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용기내도 괜찮아

론세스바예스 - 라라소아냐

by Jessie

Roncesvalles ▶ Larrasoa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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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아침부터 여정을 준비하는 사람들의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잔뜩 예민해진 나도 덩달아 잠에서 깨어났다. 눈을 뜨자마자 커피를 마시는 습관은 여기서도 여전했다. 작은 동전지갑 안에 있는 몇 알의 동전을 탈탈 털어낸 다음 수도원 1층에 자리한 자판기에 동전을 넣었다. 오롯이 나만 존재하는 공간에서 동전 굴러가는 소리가 유난히 소란스럽게 느껴졌다.


어제 하루를 꼬박 다 걸어냈더니 다리가 꽤 저려왔다. 배낭을 한편에 내려두고 몸을 풀던 중 이 곳에 머물렀던 순례자들이 남기고 간 방명록을 발견하고 몇 장을 앞으로 넘기던 중 익숙한 글씨 앞에서 책장이 멈췄다. 깊다는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글 앞에서 잠시 가슴이 먹먹해지고 만다. 그렇게 한 손에 식어버린 커피를 들고 나는 한참동안 몇 번이나 이 글을 다시 읽고 또 읽어냈다. 나보다 앞서 길을 걸은 사람, 누군가의 길을 진심으로 축복해주는 사람. 오늘은 또 다른 생각과 숙제를 짊어지고 길을 걷게 될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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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게 자판기에서 뽑은 샌드위치 하나를 입에 물고 다시 길을 나섰다. 이 곳에서 산티아고 콤포스텔라까지는 약 790km. 어마어마한 여정이 남았다. 다른 한편으로는 아직 걸어야할 길이 한참이나 남았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다. 그 누구의 도움도 없이 스스로 그 모든 것들을 해쳐 나가는 시간이 될 것이다.


배낭은 꽤나 무거웠다. 어제 하루 배낭을 짊어지고 걸었더라면 아마 아주 느즈막히 알베르게에 도착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11.3kg의 배낭 그리고 작은 카메라 하나. 나라는 인간이 살아가면서 필요로 하는 것들이 꽤 많다는 사실을 배낭을 메고서야 비로소 깨달았다. 사실 그 중에서 살아가는데 가장 필요한 것은 정직하게 말해선 없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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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오롯이 혼자서 보내고 싶은 마음에 조금 속도를 내서 걷기 시작했다. 뒤로는 어제 처음 알베르게에서 만나게 된 한국인 몇 명이 이야기를 도란도란 하며 걸어오고 있었다. 길을 나서며 들은 이야기로는 오늘 다시 피레네 산맥에 눈이 오고 있다고 했다. 경건한 마음으로 길을 걷는 그 누구에게도 사고가 일어나지 않기를 조심스레 바라며 걸음을 옮겼다.


밤 10시에 해가 지는 이 곳에서 사람들의 아침은 늦다. 모두가 잠들어있는 마을을 홀로 걷고 있으니 꽤나 이상한 기분에 빠져 들었다. 마치 '고양이의 보은'이라는 애니메이션 속에 내가 잠시 등장한 것 같은 기분이랄까. 고요에 쌓여 있는 마을 사이로 자박거리는 내 발자국 소리가 작은 메아리가 되서 퍼져나가는 소리를 듣고 있으니 이 작은 마을이 오롯이 나를 위해 자리하고 있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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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들어있는 마을의 작은 창문을 보며 생각한다. 내 마음의 문을 열기 위해 나는 한 번이라도 진실된 마음으로 노크를 해본적이 있었던걸까, 하고. 열려있는 듯 보이지만 사실 나는 꽤나 닫혀 있는 사람이라는 걸 누군가에게서 전해들었을 때를 떠올렸다. 좀 더 '괜찮은 사람이 될 수는 없는걸까?' 라는 질문을 가만히 나에게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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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 길을 걷는 내 뒤로 누군가가 웃으며 인사를 건낸다. 커다란 DSLR을 들고 있던 남자는 스페인 출신이란다. 길을 걷는 사람들에게서 '길을 걷는 이유'를 담는 것이 이번 순례길을 걷는 목적이라고 했다. 갑작스러운 인터뷰에 살짝 당황했지만 덤덤하게 말했다.


"왜 이 길에 오게 되었어?"


"제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어요. 5년간 준비했어요. 이 곳에 오기 위해서 말이예요."


