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분에, 괜찮았던 처음

파리- 생장피드포르 - 론세스바예스

by Jessie

프랑스 파리,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설레는 여행지이지만 나에게는 산티아고에 가기 위해 닿아야만 하는 그 어떤 도시에 불과했다. 사실 비어있는 여행자의 주머니는 프랑스의 비싼 물가가 지나치게 부담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아침과 저녁을 준다는 한인민박에 머물며 파리의 소박한 거리를 걸었다. 5월이지만 꽤나 쌀쌀한 날씨에 코끝이 아려오는 것 같았다. 떠나기 전날 '혹시 모르니까..' 라며 c가 서둘러 벗어준 후리스가 아니었다면 나는 순례길을 채 걷기도 전에 동사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프랑스에 머무는 4일동안 가장 아쉬운 일이 무엇이냐 묻는다면 나는 단숨에 오르쉐미술관과 루브르 박물관에 들리지 못한 것이라 말하고 싶다. 여행자(더 정확하게는 순례자)의 주머니는 언제나 가벼웠기 때문에 하나를 선택하면 다른 하나를 포기해야하는 선택지와도 같다. 아쉬운 마음에 루브르 박물관 광장에 앉아 바게트 빵 한 조각을 한 입 가득 베어 물었다. 광장에는 나를 제외하곤 모두 연인과 함께라는 사실을 깨닫는데는 빵 한 조각을 야무지게 삼키는 데까지의 시간이 걸렸다. 순례길을 걸으러 온 이 순간까지도 외로움을 기여코 찾아내는 나의 신경계가 정말이지 징그러울만큼 대단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 때 사랑이라는 감정으로 서로를 불렀던 몇 몇 사람들의 얼굴이 순식간에 곁을 스쳐갔지만 결국엔 나 혼자 몸채만한 배낭을 메고 이 곳에 서 있을 뿐이었다.



한인 민박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머물고 있었다. 6명이 오손도손 모여서 잠을 자야하는 공간에는 밤이 되자 모두가 모였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기 위해 파리에 왔다는 나에게 10개의 눈빛이 모였다. 그 눈빛의 대부분은 호기심을 안고 있었고 이미 그 길을 걷고 한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파리에 왔다는 윗 침대의 언니는 나를 여러 의미가 담긴 눈빛으로 바라봤다. 추운 날씨를 채 견디지 못하고 콧물을 훌쩍이던 나에게 언니가 감기약을 건내주었다. 잔뜩 긴장했던 몸이 익숙한 한국어를 들으며 녹아내려서였는지 나는 언니가 건내준 약을 쥐고서 앉은 채로 잠이 들었고 아주 오랫만에 기면증의 일부인 내 지독한 습관 하나를 모두에게 보여주고야 말았다. 주변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그 순간부터 나를 걱정하기 시작했고 결국 윗 침대의 언니에게 복대를 억지로 받아 들고서야 모두들 나를 안심하고 재워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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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새벽,

일찌감치 아침을 먹고 떠날 채비를 하던 중에 윗 침대 언니가 커피 한잔을 들고 등장했다. 떠나는 내 뒷모습을 배웅하고 싶었다던 언니는 요플레로 허기를 달래는 내 곁을 지켜주었다. 짧지 않은 아침 시간동안 언니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눈물 없이 들을 수 없는 생생한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혼자 배낭을 메고 아침 10시부터 피레네 산맥을 넘기 시작한 언니는 사전 정보도 정확히 얻지 못한채로 정말 가볍게(?) 그 여정에 들어섰단다. 4월이지만 이상 기후 현상으로 여전히 눈이 쌓여있던 피레네 초입부에는 사람의 흔적조차 없었고 물과 음식 그 어떤 것도 준비하지 않은 언니는 홀로 외롭고 두려운 산행을 시작한 것이었다.(대부분의 사람들은 동이 트는 아침 일찍 산행을 시작한다) 배고픔과 허기에 어지럼증이 몰려오자 가던 길을 멈추고 앉아 배낭을 샅샅이 뒤졌더니 덩그러니 커피믹스 하나가 등장했다. 뜨거운 물조차 없었던 언니는 길 가에 있는 눈과 커피믹스를 손으로 주물러서 먹었다고 했다. 한참 산을 오르다 기적적으로 만난 사람들에게 부축을 당하며 겨우 피레네를 넘었다던 언니의 이야기는 가방 속 식량을 한 번 더 확인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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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어를 하나도 알지 못하는 나는 혹여나 하는 마음에 이른 새벽부터 길을 나서 테베제(KTX와 비슷한 열차)를 기다렸다. 쌀쌀한 날씨를 이겨내기 위해 카푸치노 한 잔을 마시며 창문 너머 이른 새벽부터 바쁘게 움직이는 파리의 사람들을 바라봤다. 여행자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다면 어디서든 여행하는 삶을 살 수 있을텐데 하는 설익은 생각을 해본다. 아마 그러한 삶 역시 매일 반복되면 나는 일상을 살게 되겠지만 말이다.


