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의 십자가, 모든 미련을 내려놓는 곳

산타 카탈리나 - 몰리나세카

by Jess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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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이 트기도 전에 길을 나섰다. 별 헤는 밤을 찍은 것도, 어젯밤 우연히 만나게 된 눈빛이 깊은 아버님도, 이따금 떠오르는 H의 생각도 운명 같은 일들이었다. 마을을 벗어나자마자 불빛이 완전히 사라진 그 길목은 작은 소리에도 화들짝 놀라게 되는 쪼그라든 가슴을 가지게 했지만 두려움을 없애는 데는 파울로 코엘료의 '산티아고'가 큰 역할을 했다. 순례자라는 책 속에서 그가 칠흑 같은 밤과 동물의 울음소리를 이겨내고 잠들 수 있었던 그 모든 용기를 생각했다. 조금씩 두려움이 사라지게 된 것은 마음속에 자리한 믿음과 곧 아침이 올 거라는 기대가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H가 말해준 '밤이 아침으로 변하는 기적'을 오롯이 느끼고 있었다. 신기하다 못해 가슴이 벅찬 순간이다. 매일 마주하는 풍경이지만 앞으로도 이 풍경은 질리지 않을 거라는 확신 아닌 확신이 들었다. 매일 이 아름다운 풍경을 볼 때마다 서로 다른 소중한 사람들의 얼굴이 눈 앞을 아른거렸다.


누군가 말했던 것처럼 해가 떠오르기 전이 제일 어둡고 칠흑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침이 올 거라는 기대는 한 치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어둠을 이겨낼 수 있도록 나에게 용기를 주었다. 아무도 없는 그렇다고 돌아갈 수도 없는 그 길 위에서 나는 '나'만이 스스로를 믿어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지도 몰랐다. 나는 나를 위해 노래를 불렀고 점차 두려움이 사라졌다. 내가 '여기'있음을 깨닫는 그 순간에야 비로소 나는 용감해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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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아침, 여러 감정들과 마주하고 난 뒤 나는 산속에서 길을 잃고 두려움과 한참을 싸웠다. 아무도 없는 산속에서 쉼 없이 들려오는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고양이의 앙칼진 울음소리는 나를 두려움에 떨게 만들었다. 어둠이 무서운 것이 아니라 길을 잃었을 때 우리는 더 두려워진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는 잠시 눈물을 훔쳤다. 길을 잃었을 때는 큰 도로를 따라가는 것이 길을 찾는 가장 쉬운 방법이다. 아마 인생이라는 여정에서 길을 잃었을 때에도 다시 큰 맥락인 본인의 가치와 철학을 먼저 찾아가는 것이 미아가 되지 않기 위한 방법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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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길을 따라 다시금 마을로 가는 방향을 찾았다. 겨우 만나게 된 '간소'라는 마을은 산타 카탈리나에서 5km 떨어진 마을. 이 작은 마을도 여전히 깊은 잠에 빠져있다. 마을을 지나는 동안 길은 오롯이 나를 위해 열려 있었다. 과거엔 많은 사람들로 북적이곤 했지만 지금은 몇 안 되는 사람들만이 지키고 있는 마을이라고 했다. 대문마다 붙어있는 가리비나 노란 화살표만이 길을 섬기는 마을 사람들의 마음을 대변하는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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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밤 함께 에스프레소를 마시며 인생에 대한 이야기를 깊게 나누었던 아저씨가 생각났다. 성함이라도 여쭤볼걸,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인연이라면 다시 만나게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여운이 오래 남는 인연은 어떻게든 다시 만나게 되는 법이니까 말이다. 눈빛이 너무도 인상 깊었던 아저씨, 아마 나는 앞으로 더 길고 긴 인생을 살아가면서도 그 아저씨와 닮은 혹은 그 비슷한 눈빛의 어른을 쉽게 만나진 못할 거라는 생각을 했다. 그분은 눈으로 많은 것들을 뿜어내는 분이셨으니까. 그것을 아마 '내공이 깊은 사람'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가장 적절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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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끝없이 이어지는 길, 오늘은 제일 높디높다는 철의 십자가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독일 친구 다니엘이 철의 십자가에 두고 오기 위해 독일에서 몇 개월 전에 돌을 주워 머리맡에 두어 모든 걱정을 담았다는 작은 돌멩이 이야기를 듣고는 나도 그 후로 길 위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돌 하나를 주워 길을 걷는 매일매일 함께 잠들었다. 원래는 자기가 지내던 곳에서 주워온 돌이나 물건에 걱정을 쏟아 놓고 철의 십자가에 두고 오는 전설이 있지만 나는 이를 알지 못한 채 길을 걷기 시작한 터라 산티아고 위에서야 비로소 걱정을 담는 돌 하나를 주워 함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리 오랜 시간을 함께 하진 않았지만 그 짧은 시간 동안에도 깊이 정이 든 모양인지 오늘 철의 십자가에 두고 올 걱정의 돌을 하루 종일 주머니에 넣고 만지작 거리며 길을 걷는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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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 걷는 길, 어느새 등 뒤에 자리한 해님 덕분에 그림자가 한층 길어졌다. 사진을 찍고 하늘을 올려다보며 길을 걷고 있는데 뒤에서 스페인 친구가 가볍게 인사를 건네며 간다. "너 정말 잘 걷는구나!" 잠시 나눈 인사에서 힘을 얻었다. 그래서일까 인사하는 걸 좋아하게 된 건 말이다. 사실 인사는 누군가에게 나의 힘을 나눠줄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어렵지 않은 일. 몇 번의 인사로 잔뜩 힘을 얻어 다시금 걸음을 내딛는다.