"Good Luck to you, Buen Camino (행운을 빌어, 부엔 카미노; 좋은 순례길이 되길)"


그는 다시 다른 사람들의 이유를 담기 위해 길을 재촉했다. 멀어져가는 누군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걷는 일은 처음부터 길이 끝날 때까지 익숙해지지 않았다. 혹여나 그 누군가가 나와 잠시라도 마음을 나눈 사람이라면 그의 뒷모습은 언제나 뿌옇게 흐려지고 만다. 이렇게 약해빠진 마음으로 내가 앞으로 어떤 일을 할 수 있겠냐며 독하게 입술을 깨물고서야 나는 다시금 원래의 '나'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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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이 잦아들 즈음엔 익숙한 한국어가 들려왔다. 군인 출신의 H오빠는 반갑게 인사를 건내며 자기 소개를 시작했다. 30대 중반이라는 나이에 안정적인 진로 대신 긴 휴가를 선택한 그의 이유가 궁금해졌지만 누구에게나 저마다의 이유가 있으니 나는 묻지 않기로 한다. 누군가의 사연을 듣는 일은 그의 슬픔을 나눠지는 행동이고 또 그만한 책임이 뒤따르니까 말이다. 그는 금새 나를 앞질러 갔고 나는 다시 혼자서 길을 걷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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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걷기 시작한지 이틀 밖에 되지 않았지만 카미노는 비슷하지만 조금씩 다른 풍경들을 내뱉었다. 냇가를 건넜고 때론 양들이 뭉게뭉게 흩어져 있는 농장을 지났고 하늘이 유난히 아름다운 언덕을 지나기도 했다. 이때 쯤이면 마음 깊은 곳에서 내가 부들거리며 쉬이 놓지 못했던 욕심의 끈이 팅- 소리를 내며 끊어진다. 나는 홀가분한 마음을 동력삼아 "아..... 살아있다"라고 내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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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미노 비석 위로 쌓여져 있는 사람들의 소망들. 누군가는 이 길 위에서 사랑하는 사람들의 건강을 빌었을테고, 누군가는 신을 만나기 위해 왔을테고 또 누군가는 나처럼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싶어서 왔을 것이다. 나도 그 위로 작은 소망 하나를 얹었다. 왠지 누군가가 이런 내 모습을 본다면 속내를 들킬 것 같아 사람들이 오기 전에 조그맣게 기도를 했다. 가방의 무게가 아주 조금 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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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서 산을 오르고 내르막을 타고 있자니 마음 깊은 곳에 숨어있는 두려움이 꿈틀거렸다. 갑자기 쏟아지는 빗방울을 조금 원망하다가 결국은 배낭 옆구리에 꽂아두었던 판초우의를 꺼내 입었다. 산을 내려가자 순식간에 작은 마을이 등장했다.

오전 9시 언저리면 사람들이 깨어나는 소리가 들린다. 창문이 열리는 소리, 커피 내리는 소리, 마당을 쓰는 소리 그리고 이따금씩 인사를 건내는 사람들의 밝은 목소리. 한국에선 그 많은 소리들이 뒤섞여 커다란 소음 덩어리가 되어버리는데 이 곳에서는 작은 소리 하나하나가 생동감이 되어 귓가에 머물다 흩어지곤 했다. 작은 마을 어귀에는 꽤 많은 순례자들이 모여 있었다. 인사를 건내자 그들도 반갑게 답례를 건냈다. 답례만큼이나 반가운 건 그들이 건내준 맥주 한 모금이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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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어디까지 걸어야할까,