열차를 놓칠새라 한참동안 전광판 주변을 서성이다가 익숙한 번호가 불리는 순간 열차를 향해 부리나케 달려갔다. 테베제를 타기 전, 한 동양인 여자가 같은 피부색의 '동성'인 내가 반가웠는지 눈으로 나의 행보를 쫓았다. 생장 피드포르에서 바욘역까지는 약 3시간. 역에서 내리자마자 아까 지나쳤던 동양인 여자가 나에게 말을 걸었다.



"저기, 한국분이시죠?

아까 뵙고 너무 반가웠어서요.. 카미노 가는거 맞으시죠? 같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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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욘에서 생장행 열차는 2시간쯤 후에 있어서 우린 함께 바욘 역 밖으로 나가서 간단한 요기를 하기로 했다.

나는 전날 마트에서 샀던 바게트를 그리고 그 친구는 샌드위치를 꺼내서 서로 나눠 먹으며 간단한 소개를 마쳤다. 나보다 두 살이나 어린 J는 무척이나 용감하고 씩씩한 친구였다. 무엇보다 나보다 음식 고르는 안목이 뛰어나다는 것은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사실. 주머니 사정을 고려해 바게트 빵 하나로 대충 떼우던 내 손 끝을 바라보던 J는 본인의 샌드위치를 반으로 나눠 내 손에 쥐어주었다. 차마 나의 밋밋한 바게트로 그녀의 허기를 채울 수는 없겠지만 나는 그녀에게 받은 마음만큼 나의 마음을 나눠 그녀에게 쥐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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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을 먹고 가볍게 바욘이라는 작은 마을을 걸었다. 동양인이 신기했는지 꽤 많은 시선이 우리에게 머물렀다. 나는 가볍게 인사를 건냈고 사람들도 답례를 보낸다. 그 짧은 인사에 갑자기 이 작은 도시의 온도가 따뜻해 지고 말았다. 차마 멀리 나갈 용기를 내지 못한 우리는 기차역 분수대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아 무거운 배낭에 기대어 흘러가는 시계 바늘을 하염없이 바라봤다. 가만히 흘러가는 시간을 바라보다 문득 호주를 떠나기 전 알게된 친구가 떠올랐다.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일하는 동안 자주 찾아오던 단골손님, 팸 할머니.

할머니는 일주일에 5번, 똑같은 사이즈와 똑같은 맛의 아이스크림을 매번 사가셨다. 초콜렛 칩 쿠키도우3, 쿠키 앤 크림3, 스트로베리 치즈케이크1, 녹차 1. 아주 한치의 오차도 없이 말이다.


"할머니~ 아이스크림 진짜 좋아하시나봐요! 오실 때마다 8만원치 아이스크림을 사가시고 말이예요"


할머니는 잠시 숨을 고르시더니 말씀하셨다.


"내 딸이 많이 아프거든, 이 아이스크림을 먹어야만 하는 그런 이상한 병이 있어. 사실 이 아이스크림을 다 먹지도 않고 한 두스푼만 떠먹고는 매번 쓰레기통에 집어넣는데도 매일 사달라고 하니 어쩔 수가 없구나.."


