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오면, 저는 멈춥니다
비가 오면, 저는 멈춥니다.
동남아 여행을 계획할 때 사람들은 건기와 우기를 가장 먼저 확인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우기를 피해 여행일정을 짜겠지요.
저 역시 그랬습니다. 집 밖에 머무는 시간이 길었던 저에게 비는 늘 피해야 할 변수였고, 걸음을 붙잡는 성가신 존재였습니다.
비를 떠올리면 빗방울이 하나둘 떨어지기 시작하던 순간, 갓길의 풀잎에서 피어오르던 냄새가 먼저 생각납니다. 그 냄새를 좋아하면서도 정작 비가 오는 날이면 약속을 걱정하고 이동을 계산하느라 마음이 바빴습니다. 어른이 된다는 건 효율을 찾아가는 일이었을 테니까요.
이곳에서 비는 늘 예고 없이 내립니다. 비가 시작되면 택시는 쉽게 잡히지 않고 요금은 금세 올라갑니다. 예전 같으면 서둘러 짜증부터 냈을 테고요.
요즘의 저는 비를 만나면 잠시 멈춥니다. 처마 밑으로 걸음을 옮겨 비를 피하는 사람들 틈에 섭니다. 우비를 꺼내 입는 이들, 젖은 도로 위를 아무렇지 않게 지나가는 오토바이들. 누구 하나 얼굴을 찌푸리지 않습니다. 비는 이곳에서 특별한 일이 아니라 그저 배경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갑작스러운 소나기에 투덜거림이 가득하던 지하철역 입구가 문득 떠오를 때가 있습니다. 바쁘게 향하던 발걸음이 묶이면 짜증은 가장 쉬운 선택이었습니다.
하지만 이곳에서 저는 조금 다른 마음을 배웁니다.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
‘조금 쉬어가지 뭐’하는 태도.
비를 피해 달아나기보다 비가 그칠 때까지 그 자리에 머물러 보는 일.
이곳에서 제가 배운 것은 빨리 가는 법이 아니라 잠시 멈추는 태도였습니다.
비는 저를 멈추게 했고, 멈춤은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