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위한 기도

팜플로나 - 푸엔테 라 레이나

by Jessie



Pamplona ▶ Puenta la Re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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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팜플로나. 캡슐같은 작은 공간에서 나와 주방으로 향하니 아침 일찍 눈을 뜬 몇몇 사람들이 나에게 인사를 건냈다. 가볍게 눈인사를 건내고 테이블에 앉아 토스트기에서 갓 튕겨져 나온 빵 한조각에 약간의 버터와 딸기잼을 슥슥 발라 입에 밀어넣었다. 뜨거운 커피와 한 조각의 바게트는 언제나 옳다.


지난 밤, 아주 오랫만에 먹었던 신라면이 용기와 체력을 충전해준 덕분에 오늘은 더 먼 거리를 걸을 수 있을 거라는 묘한 확신이 든다. 5월이 끝나갈 무렵, 시기를 잘 맞춰서인지 지천은 형형색색의 들꽃들로 장관을 이루고 있다. 그런 꽃 길을 걸으며 나도 모르게 흥얼거리게 되는 몇 몇 동요들, 그 가사를 가만히 음미하다보면우리가 마주하는 동요들이 얼마나 예쁜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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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 길을 걸을 때면 더 많은 사람들과 친구가 된다. 먼저 인사를 건내면 그들도 마음의 문을 열고 홀로 길을 걷는 나에게 말을 건내곤 하는데 오늘은 첫날 피레네를 오르며 만났던 Sera 아주머니 그리고 John 아저씨와 동행했다. 아주머니는 나에게 길을 걷는 이유에 대해 물으셨다.


"제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어서 왔어요. 무슨 일을 하기에 앞서 내가 어떤 사람이고 무엇을 잘할 수 있는지 한번쯤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지고 싶었어요. 길을 걷다보면 답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아 길을 걷기 시작했는데 아직은 아무런 생각이 없네요"


그러자 아주머니가 말씀하셨다.


"나도 그걸 알고 싶어서 왔지. 그 걸 알기 위해 스스로에게 시간을 주는 건 정말이지 중요하다고 생각해. 결혼을 하고 자식들을 키우고 이제서야 내 인생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지게 되었는데 정말이지 나는 요즘 행복해.

나중에 내 남편과 다시 한번 걷고싶어"



Sera아주머니의 남동생인 John아저씨와는 스쿠버다이빙이라는 주제로 대화를 시작했는데 스쿠버를 좋아해 용돈을 모아 자격증을 따고 봉사활동을 다녔다는 나의 말에 아저씨는 스쿠버를 통해 보물선 탐사와 바닷속 쓰레기를 치우는 봉사활동을 하고 계시다는 더 멋진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나이를 이겨낸 이 캐나다 남매의 열정에 나는 가슴 속으로 박수를 보냈다. 나도 언젠가 '멋진 삶'을 사는 중년이 되고 싶다는 생각과 함께 이미 그런 사람들을 만나고 있으니 나도 그런 모습이 되어갈 거라는 막연한 기대를 가지게 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쩌면 인생을 살아가면서 '나'라는 존재에 대한 질문과 그 답을 찾기 위한 과정은 끝이 없을지도 모르겠다는 결론에 닿았다. 파랑새를 찾으러 먼 길을 떠났다가 집으로 돌아온 남매가 집 현관에서 그 파랑새를 찾았다는 동화처럼 답은 멀지 않은 곳에 있다는 것을 아니 어쩌면 '답'이라는 언어에는 어떠한 모순이 담겨 있으며 내 믿음으로 인해 어느 순간 '답'이라는 의미를 부여 받게 되는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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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삶을 살았다면 어쩌면 평생 만나지 못할 사람들을 만나면서 나는 매일 매일 배움의 길을 걷고 있는 중이었다. 오늘 헤어지게 되면 내일 다시 만날 수 있을지는 그 누구도 알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하루하루를 겪어내며 이미 충분히 알고 있기에 '오늘' 그리고 '지금 내 앞에 있는 사람'과의 시간을 소중히 그리고 감사히 여기며 작은 걸음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 곳에서 깨달은 작은 느낌표들을 현실에서도 잊지 않게 되길 간절하게 바라고 또 바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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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례자의 길은 오직 두 발로만 걸어낼 수 있는 게 아님을 깨닫는다. 누군가는 아끼는 강아지 한마리와, 누군가는 당나귀와, 누군가는 돌아가신 아버지의 모자와 그리고 또 다른 누군가는 아버지의 유골 조각과 함께 이 길을 걸어내고 있다. 홀로 길을 걷는 당신도 결국 '혼자가 아니다'. 설령 혼자 시작했다 하더라도 가만히, 아주 가만히 들여다 보다보면 혼자만의 힘으로 이 길을 걷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나는 참 값진 희생들로 이 곳까지 왔다. 그리고 더 나은 '함께'를 위해 이 길을 걷고 있는 중이다.