18살 때 갑자기 시작된 이 증상은 뚜렷한 병명이 없었다. 단지 할머니가 건내준 쪽지에는 거식증과 폭식증 등의 여러가지 병명이 뒤섞여 있을 뿐이었다. 그 후로 10년 동안을 방 안에서 지내며 학교도 가지 않고 빛이 들어오지 않게 창문을 막아두고 오롯이 할머니의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견뎌왔다는 이야기를 듣고서 마음이 너무 아팠다. 그래서 나는 할머니가 오시기 전이면 매일 아이스크림 뚜껑 위에 작은 메세지들을 써서 할머니편으로 보내기 시작했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가장 간절한 것은 이루어진다는 이야기, 디즈니 월드에 갈 수 있기 까지의 나의 노력들, 노래 가사 속의 어떤 영감까지.

할머니는 나를 무척이나 아끼셨다. 할머니의 가족을 사랑했고 그 가족들도 나를 사랑해주었다. 할머니의 아들, 할머니의 딸 그들에게 어쩌면 나는 조금 특별한 사람이었다고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내가 호주를 떠나기 이틀 전, 할머니의 딸은 갑작스럽게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나에게 영향을 주던 혹은 내가 기운을 나누던 누군가가 '갑자기 사라졌다'는 표현은 어른이 되고선 6년 만에 다시 입 밖으로 읊어보는 말이었다.


그 순간, 나는 묻고 싶었다.

왜 헤어짐이라는 큰 아픔을 겪으면서까지 누군가를 만나야 하는거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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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낭은 자꾸만 이런 생각, 저런 생각으로 무거워지고 있었다. 그 순간 멀리서 정각을 알리는 기차역의 종소리가 들렸다. 무거운 배낭을 다시 짊어지고 아무렇지 않은 척 기차로 향했다. Saint jean pied de port 로 향한다는 나의 발음은 여전히 그 누구도 알아듣지 못했지만 길을 잃을 염려는 없었다. 나와 비슷한 차림의 사람들이 몸채만한 배낭을 짊어지고 기차를 향해 걷고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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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저마다의 이유를 가지고 이 길을 걷는다. 그 이유는 모두 다르지만, 우리는 하나의 목표를 향해 걷는다는 공통점 하나만으로 서로 가까워지고 함께 눈물 흘리곤 한다.



카미노 데 산티아고.


기차 안에서 나는 한참이나 내 볼을 꼬집었더랬다.

이 것이 꿈일까하고. 만약 꿈이라면 깨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Day2

Saint jean pied de port ▶ Roncesvall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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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새 한참을 뒤척인 바람에 나와 같은 침대를 쓰던 Y언니도 덩달아 잠을 설친 것 같았다. 둘이서 그렇게 몇 시간을 부스럭 거리길 반복했으니까. Y언니는 순례자 사무실에 들어섰을 때 J와 함께 가까워진 사람이다. 우리는 코린(Korean) 이라는 이유로 함께 방을 배정 받았고 좁은 침대를 나눠 쓰게 되었다. 상대의 아주 미세한 움직임에도 신경이 곤두서 잠들 수 없게 되자 일분 일초라도 빨리 잠들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했던 지난 밤, 그 간절함도 시간이 모두 해결 해주었다는 것을 아침이 되어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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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아침,

동이 트자마자 길을 나서는 순례자들의 고요하면서도 활기찬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가만히 침낭에 누워 누군가가 걷는 모습을 상상하자 기분이 묘해졌다. 꿈이 어느새 가까워져 내 발 끝에 대롱대롱 걸려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데까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아침 6시 30분. 할머니가 지난 밤 꼬레아나들은 아침부터 너무 부산스럽다고 주의를 주셔서 우리는 아침 시간에 맞춰 1층에 자리한 식당으로 갔다. 아침이라 해봐야 바게트 빵과 쨈, 카페 그리고 레체 혹은 티가 전부였지만 밥 없이도 살 수 있는 사람인 나에게는 빵 몇 조각이 엄청난 진수성찬처럼 느껴졌다. 따뜻한 커피 한 잔에 지난 밤의 서러움이 사르르 녹자 나는 게나마 공부해 온 프랑스어로 할머니에게 인사를 건냈다. 그러고 보면 매일매일 프랑스어도 못하는 사람들이 몰려와 소중한 자기 집을 마구 이용하고 어지럽히는 모습을 보면서 할머니도 얼마나 지치셨을지가 조금 이해되기 시작했다. 이제야 할머니의 입장에서 상황들을 바라보게 되는 나는 '한 발 늦은 어른'이다.


