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알이 쌓여가는 마음 _ 배추

김치 하나로 충분히 위로받을 수 있던 시간들

by Jessie


일명 대가족이라 불리는 우리 집은 일 년 중에도 몇 개의 행사가 있다. 설과 추석은 물론이거니와 4개의 제사, 농번기가 되면 모판을 만들고 모를 심고 이따금 약을 치고 수확을 하는 일, 고추를 심고 배추를 뽑고 김장을 하는 일까지 며느리로서는 그리 달갑지 않을 법한 분주함이 아주 오랫동안 우리 집의 문화가 되었다. 엄마는 무려 35년의 시간을 할머니 곁에서 묵묵하게 그 일들을 이어가고 있으니 맏며느리의 책임과 역할을 떠올리며 나는 자주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자유에 목마른 나라는 사람이 지금의 시대에 태어난 것은 무척이나 다행스러운 일이라 생각하면서 말이다.



김치가 주 반찬인 한국인들이기에 배추는 어느 동네를 가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배추는 여름에 심어 가을에 수확하는 것이 일반적인 모습인데 가을로 접어들면 서늘한 기온과 햇살을 받으며 쑥쑥 성장한다. 겹겹이 잎사귀가 자라나는 통에 할머니는 늘 꽃처럼 활짝 피어난 배추를 볏짚으로 묶어두시곤 했는데 바지런히 묶여 점점 몸집이 커지고 있는 배추를 보면서 시골에 산다는 것은 어쩌면 도시에서 사는 이들보다 더 바쁜 삶을 사는 일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배추가 잘 자라도록 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배추 주변에서 기습적으로 자라나는 잡초들을 제거해주어야 할 뿐만 아니라 벌레가 먹지 않도록 약도 꼼꼼히 쳐야 하고 서리 피해를 입지 않도록 밤낮으로 배추를 들여다봐야 하기 때문이다. 할머니의 그런 수고로움 덕분에 우리 가족들은 늘 때가 되면 단 맛이 감도는 알이 꽉 찬 배추를 쌈장에 찍어먹을 수도, 부드러운 시래기로 된장국을 끓여 따뜻한 저녁을 먹을 수 있었다.



볼에 머무는 바람에서 찬기가 느껴질 때 즈음이면 할머니는 마당 뒤편에 있는 가마솥에 찹쌀풀을 쑤기 시작하셨다. 가마솥 가득 들어있는 찹쌀풀은 눌어붙지 않게 그리고 불씨가 꺼지지 않게 곁에 앉아 땔감을 적당히 넣어주고 기다란 나무 주걱으로 잘 저어주어야 했다. 할머니 곁에 앉아 땔감이 모자라지 않게 나무를 넣는 것은 그 옛날에는 증조할머니가 하시던 일이었고 나는 늘 그 곁에 앉아 증조할머니가 신문지에 싸놓으신 박하사탕과 두 가지 색이 섞인 젤리를 까먹곤 했다. 내가 좋아하는 과자는 아니었지만 어린 마음에도 나는 그것이 증조할머니가 증손녀인 나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최선의 마음이라는 것을 알고 있던 이유에서였다. 별다른 대화 없이도 증조할머니와 나는 나무가 타닥타닥 타들어가는 소리를 대화 삼아 해 질 녘의 한기를 잊었다. 할머니는 이따금 긴 곰방대에 담뱃불을 붙이고 연기를 뻐끔거리셨다.



할머니가 땔감을 모아다 찹쌀풀 만드는 것부터 김장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할머니는 반나절 동안 텃밭에 일렬로 줄 서 있는 배추를 뽑아 손수레에 옮겨 담고 부엌 앞 세면대로 가져가 배추에 잔뜩 묻어있는 흙들을 꼼꼼하게 씻으셨다. 사 남매와 그들이 낳고 기른 자식들의 허기까지 챙기느라 할머니의 밭에는 매년 배추의 포기 수가 늘어났다. 그렇게 하루가 다 저물도록 배추를 뽑고 씻고 나면 빨간 고무 대야에는 말끔하게 씻긴 배추가 수북하게 담겼다. 200포기의 배추를 반으로 잘라 고무 대야에 하나씩 겹겹이 쌓으며 굵은소금을 뿌려주고 나면 배추가 숨이 죽을 때까지 반나절을 다시 기다려야 했다. 할머니는 짬짬이 배추의 위치를 위아래로 바꾸거나 숨이 얼마나 죽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몇 번이고 부엌을 들락날락하셨는데 그제야 나는 한참이나 닳아버린 부엌 문지방을 알아차렸던 기억이 떠오른다.



그렇게 배추가 잔뜩 절여지고 나면 고모를 뺀 나머지 식구들이 모두 모여 김장을 시작했다. 할머니가 새벽부터 일어나 찹쌀풀과 직접 빻은 고춧가루, 생강, 젓갈 등을 넣고 김치 양념을 만들고 나면 며느리들은 커다란 대야에 옹기종기 붙어 앉아 숨 죽은 배추를 하나씩 꺼내 양념을 사이사이에 바르며 그간 있었던 일들을 털어놓거나 할머니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김장하는 날의 풍경이었다. 할머니 혹은 엄마 곁에 가면 늘 한 입에 들어갈 크기로 김치를 돌돌 말아 입으로 넣어주시던 모습이 나에게는 김장철이 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모습이다.

"맛이 어떠니?" 물어오는 할머니께 늘 엄지 손가락을 치켜세우던 나는 서른이 넘도록 김치 담그는 법은 배우지 못했지만 여전히 그 맛을 그리워하며 염치없이 김치를 얻어가곤 한다. 서울에서 살 때에도 빨간통 가득 김치를 넣어주신 할머니 덕분에 한 번도 김치를 사 먹어 본 적이 없거니와 시간이 지날수록 맛있게 익어가는 김치 덕분에 김치찌개, 김치찜, 돼지고기 김치볶음까지 식탁이 늘 풍성했다. 사 먹는 음식들은 금방 배가 꺼지곤 했지만 이상하게도 고향에서 받아온 음식들로 저녁을 해 먹고 나면 허기가 거짓말처럼 채워졌다. 직장에서 돌아와 잔뜩 속상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냉장고를 열고 고향에서 보내주신 김치를 꺼내 하얀 밥 위에 올려 입 안 가득 밀어 넣고 나면 거짓말처럼 내일은 조금 더 괜찮아질 것 같은 생각이 들곤 했다. 배추가 나의 식탁에 오르기까지 배추가 얼마나 많은 정성을 들여 키워졌는지를 생각하다 보면 근사한 반찬 없이도 충분히 외로움이 위로받을 수 있었다. 지난겨울에 할머니와 함께 담갔던 김치가 냉장고 가득 채워져 있다는 생각만으로 왠지 마음이 든든해지는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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