한참을 산속으로 시원하게 뻗은 도로를 따라 걸음을 옮기다 마을로 들어선다는 표지판을 만났다. 아침의 그림자는 정말이지 길고도 길다. 그 말인즉슨 해를 머리 위에 두고 걸음을 옮기는 시간이 더 길어졌다는 뜻이기도 하다. 철의 십자가까지 갈 길이 멀었고 나에겐 커피 한잔에 대한 생각이 간절했다. 적절한 타이밍에 마을이 등장한 것에 대해 무척이나 감사한 마음을 가지며 카페로 들어섰다.

화장실을 이용할 겸 멈춘 카페의 주인아저씨는 한국인이라고 하는 나에게 정말이지 친절하셨다. 한국의 정과는 조금 다르지만 무뚝뚝함 속에 숨겨진 은근한 친절이라고나 할까. 한국 사람들이 남겨둔 기록들을 나에게 보여주시며 한국에 대한 호감을 표하셨다. 한국인이라는 사실이 뿌듯해지는 몇몇 순간들이 있었다. 어쩌면 오늘도 그런 날 중 하나의 날일 것이다. 마법에 걸린 오늘은 스스로에게 조금 더 넉넉한 보상을 해주기로 하고 카페 콘 레체와 빵, 초콜릿 하나를 구매해 테라스에 앉았다. 아침이 오는 소리를 들으며 엽서에 자박자박 글씨를 써 내려갔다. 그리운 사람들 한 명, 한 명을 떠올리며 엽서를 쓰는 일은 여행을 하며 행하는 일 중 가장 의미 있는 일이자 깊이 있는 일 중 하나이다. 편지를 받아 들고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는 사람의 모습을 상상하는 일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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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을 그렇게 앉아 엽서를 써 내려갔다. 커피의 온도는 적당히 기분 좋았고 빵과 커피는 마음을 따뜻하게 덥혀주었다. 테이블 한편에 손님처럼 앉아 나의 풍경을 채워주는 배낭과 배낭 스틱을 내려다보며 괜히 든든한 마음이 들었다. 이제 이것들이 없으면 허전할 거라는 생각을 하며 햇살이 가득 쏟아진 마을 어귀를 바라보았다.

철의 십자가를 생각하며 주웠던 걱정과 고민의 돌멩이를 끊임없이 만지작거렸다. 이제 정말 안녕이라는 생각에 괜히 섭섭해져 아침부터 끊임없이 만지작 거렸더니 녀석에게는 여전히 온기가 남았다. 쉽게 마음을 주는 나의 성격은 이런 조그만 물건들에도 나타나곤 했다. 어쩌면 미련 덩어리 인지도 모를 돌멩이인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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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과 몸 모두에 충분한 휴식을 허락해준 주인아저씨께 고마웠다는 인사를 건네고 다시 길을 나섰다. 마을은 철의 십자가로 향하는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 끌만한 아기자기한 요소들이 곳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주인이 없는 간이 상점에는 양심껏 돈을 지불하고 물건을 가져갈 수 있도록 다양한 이름의 돌멩이를 진열해두었는데 철의 십자가가 가까워지고 있음을 느낄 수 있는 풍경이자 사람과 사람 사이의 '믿음'이 없다면 결코 볼 수 없는 장면이었다. 그냥 지나친다면 돌멩이에 불과하겠지만 누군가의 시선을 받은 이 돌들은 누군가의 손을 거쳐 알록달록 예쁜 옷을 입고 이름도 얻었다. '의미'를 부여받는다는 것은 얼마나 눈물 나도록 아름다운 일인지, 나는 자꾸만 주인이 누군지도 모를 돌멩이들을 보며 마음이 따뜻해졌다. 그래서일까, 마주치는 수많은 사람들 중 누군가를 만나 그 사람에게 의미를 부여하고 특별한 존재가 되어가는 '사랑'의 과정은 정말이지 아름답고 경이롭다고 밖에 표현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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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길은 조용했고 햇살은 정말이지 따뜻했다. 아니 따뜻함을 넘어선 뜨거움이었다. 웃통을 벗고 길을 걷는 사람도 있는 걸 보면 내가 느끼고 있는 뜨거움도 나만의 것이 아닌 모양이다. 이른 아침부터 길을 걸었더니 벌써 허기가 느껴졌지만 가야 할 길이 아직도 한참이나 남아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고 있기에 느리지만 걸음은 멈추지 않는 중이었다.