'안녕하세요'와 '감사합니다'라는 두 개의 문장만으로도 여행이 얼마나 풍족해질 수 있는지를 나는 이 곳에서 처음 깨달았고 그 덕분에 그 후로도 어느 나라를 가던지 그 나라의 언어를 공부하는 습관이 생겼다. 덕분에 '여행은 사람이다'라는 나의 철학과도 발을 나란히 맞춰 가고 있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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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식사를 하면서 피레네에 대한 정보를 들은 결과, 피레네부터 10kg이 넘는 배낭을 메고 걸으면 나머지 일정에 무리가 올 수도 있다는 판단에 우리는 무거운 배낭을 택시에 태워 다음 목적지까지 보내기로 했다.(8유로) '힘들기 위해 온 순례길인데 편하게 가려고 수쓰는거 아니야?' 하는 마음과 '처음부터 무리해서 몸도 마음도 힘들 필요는 없는 것같아'라는 마음이 아침 먹는 내내 들었지만 두 눈 꼭 감고 배낭을 보냈던 것은 꽤 잘한 선택이었다. 물론 산을 오르는 내내 '너 배낭 어디있어?'라는 이야기를 들어야 했지만 점심을 넘기고서는 꽤 많은 사람들이 '잘한 선택'이라며 부러워했다. (하지만 나에게는 죄책감이 여전히 남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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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먹고 우리는 모두 각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결국엔 그 길의 끝에서 만나게 될 것이라는 막연한 안도감을 가지고 있었으니 말이다. 이른 아침의 피레네는 몽환적인 분위기에 휩쌓여 있었다. 안개가 자욱한 산길을 헤치며 걷는 것도 꽤나 낭만적이라는 기분에 젖어들 때 즈음에 혼자 길을 걷는 나에게 캐나다에서 온 한 부부가 반갑게 인사를 건냈다. 5월 26일에 여정을 시작한 나에게 '행운'이라는 이야기를 함께 건내며 말이다. 이상 기후로 인해 5월까지 눈이 내렸던 피레네 산맥 그리고 우리가 여정을 시작하기 전날인 5월 25일은 비가 오다 못해 눈이 내려 피레네 산맥을 타고 내려가다 한 순례자의 다리가 부러졌고 다른 사람들은 피레네가 아닌 우회로를 통해 론세스바예스까지 걸었다고 한다. (후에 듣자하니 27일 또한 눈이 왔단다) 우회로가 아닌 온전한 피레네의 길 그대로를 두 발로 걸을 수 있다는 사실이 누군가에게는 평범한 일일지도 모르지만 오늘의 나에게는 무무척이나 감사한 일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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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보다 먼저 안개 낀 산길을 오르는 순례자들을 바라보며 아직 갈 길이 한참이나 남았음을 깨닫고 만다. 한참을 걸었다고 생각했는데 말이다. 앞이 보이지 않는 길을 걷는다는 건 어쩌면 인생을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내 발 끝 어딘가에 있을 그곳을 향해 조금씩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걷다보면 자신도 모르는 새 안개가 자욱했던 구간을 지나 아래를 내려다볼 수 있게 된다는 것. 그렇게 묵묵하게 자신의 길을 걷는다는 건 어쩌면 '단단해진다'는 말과 닮아있는 행동이 아닐까. 나도 저 지독한 안개를 이해하게 되는 날이 언젠가 오게 될거라는 생각이 들자 지금의 안개조차도 감사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나는 언제나 조금 더 단단한 사람이 되고 싶었으니까. 초록을 머금은 안개 냄새가 좋았다. 코 끝을 시원하게 감싸는 물방울의 존재와 그 묘연한 안개 속에서 이따금씩 용기를 주는 새소리까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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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낙 시골에서 자라온 터라 작은 돌담과 농작물이 자라는 텃밭 이따금 코 끝을 자극하는 소똥냄새까지도 익숙한 나지만 배경이 다른 곳에서 만난 시골은 꽤나 낭만적이다. 그렇게 주변을 한껏 만끽하며 걷는 내 곁에 파란색 니트의 퀸튼이라는 청년이 보폭을 함께 했다. 간단히 아침 인사를 마치고 이어진 잠시의 정적은 동시에 내딛는 발자국 소리가 메워 주었다. 벨기에에서 왔다는 퀸튼은 끝이 보이지 않는 오르막길을 걷는 내내 나와 엎치락 뒤치락하며 보폭을 주고 받았다. 퀸튼이 잠시 배낭을 내려놓고 쉬는 모습을 보고서는 나도 곁에 털썩 주저 앉아 숨을 골랐다. 이제서야 내가 걸어온 길을 돌아보는 여유가 생겼다. 꽤 많은 길을 걸어냈다는 생각이 들자 마음 한 켠에서 자존감이 한 마디 자라나는 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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퀸튼은 종교적인 이유로 이 길을 걷고 있다했다. 산을 오르며 이따금씩 만나게 되는 누군가의 묘석과 십자가 앞에서 퀸튼은 한참동안 두 손을 모아 기도를 했다. 기도를 하는 누군가의 모습을 보며 아름답다는 생각을 한 경험은 아마 처음이었던 것 같다. 기도를 하고 있는 그 모습만으로도 나는 그의 간절함을 들을 수 있었다.



