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모든 아픔

라라소아냐 - 팜플로나

by Jessie


Larrasoana ▶ Pamplo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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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에 오른지 얼마 되진 않았지만 이젠 습관처럼 아침 일찍 눈을 뜨기 시작한다. 한 공간에서 이렇게 많은 사람들과 함께 잠든건 아마 대학교 MT 이후로는 처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코를 고는 소리도, 뒤척이는 소리도, 빗소리와 적당히 섞여 누군가에게는 자장가가 되었고 누군가에게는 깊은 잠을 방해하는 소리가 되었다. 아마 나에게는 후자였던 모양이다. 동이 트기도 전인 꼭두 새벽부터 몇 번이나 잠을 청하려 애썼지만 한번 깨어난 나는 결코 다시 잠들 수 없었다. 억지로 잠을 청하는 내내 창 밖으로는 빗소리가 들렸다. 처마에서부터 어느새 축축해진 대지로 고공낙하하는 빗방울 소리. 작은 파장의 소리까지 들리는 걸 보면 내 감각도 꽤 쓸만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칠흙같은 어둠이 여전히 내려앉은 새벽 5시 30분 언저리,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침낭을 사각거리며 챙기기 시작했다. 옆 침대에서 주무시던 아저씨가 점등은 6시 30분이니 조용히 하라며 주의를 주셨고 나는 울며 겨자먹기로 다시 침대에 송장처럼 누워 미동없이 머리 위 차갑디 차가운 철제 침대의 바닥을 오랫동안 올려다 보는 중이었다. 어둠 속에서는 그리운 사람의 얼굴이 더욱 짙어진다. 지난 저녁 H언니가 건내준 이야기가 떠올라 종이에 벤 상처처럼 소리없이 오래오래 심장이 아팠다.



6시 30분이 되자마자 채 싸지 못한 침낭과 배낭을 집어들고 나와 비를 맞으며 배낭을 꾸리기 시작했다. 오늘은 아침다운 아침이나 따뜻한 커피 한잔 입속으로 밀어넣지 못하고 길을 나섰다. 그런 내 뒤를 H언니가 어느새 함께 걷고 있었다. 지난 밤, 내가 쉬이 잠들지 못했던 걸 언니는 이미 알고 있는 듯 했지만 그 어떤 말도 없이 언니는 묵묵한 걸음으로 나를 위로했다. 이유있는 침묵과 성숙한 여운이라 표현해도 좋을 듯한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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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걸은지 3일째를 맞지만 마치 지난 1년을 쉬지도 않고 이렇게 걸어온 것만 같은 착각에 빠져든다. 비가 오는 오솔길을 혼자가 아닌 둘이서 함께 걷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외롭지 않았다. 오솔길을 지나자 내가 언제까지고 꿈꾸고 그려왔던 초록의 밀밭이 두 눈 앞에 나타났다. 나는 그 밀밭이 너무나 반가워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그제서야 위로의 시간이 끝이 났다. 비가 오는 오솔길과 둑방을 한참이나 걸은 덕분에 잔뜩 젖은 신발을 벗어 던지고 우리는 배고픔을 조금이나마 채우기 위해 가방 한 구석에 챙겨둔 아침을 먹기 시작했다. 우비를 입은 채 허겁지겁 말라버린 빵 조각을 물고 있는 나에게 지나던 순례자가 웃으며 인사를 건냈다.


그렇게 짧은 아침 식사가 끝나고 우리는 다시 길을 걷기 시작했다. 파티플래너로 일했던 언니는 꽃을 대할 시간이 많아서 길 가에 피어있는 작은 꽃과 나무들을 쉬이 넘기지 않고 그들에 대해 어렵지 않게 설명해 주기 시작했는데 이 길 위에선 '양귀비'나 '연리지'같은 식물들이 대표적이었다. 카미노를 걸으며 자주 마주하게 되는 친구들을 인지하기 시작한 후부터는 '외로움'같은 감정보다는 '반가움'이라는 단어가 나에게 더 어울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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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가 살아온 시간들을 나누다보니 어느새 대도시 '팜플로나' 초입에 도착했다.