출발을 할 때면 발이 닿을 수 있을만한 거리를 언제나 가늠하곤 하지만 그 거리는 항상이지 몸의 응답에 따라 달라지곤 한다. 때론 발이 아파서 덜 걷기도 하고 생각이 많아지면 더 많이 걷기도 하면서 말이다. 표지판은 단지 길이 어디로 나있다는 것만 알려줄뿐 그 곳으로 향하는 걸음은 오롯이 나에게 달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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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으로 닿은 조금 큰 마을 어귀에서 배가 꼬르륵 거렸다. 잠시 이 곳에 머물까를 고민했지만 허기와 한기를 털어버리고 조금 더 걷기로 했다. 스페인어가 익숙하지 않아 머뭇머뭇 거리던 나는 합석을 권하는 호세 아저씨의 추천에 힘입어 '또르띠야와 카페 콘 레체'를 주문했다. 호주에 머물면서 익숙해진 또르띠야를 나는 스페인에서 처음 알게 되었는데 야채,햄,치즈가 들어간 계란말이로 저렴한 가격일 뿐만 아니라 가난한 순례자의 배를 채워줄 소중한 음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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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저씨가 드시는 메뉴가 궁금했던 나는 용감하게 질문을 했는데 영어를 하지 못하는 호세 아저씨와 스페인어를 하지 못하는 나에게 이는 피레네만큼이나 높은 산이었다. 바디랭귀지마저도 통하지 않던 우리는 마주앉아 그림을 그려 대화를 하기 시작했다. 끝에 이해하게 된 이 음식은 초리쪼Chorizo라는 건조된 햄 종류였는데 하몽과 함께 유럽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음식이었다. 매일 하나씩 작은 것들을 배운다는 느낌이 신선하게 다가왔다. 배시시 웃고 있으니 아저씨도 함께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다. 마음이 따뜻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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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저씨와 인사를 나누고 이름이 좀 더 매력적인 '라라소아냐'까지 걷기로 했다. 점심을 먹은 마을에서 약 2km 떨어진 이 작은 마을은 공립 알베르게이기 때문에 다른 곳보다 조금 더 저렴하다(6유로) 물론 좋은 퀄리티를 기대할 수는 없다. 약 40명의 사람들이 삐그덕거리는 2층 철제 침대가 모여진 방에서 잠을 자야하고 화장실과 샤워실도 2개 밖에 존재하지 않지만 배드버그만 없다면 이 정도는 기꺼이 감수할 준비가 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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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창하진 않지만 소소한 일상이 시작되었다. 동이 트면 길을 나서고 길을 걷다 배가 고프면 어디든 주저 앉아 자연을 배경 삼아 끼니를 때우고, 길을 걷다 마주치는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고 알베르게에 도착하면 땀에 절은 몸을 씻어내고 해지는 풍경을 바라보며 일기를 쓰고 맥주를 마시는 일. 이 아무것도 아닌 일을 '행복하다'는 표현으로 어줍잖게 담을 수 있다는 사실에 오늘은 기분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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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이 곳 알베르게에 H언니와 첫날 테베제에서 만난 J가 모였다. 우리는 맥주 한 캔과 끼니를 대신할 거리를 들고 벤치에 앉아 어색하지 않은 침묵을 사이에 두고 하루가 가는 소리를 들었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우리는 덤덤하게 각자의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 나의 깊은 상처를 꺼내보이는 일. 어쩌면 너무 가까워서 차마 상처를 보이지 못한 내 사람들을 대신해 그 누군가에게 털어놓는 이야기. 사람들은 각자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고 있고 평생 그 상처를 스스로 보듬고 살아가야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순간.



H언니는 아주 덤덤하게 말했다.


"아빠도 '아빠'가 된 게 처음이라서 잘 모르셨을거야. 어떻게 다독거리고, 표현하고, 이끌어줘야하는지..

모든 걸 다 내려놓도록 노력해봐. 그리고 마음껏 미워해. 그리고 그 미움이 내려놓아지면 그 후엔 이해하려고 하는거야. 그러다보면 불쌍하고 안타까운 마음이 생겨.. 그리고 용서를 하는거야. 아니 내려놓는다는 표현이 더 좋으려나.


그리고 신을 용서하는거지. 혹은 세상을. 왜 나에게만 이런 시련을 주냐고, 왜 나는 혼자냐고. 원망했던 세상을.. 그런데 사실 알고보면 항상 네 곁에 있었거든. 너는 혼자가 아니었을거야. 곰곰히 돌이켜보면.


마지막으로는 너 자신을 용서하고 내려놓고 받아들이는거야. 그리고 너를 사랑하는거야.

내가 했던 모든 잘못들을 모두 용서하고나면 그 힘든 시간들을 버텨내준 나에게 고맙다고 말하는거지.

직접 니가 귀로 들을 수 있도록 너 자신에게 말을 해줘.



힘든 시간 잘 견뎌내줘서 고마워. 여기까지 와줘서 고마워. 고마워. 고마워.. "





5월 27일. 라라소아냐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그 상처가 어디서부터 비롯되었는지 천천히 들여다봐야한다. 그 곳에서부터 다시 거슬러올라와야한다. 나는 왜 이렇게 아파하는 것이며 나에게 상처를 준 그들은 왜 그런 행동을 했었는지.


그 모든 것들이 받아들여지는 때 즈음에는 자기도 모르게 아물어가는 상처를 발견하게 된다. 아프다고 자꾸만 감춰두면 상처는 곪는다. 바람도 쐬어주고 햇빛도 쬐어주고 약도 발라주고 입김도 호호 불어주다보면 상처는 언젠가는 낫는다. 상처를 들여다 볼 용기가 필요했다. 그리고 의외로 그 상처라는 녀석은 나의 눈물만이 아니라 다른 누군가가 나의 상처를 들으며 함께 아파해줄 때 더 빨리 낫는다는 걸 알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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