퀸튼은 이 길을 걷기 전 벨기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여행경비를 벌었다. 그리고 한 달을 자동차를 빌려 아일랜드를 돌았고 대부분의 날동안 차에서 잠을 잤다고 한다. 이따금씩 볼일을 보기 위해 차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면 쏟아지는 별을 보며 '아름답다'고 조용히 읊조렸다고 말했다. 피레네만큼이나 초록이 가득한 그 곳에 가면 너는 분명 행복해질거라고 그가 말했다. 그 날 이후로 '아일랜드'라는 곳은 나에게 하나의 로망이 되었다.



벨기에에서 건축학을 전공하는 너는 다른 유럽 국가들도 여행하며 다양한 건축물들을 보고 싶다고 생기 넘치는 목소리로 말했다. 대학 진학 전 1년의 시간동안 아프리카에 봉사활동을 간 여자친구를 기다리며 이 길을 걷게 되었다는 그의 모습에서는 기분 좋은 향기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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퀸튼과 함께 초코바를 나눠 먹던 중 만나게 된 John과 Sera 아주머니. 부부가 아닌 남매라는 이야기에 잠시 놀랐다. 길을 걷는 내내 나와 보폭이 비슷해 하루에 한 번 혹은 이틀에 한 번 꼴로 만나곤 했는데 그때마다 내 이름을 불러주시며 반갑게 손을 흔들어주셨다. '인사'하는 일을 유독 좋아하는 나는 그들을 만나는 일이 나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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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례길을 걷다보면 자전거로 길을 건너는 사람들을 꽤 자주 마주치게 된다. 적어도 피레네 산맥을 넘는 동안은 그들을 부러워하지 않게 되는데 그 이유는 바로 이것이었다. 그들은 끝도 없는 오르막을 자전거와 함께 올라야하는 운명이었던 것이다. 눈이 채 녹지 않은 피레네를 자전거로 오르는 (혹은 내리는) 일은 꽤나 험난하고 위험한 일임에는 분명해보였다. 피레네를 내려온 이후론 그들의 뒷모습을 보며 마냥 부러워했지만 말이다.