카미노에서 처음으로 만나는 대도시라 우리 뿐만 아니라 길 위에서 만난 모두가 조금은 부푼 모습이다. 몇 백년의 이야기가 담겨 있을 것 같은 돌다리도, 고고한 성문도 다 지나고 나면 본격적으로 성곽 내부에 자리한 중세시대의 마을을 돌아볼 수 있게 된다. 다행히도 그친 비 덕분에 우리는 판초우의를 벗어들고 도시에 들어설 수 있었다. 우리는 도심 언저리가 아닌 새로 지은 듯한 느낌의 알베르게에 멈췄다. 하루에 18유로나 되는 가격의 알베르게이지만 대도시에 왔으니 이 정도의 호사를 누려도 괜찮겠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캡슐형의 알베르게는 커텐이 달려 있어 개인적인 공간을 가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깨끗한 세탁기와 정갈한 아침까지 제공해 주었다. 요 몇 일, 순례길에 적응하느라 잔뜩 긴장했던 몸에게 작은 선물을 해준다 생각하니 한 번의 사치에 기분이 좋아졌다. 깨끗한 샤워실에 들어서면 습관처럼 고마운 발을 슥삭거리며 문질러주는 버릇이 생겼다. 물집이 생겼는지, 상처가 났는지 내일은 얼마나 더 걸을 수 있을지를 살펴보는 시간, 나는 가장 낮은 부분을 마음에 담는 연습을 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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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햇님이 머리 꼭대기에 자리하고 있는 시간, 50리터의 배낭은 내려두고 잠시 배낭을 뒤적거려 여행자의 옷으로 갈아 입었다. 팜플로나 구석구석을 걸으면 걸을 수록 스페인이라는 나라에 대한 작은 애정과 관심이 하나 둘 생겨났다. 씨에스타로 잠시 문을 닫은 상가들 사이로 여전히 길을 걷고 있는 순례자들이 거리의 풍경을 대신하고 있었고 나의 시선은 그들의 뒷모습과 함께 건물 한 켠에 조그맣게 자리한 노란색 화살표에 머물렀다. 여행자의 신분을 채 버리지 못하고 나는 이내 팜플로나 대학교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이 도시에 자리한 대학교에서는 순례자 여권과 함께 대학에서 인증하는 도장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순례자 여권을 받아들고 다시 저벅저벅 먼 거리를 걸어 도시로 돌아왔다. 꽤 거리가 있던 팜플로나 대학에 다녀오는동안 씨에스타가 훌쩍 지나있었다. 활기찬 상점가 사이를 걷는 것은 꽤나 기분 좋은 일. 사람들 사이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에너지가 어느새 나에게로 옮겨오는 듯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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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지러운 대도시에서 숙소를 찾아가기 위해서는 순례자를 위한 가리비를 거꾸로 찾아가면 된다. 그렇게 한참을 걷고 있으니 나와 같은 날 걸음을 걷기 시작한 사람들의 익숙한 얼굴과 마주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나에게 '신라면'을 구할 수 있는 중국인 상점을 알려주겠노라 했고 나는 거짓말처럼 그들의 걸음에 이끌려 도심 속 중국인 상점에서 신라면을 구매하고 말았다. 그리고 그 날밤은 잠시 잊고 있던 한국의 맛과 함께 체력을 되찾는 기적같은 순간을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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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을 배부르게 먹고도 채 지지 않는 바깥 풍경이 신기해진 나는 다시 그 길로 밖을 저벅저벅 걸어나가 팜플로나 사람들의 흔적을 담기 시작했다. 이미 문을 닫은 어느 작은 상점 앞에 기대앉아 일기를 쓰며 '아픔'에 대한 정의를 홀로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길을 걸으며 만나는 사람들과 각각의 사람들이 가진 아픔의 갯수를 헤아리다보면 얼마나 많은 아픔들이 세상에 존재하는지를 떠올리며 너무나도 까마득해 지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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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아픔을 털어놓은 J와 그 아이를 성숙한 사람이 될 수 밖에 없도록 한 상처에 나조차도 너무나 아파져서 또 아파져서 골목 어귀를 바라보며 한참동안 숨을 골라야만 했다. 지난 밤 그렇게나 아파보였던 J는 오늘은 세상 누구보다 밝은 미소로 광장에 앉아 모히토를 마시고 있다. 그 옆 모습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어른이 되는 것은 바로 이런 거구나, 라는 걸 나도 모르게 느끼고 만다. 매일 모두에게서 조금씩 배워가고 있다.








5월 28일. 팜플로나


'누군가를 이해하는 일'그 사람의 모든 역사를 이해하지 않는 한 결코 가능하지 않은 일이며 어쩌면 시간이 아주 오래 지난 후에도 결코 그럴 수 없는 일 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나는 '이해하지 못한 채' 아니 어쩌면 '그런 노력조차 없이' 그 누군가에게 당신을 이해한다는 이야기를 얼마나 해왔던 것인지에 대해 잠시 반성하고 또 반성했다. 상처가 많은 사람은 성숙할 수 밖에 없다. 어둡고 긴 터널을 홀로 지나온 사람은 그 누구도 공감할 수 없는 '내공'이 자신도 모르는 채 생겨버리고 마니까. 나는 상처가 많은 사람들과 적어도 같은 의자에 앉아 위로의 시간을 보내는 법을 깨달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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