물음은 끝이 없었다. 어쩌면 답이 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단지 그런 물음을 가졌다는 자체만으로도 내 인생은 조금씩 영글어져 가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무거운 배낭에 생각이 더해지니 오늘따라 가방이 더욱 무겁게 느껴지고 만다. 가방의 무게는 곧 삶의 무게라 했는데 아무리 뒤져봐도 버릴 것 하나 없다. 감당할 수 있는 삶의 무게라면 조금 욕심을 부려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보는 건 어떨까. 욕심만큼 나의 체력을 키우면 되는거니까. 정신적인 체력도, 육체적인 체력도 말이다. 가벼움과 심플을 조장하는 사회 속에 살고 있지만 내 입장에선 무조건 버리는 것만이 답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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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밭 사이사이에 머물러 있는 갈 곳 잃은 빗방울들에서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상쾌한 냄새가 났다. 그 초록세상을 지나고 나면 작은 마을이 나타난다. 점심시간이면 스페인이라는 나라에서는 모든 움직임이 잠시 깊은 수면에 빠져드는 것만 같다. 잠시 잠들어 있는 마을을 지날 때면 어김없이 십자가나 성당을 만나곤 하는데 그 고요 속에서 마주한 십자가는 언제나 나를 고개 숙이도록 만들었다. 나는 그 작은 십자가 앞에서 더이상 '나'를 위한 기도가 아닌 '당신'을 위한 기도를 드렸다. 나의 가족, 친구 그리고 이 길을 함께 걷는 사람들까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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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푸엔테 라 레이나라는 마을에 도착했다. 세련되진 않지만 한 방에 15명 이하의 사람이 머무는 환경이라면 꽤 쓸만하다는 평가를 내려줄만 하다. 씨에스타를 맞이한 마을은 예외라고는 없는 듯 거짓말처럼 고요 속으로 빠져들었다. 어렵게 찾은 카페에 앉아 한잔의 커피를 주문한다. "우노 카페 콘 레체"라고 주문을 하는 나에게 쏟아진 그들의 시선이 나쁘지 만은 않다. 그들을 향해 가볍게 웃어보일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넓은 창으로 은은하게 쏟아지는 햇살, 부드럽고 향긋한 커피 한 잔 그리고 그리운 사람에게 보내는 편지 한 통. 이 작은 조각들을 모으다보면 그건 어느새 '행복'이라는 단어가 되어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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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에스타가 끝날 무렵, 잠시 산책을 위해 걷던 마을의 길목 어딘가에서 작은 성당을 만나 우연에 이끌려 성당 안으로 터벅터벅 걸어 들어갔다. 얼마전 주비리에서 함께 점심을 먹으며 그림을 그리며 대화를 나눴던 Jose아저씨를 만나 나는 아이처럼 키득거리며 반가움을 나눴다. 그 반가움을 표하는 눈에는 잠시 물기가 스쳐 지났다. 그 짧은 인연 속에서도 우리는 얼마나 많은 대화를 나눴던가. 언어가 '소통'을 위한 전부는 아니라는 것을 이 길을 걸으며 배웠다.


현대와 과거가 공존하는 이 골목을 거닐며 엄마 생각이 났다. 배낭 하나 둘러메고 유럽 배낭여행을 떠난 줄 알았던 딸은 800km의 길을 걷고 있다. 길 위에서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마음이 열리곤 한다. 그저 마음이 가는대로 살기 위해, 힘들게 마음을 닫아두지 않기 위해 카미노라는 길에 섰다. 매일 길을 걸으며 순간의 작은 행복을 느끼는 나를 보고 있으니 내 삶이 얼마나 많은 축복으로 가득 쌓여있는지를 나는 깨닫고 말았다. 나는 넘치는 축복을 안고 내가 아닌 타인을 위한 기도를 올렸다. 내가 아닌 누군가를 위해 마음을 다하는 것만으로도 내가 걸어온 길들이 온통 따뜻해지고 있는 것만 같았다.







5월 29일. 푸엔테 라 레이나


오늘은 알베르게에서 가장 많은 한국인을 만났다. 9명의 한국인들은 숙소 앞 마당에 둘러 앉아 '왜 이 길을 걷고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조심스레 꺼내놓았다. 저마다 눈에 보이지 않았던 상처를 생전 처음 보는 사람들에게 나누고 있다. 오랫동안 곪았던 상처를 꺼내놓기까지 참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우리는 서로에게 이야기를 꺼내놓으며 생각보다 그 상처가 아프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던 것 같다. 왜 그 것을 '상처'로 이름짓고 오랜 시간을 아파하며 살아온 것일까?


서로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아주 조금 두려웠다. 30여일이 지난 후에도 아무 것도 바뀌지 않는다면 그래도 나는 이 길을 걷게 된 것을 후회하지 않을까? 어쩌면 적어도 이 길 위에서 내가 더 이상 내가 아닌 당신을 생각했다는 사실만으로 나는 감사하며 걷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작은 확신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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