피레네 산맥 곳곳에 자리하고 있는 묘비들은 여정을 꾸려가는 동안 나에게 '안전'을 상기시켜주는 지표가 되주었다. 갑자기 커피믹스와 눈을 섞어 먹었다는 언니의 얼굴이 떠올랐다. 만약 언니가 그 길 위에서 뒤늦게 산을 오르는 순례자들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이라는 생각과 함께 등골이 살짝 서늘해지고 말았다. 무모한 용기와 위험은 찰나의 순간 뒤바뀔 수 있는 단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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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색 화살표에 의지하며 길을 걷지만 잠시 다른 생각에 빠져들면 자기도 모르는 새 길을 잃고 만다. 잠시 한눈을 판 사이 화살표를 잃어버려 두 다리와 직감만을 믿고 가야할 때도 있다. 하지만 어디로 가든 목적지를 잊지 않는다면 '결국에는' 닿게 된다는 것을 두 다리를 통해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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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길을 걷던 누군가는 산을 넘는 시간이 그렇게나 힘들고 외로웠다고 말했지만 나는 마음이 맞는 친구와 함께한 덕분에 힘듦을 함께 나누며 어려운 구간을 난관없이 건널 수 있었다. 진흙탕에서 몇 번의 엉덩방아로 보기 흉한 흔적을 얻었지만 그 덕분에 함께 즐거웠으니 '괜찮았다'고 말할 수 있는 추억이 생겼다. 나이는 때론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는다. 마음을 주고 받을 수 있는, 힘든 여정을 곁에서 말없이 지켜주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친구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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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7시에 숙소를 나서 오후 3시가 다 되어서야 도착한 론세스바예스. 이 작은 알베르게는 수녀원에서 운영하는 곳이라고 했다. 겉은 굉장히 웅장하고 오래된 느낌이어서 별 기대를 하지 않았지만 내부 공사를 마친지 얼마되지 않아 엄청나게 깨끗했고 무엇보다 세상과의 통신이 가능한 곳이었다. 간단한 개인 정보(성별, 이름, 왜 길을 걷는지..)를 적어 제출하고 알베르게 요금(10유로)을 지불하고 나면 머물 방을 안내해준다. 아름다운 성당이 함께 있어 저녁 시간에는 동네 주민들을 위한 미사가 있는데 시간이 허락된다면 종교를 불문하고 미사에 참여하는 것도 좋다. 이 길 위에서 종교라는 것은 절대적인 것 이상을 의미하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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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식사를 하고 호기롭게 취기가 오른 나는 일기장을 꺼내 들었다. 초등학교 이후로 일기나 가계부 쓸 일이 없었던 나에게 새로운 습관을 심어주는 일은 굉장히 신선하게 다가왔는데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고 내 자신에게 보이게 될 일기장이라는 사실이 특히나 그러했다.



하루가 저물어간다.

일기를 쓰려고 작은 벤치에 앉아 혼자 펜을 열 번쯤 굴렸을 때 손목에서 시계가 딸깍- 하고 떨어졌다. 이 곳에서는 시간에 연연하지 말라는 의미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방 안으로 돌아와 배낭 깊숙한 곳에 끊어져버린 시계를 집어 넣었다. 오랫동안 내가 집착하고 있던 숫자들에서 벗어나 눈과 마음에 닿는 것들을 오래 바라볼 용기를 얻었다.

침대에 앉아 발을 주무르면서 오늘 하루, 고생했던 내 자신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건낸다. 내 몸에게 고맙다는 이야기를 하며 스스로에게 되물었다. '내 발을 제대로 들여다 본 적이 있었던가?'하고 말이다. 카미노를 준비하며 매일 5km씩 걸어냈던 지난 4개월동안 나는 그 흔한 '고맙다'는 말 한마디조차 스스로에게 건내본 기억이 없었다. 스스로에게 머쓱해졌지만 아무래도 괜찮았다. 내일의 나는 조금 더 나아져있을테니까.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고 안 좋은 일 끝에는 꼭 그만한 좋은 일이 뒤따르는 법임을 작은 걸음을 통해 깨닫는다. 잊고 싶지 않은 마음에 한참동안이나 펜을 굴리며 일기장을 바라봤지만 솔직한 감정을 그대로 옮기는 일로 만족해야했다. 여정을 떠나온 이후 처음으로 깊은 잠에 빠져 들었다.





5월 26일. 론세스바예스


" 오르막을 오르면서도 자주 쉼표를 찍어주고 그 오르막에서 내려다 볼 풍경을 상상하며 그 과정을 인내할 수 있다면 아마 더 높은 언덕도 나는 오르게 될 수 있지 않을까? 어쩌면 이 모든 여정 끝에는 오르막조차도 즐길 수 있는 나를 만나게 될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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