튼튼하게 자라길 바라는 마음, 시금치

푸릇한 채소가 주는 건강한 힘

by Jessie

추수를 끝내고 나면 한 해의 농사에 얼추 마침표를 찍을 수 있게 된다. 이따금 감이 익은 모양새를 보고 기다란 장대를 짊어지고 감을 따러 가거나 작은 언덕에 올라 도토리, 밤을 줍는 소소한 일 정도가 남아있을 뿐이다. 할머니는 이 시기부터 나무 땔감을 구해다 온돌방에 불을 지피고 메주를 쑤거나 콩나물을 키우곤 하셨다. 잠시의 쉬는 시간조차 허락되지 않던 할머니의 삶은 여든이 훌쩍 넘어서까지도 여전했다.




11월이 조금 더 깊어가면 본격적으로 시금치 파종을 시작한다. 시금치는 저온성 작물로 다른 작물들에 비해 겨울에도 비교적 잘 자라는 편이라 추위를 느끼기 시작할 무렵에야 재배를 시작한다. 추위를 견디기 위해 자체적으로 잎의 당도를 조절할 수 있어서 겨울에도 쉽게 얼지 않으며 겨울에는 내륙지방보다는 추위가 조금 덜한 해안 지역에서 조금 더 활발하게 시금치 재배를 하는 편이다. 겨울을 난 시금치는 더 아삭하고 달아서 할머니 밭에서 겨울을 난 시금치는 마트에서 사 온 시금치에 비해 깊고 향긋한 맛이 나곤 했다. 지금에서야 푸릇한 향내가 나는 시금치를 기꺼이 집어먹는 어른이 되었지만 어린 시절에는 여느 아이들처럼 엄마가 숟가락 위에 올려주지 않는다면 굳이 시금치 쪽으로는 젓가락질도 하지 않는 어린이였다. 하지만 어른이 된다는 것은 가장 먼저 입맛이 바뀌는 일이라 엄마가 애써 숟가락 위에 올려주던 반찬들을 요즘은 한 번 더 찾아 먹게 된다. 철이 든다는 건 분명 입맛이 바뀌는 일도 포함되는 일일 것이다.



시금치는 어디서든 쉽게 얻을 수 있고 비타민, 무기질 등을 풍부하게 가지고 있어 효자 식재료라 할 수 있다. 치매 위험을 줄여주고, 기형아 출생 위험을 낮춰주기도 해서 노년기 사람들과 가임기, 임산부에게 효과적이기도 하다. 혈액순환 개선에 도움이 되고 심장병 예방에도 좋다고 하니 두루두루 좋은 역할을 하는 채소임에는 분명하다. 하지만 시금치는 꽤 호불호가 나뉘는 채소라 특히 어린이들에게 권하는 것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닌데 어린 시절을 떠올려보면 뽀빠이라는 만화에서 시금치를 먹고 힘이 세지는 근육맨을 등장시킨 것은 편식하는 어린이에 대한 거부감을 덜어주기 위함이 아니었을지를 조심스레 유추해보는 바이다. 하지만 너무 많이 먹는다면 요로결석이 올 수 있으니 적당히 섭취하는 것이 좋겠다.




시금치는 명절이 되면 고사리, 도라지, 콩나물과 함께 제사상에 오르는 역할이라 기름진 전들로 속이 더부룩해질 때면 장독대에서 막 퍼낸 고추장 한 숟가락에 나물을 잔뜩 넣어 비빔밥을 만들어 먹는다. 무엇 하나 할머니의 손이 닿지 않은 재료가 없어서 가게에서 사 먹던 음식들보다 훨씬 배가 더디 꺼진다. 외로움과 허기를 자주 헷갈려하던 청춘의 시간에 이렇게 따뜻한 마음이 담긴 밥을 조금 더 먹고 지냈더라면 지금보다 조금 더 빨리 외로움을 잘 견뎌내는 사람이 되지 않았을는지. 할머니는 봄이면 늘 고사리를 꺾어다 마당 옆 평상에 말려놓으셨고 명절이 다가올 즈음에는 찾아오는 자식들에게 넉넉히 나눠주기 위해 콩나물을 키우곤 하셨다. 겨울의 초입에는 황량하게 비어있는 밭에 시금치를 심고 이따금 들여다보셨는데 그 작은 밭에서 다섯 가족이 먹을 시금치가 나온다는 것이 참 신기하기도 하고 땅이 빌 새도 없이 무언가로 채워져 자라난다는 사실이 경이로웠다.




소풍날이 되면 엄마는 동트기 전부터 일어나 분주히 움직였다. 8시 언저리면 출근을 해야 했던 워킹맘이었기에 김밥을 싸야 하는 날이면 늘 새벽 5시에 일어나 김밥을 말았다. 김밥 재료는 단무지, 햄, 어묵, 맛살, 우엉, 계란 그리고 시금치였는데 여러 가지 재료가 알록달록 어우러진 김밥 위에 송송송 뿌려진 참깨까지 엄마는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은 것이라며 늘 가지런하고 단정하게 도시락을 만들어 가방에 넣어주었다. 단 한 번도 김밥 도시락을 건너뛴 적 없이 엄마는 늘 운동회와 소풍날이 되면 가장 먼저 일어나 김밥을 쌌다. 꼭 시금치가 아니더라도 밭에서 난 재료를 꼭 하나씩은 넣는 걸 잊지 않았다. 아침에 눈을 뜨면 고소한 김밥 냄새가 오늘은 다른 날보다 조금 더 특별한 날이라는 걸 알려주었다. 엄마가 산처럼 잔뜩 쌓아둔 김밥들은 보기만 해도 늘 배가 불렀고 소풍을 가는 날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김밥만 먹어도 이상하게 하나도 질리지가 않았다.




시금치가 들어간 김밥 도시락을 가만히 떠올리면서 누구보다 부지런했던 엄마의 삶을 그려본다. 다른 도시락에 비해 특별하거나 대단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한 해도 빠짐없이 특별한 날이면 사랑이 가득 담긴 도시락을 들고 집을 나서면서 조금씩 나의 자존감과 자신감이 자라났을 것이다. 오늘의 단단하고 씩씩한 나를 만들어 준 건 애정 어린 음식들로 나의 허기를 채워준 사랑이었다. 누군가에게 내어보일만큼 굉장하고 멋진 사람은 아니더라도 마음이 건강하고 단단한 사람, 적어도 나는 그렇게 자라는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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