부했다. 두고 봐라, 나는 보란듯이 너희들보다 좋은 대학에 갈거다. 행복한 삶을 살거다. 이 학교도, 친구들도, 졸업하면 모두 끝이다.


지긋지긋했다. 외로움도, 공부도, 친구도, 어서 빨리 입시를 끝내고 자유로워지고 싶은 마음 뿐이었다. 그렇게 독기를 품었더니 어느덧 나는 바라던 대학에 합격해있었다.


고등학교 졸업식 날이었다. 성인이 된 친구들은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술자리를 잡았다. 그런데 나는 낄 곳이 없었다. 분명 왕따는 아니었다. 늘 밥먹던 친구들이 있었지만 특별히 어느 무리에 소속되지는 않았던것이다. 이쪽을 가도, 저쪽을 가도 그저 어색할 것이 뻔했다. 또 어느 누구 하나 나에게 같이 가잔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집에 오는 길, 결심했다.


나의 20대는 그 누구보다 행복할거야. 두고봐. 자유롭게 마음껏 하고싶은 거 하면서 지난 6년을 보상받아야지.


그놈의 ‘두고봐’ 정신이 여전히 나를 움직였다. 다른 아이들보다 더 행복하게 살거라는 욕심, 비교, 경쟁. 스물일곱이 된 지금 20대 초중반을 돌아보면 계획한 것들이 대부분 이루어졌고 확실히 10대보다 훨씬 행복했다. 스물넷에 떠난 미국 교환학생과 남미 배낭여행 경험 이후로 내 꿈은 줄곧 남미에 다시 오는거였고, 지금 그 꿈을 이루어 이렇게 에콰도르에서 후안발데즈 커피를 마시며 글을 쓰고 있지 않은가.


다짜고짜 카페에 온 이유는 생각을 정리하고 싶어서였다. 직장에서도, 집에서도 도무지 아무런 의욕이 생기질 않는다. 인턴 면접을 볼 때만 해도 누구보다 잘 해내고 많이 배울 수 있다며 자신감에 차 있었는데 그 자신감이 한달도 안되어 무너졌다. 남미에 다시 오면 무작정 좋을 줄 알았는데 적응 안 되는 것이 한두개가 아니었다.


회사에서는 하루종일 모니터를 들여다보며 엑셀 작업을 한다. 물론 외국인 인턴에게 많은 것을 맡길 수 없는 회사의 특성도 이해한다. 어느정도 각오 한 부분이다. 애써 찾자면 배우는게 완전 없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이게 과연 내 커리어에 도움이 될 까? 싶은 일거리들만 받는다. 직원들이랑 대화라도 하면 좋곘지만 대부분 소통이 필요 없는 단순 구글링, 엑셀의 반복이다.


점심시간에는 직원들과 이런저런 말을 주고 받지만 한계가 있다. 먼저는 내 언어 실력이 많이 부족하고, 그들도 그것을 알기에 대화의 폭이 넓지 않다. 기껏해야 매번 물어보는 질문들. 에콰도르 생활은 어떤지, 왜 맨날 샐러드만 먹는지, 한국 음식이 그립지는 않은지.

사람들끼리 즐겁게 대화하는 그 시간에 내가 끼면 방헤가 되지는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홀로 테이블에 자리를 잡는다. 아, 이놈의 타인의 시선은 언제까지 신경 써야 한단 말인가. 나는 왜 동방예의지국에서 태어나 쓸대없는 곳에서 배려아닌 배려를 하고 있는거냔 말이다.


집에서는 더하다. 차라리 스페인어면 못알아듣는다는 핑계라도 댈 수 있지. 여기서는 다 영어로 이야기한다. 캐나다, 네덜란드, 호주 등 세계 각지에서 온 룸메이트들은 모두 친절하다. 다만, 그들의 대화에 내가 낄 틈이 없다. 정확히 말하면 굳이 덫붙일 말이 없을 만큼 이런저런 얘기가 오간다. 일대일 상황에서는 곧잘 영어를 하는데, 이렇게 여러명이 둘러앉아 이야기를 꽃피우는 상황에서 나는 꿀먹은 벙어리가 된다. 분명 다 알아 듣는데 딱히 하고 싶은 말이 없다. 이마저도 무조건 모두에게 득이 되거나 가장 튀어야만 인정해주는 한국 술자리 문화를 탓하면, 너무 도둑놈 심보인가?


혼자서 구시가지를 반나절 돌아다녔다. 생각이 정리되기는 커녕 더 복잡해진다.

원래는 휴일을 맞아 룸메이트들과 파티로 유명한 해변에 놀러가는 약속을 잡았지만, 지금 내 마음 상태로는 거기 가봐야 억지로 돈만 쓰다 올 것 같아서 못가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솔직하게 말했다. 그들은 나에게 향수병이냐고 물었지만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나 한국 별로 안좋아해”라고 말했다. 다들 놀란 눈으로 쳐다봤다. 응? 난 진심인데..



그래, 이쯤되면 인정해야겠다. 나는 어쩌면 생각보다 대단하지 않은 사람일 수도 있다. 여기 오기 전만 해도 해외 생활에 자신이 있었다. 나름 다양성에 열려 있는 편이라 생각했고 남미의 역사도, 문화도 잘 알고 있으니 누구보다 국제기구에, 중남미에 잘 맞을거라고 믿었다. 그런데 여기서 나는 하루하루가 꿀먹은 벙어리 신세다. 한국사람을 만나면 일시적인 외로움이야 해소 되겠지만 그 뒤에 오는 공허감이 더 클 것 같아서 일부러 피하고 있다.


그리고 키토에 우기가 시작됐다. 매일같이 비가 내린다. 비가 와도 젖은 자는 젖지 않는다고 했던가! 10대때 키워둔 외로움에 대처하는 맷집이 발휘될 줄 알았는데 여기서 난 영락없는 이방인이다. 현지에 녹아들지 못하고 주변을 방황하는 이방인. 이미 젖은 몸 위에 비가 내리니 더 춥고 오슬오슬하다.


다행인것은, 글을 쓰다 보니 자연스레 학창시절을 떠올렸고 그 시절 내가 얼마나 치열했는지 돌아봤다. 그래. 나는 이렇게 불평불만만 할 줄 알았지, 사실 아직 아무것도 시도해 보지 않았다. 아직 죽을 둥 살둥 스페인어에 달려든 적도 없고, 현지인 친구를 사귀려는 노력도 하지 않았으면서 누군가 먼저 다가와 주기만을 바랐다. 주어지는 업무가 사소한 것이라며 무시하기만 했지 뭘 하나 더 배워갈 생각은 안하고 있었다.


고삼때처럼만 하면 뭔들 못하겠는가. 음.. 그런데 사실 고민이다. 이제는 예전보다 그런 독기가 많이 죽었다. 그냥 편하게 살고 싶은 마음이 스멀스멀 잠식 해 오고 있는 것 같다. 그러니 다시 한번만 마음을 다잡고, 지금의 나를 있게 한 “두고봐” 정신을 한번만 더 발휘해보자. 넋놓고 비 맞고 있다가 “나는 이미 젖었잖아 하하하” 하는 것 보다 “두고봐. 이 비가 그치면 나는 더 성장해 있을거야” 라고 마음 먹는게 아직은 남아있는 청춘에 대한 예의가 아닐까.


keyword
이전 07화남미에서 호떡 장사하기_버스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