이런 내 마음을 미리 읽어낸 것인지 이런 첩첩산중에 마음 착한 누군가가 사과 몇 알, 오렌지 몇 알, 포도주스, 사과주스, 사탕 등을 가판대에 올려두고 무인으로 판매하는 곳을 발견했다. 나는 주머니 깊숙한 곳에 있는 1유로와 몇 센트의 동전들을 도네이션 통에 넣어두고 사과 한 알과 사과 주스 하나를 집어 들었다. 간절할 때마다 눈 앞에 등장하는 존재들은 나에게 작은 '기적'으로 다가왔다. 현실 속 내 삶에도 이런 자그마한 기적들이 종종 찾아왔으면 하고 기분 좋은 상상을 하며 사과를 한 입 베어 물었다. 산 중턱에서야 비로소 내가 걸어온 길을 돌아볼 여유가 생겼다. 아마 걸어온 길을 한 번쯤 돌아보라는 의미에서 그 누군가도 이 곳에 작은 가판대를 둔 것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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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세바돈이라는 마을을 지난다. 잠시 쉬었다 가는 게 어떨까 생각했지만 발은 이미 마을을 벗어나고 있었다. 조용한 마을 구석구석 자리하고 있는 알베르게와 카페 주인들은 힘들게 길을 걷고 있는 순례자를 조금은 안쓰러운 눈빛을 하고 때론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바라보곤 한다. 이미 그들에게 우리는 '일상'이 되어버렸다는 이유로 말이다. 마을을 벗어나자마자 다시 또 아름다운 봄의 풍경이 펼쳐진다. 힘든 마음을 위로하고자 노래를 흥얼거리며 걸었다. 가사를 잘 외우지 못하는 까닭에 그들은 때론 돌림 노래가 되기도, 허밍이 되기도 하지만 혼자 걷는 길 위에서 부르는 나만을 위한 노래는 어떤 방식으로든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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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을 걸은 끝에 카미노 후반에 있는 가장 높은 산인 이 곳에 닿았다. 드디어 만나게 된 철의 십자가, 많은 이들에게 알려진 만큼 철의 십자가 주변에는 많은 사람들이 휴식을 취하거나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자 각 나라의 언어가 적힌 돌멩이와 크고 작은 기념품들이 놓여 있었는데 그들은 저마다의 스토리를 가지고 철의 십자가를 지지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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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련이 왜 그리도 많았던 걸까, 사람들은 쉬이 이 곳을 떠나지 못했다. 그건 물론 나에게도 해당되는 말이었지만 말이다. 누군가는 이 곳에 손수건을, 자기 나라 화폐를, 사랑하는 사람의 사진을, 보내지 못한 편지를 남겨두고 갔다. 익숙한 글씨가 보여 다가갔더니 앞서 이 길을 걸은 다른 한국인의 소망과 다짐이 담긴 돌 하나가 시간을 고이 받아내고 있었다. 나는 하루 종일 만지작 거리며 걸었던 돌멩이에 지난 시간과 용서하지 못하고 내려놓지 못한 욕심들을 담아 철의 십자가 한편에 내려두었다.


나를 사랑하지도 못하면서 누군가를 진정성 없이 만나고 또 보내며 상처 준 일,

철없이 하고 싶은 일만 하며 엄마의 눈에서 눈물을 흘리게 만든 일,

내가 가진 것들에 감사하지 않고 다른 사람과 나를 비교하며 내 처지를 비관했던 일,

어쭙잖은 사람들로 인해 상처 받아 마음을 닫고 색안경을 끼고 세상을 봐왔던 일,

나 자신을 아끼고 사랑하지 않고 그저 방관하며 타인이 나를 상처 주도록 내버려 두었던 일,


그 모든 후회들을 이 곳에 버렸다. 오늘 이 자리에 걱정과 후회를 버렸다고 해서 지난 감정들이 없어지진 않겠지만 더 이상 그 상처와 기억들로 아파하며 상처를 꽁꽁 싸매고 살기보다는 지난 일들은 여기에 묻어두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앞으로 남은 시간들을 살아가겠다는 의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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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의 십자가를 넘어서자 마음의 부담이 덜어져서인지 발걸음이 한결 가벼워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저 멀리 산등성이에 여전히 쌓여있는 눈은 차가운 공기를 뱉어냈지만 그마저도 시원하게 느껴졌던 건 미련을 홀가분하게 털어내서였을 것이다. 초록이 무성해져 가는 스페인의 심장을 걷는다. 오래도록 그리워질 풍경을 곁에 두고서 말이다.


지금 당장 풀리지 않는 일, 사랑할 수 없는 사람, 할 수 없는 일들에 연연하면서 아파하고 힘들어하지만 그런 순간들도 결국 훗날엔 아름다운 추억이 되고 더 단단해질 수 있는 계기가 되는 것일 텐데 나는 이렇게나 멀리 떠나와서야 가장 기본적인 삶의 의미를 깨닫고 만다. 멀리서 보면 작은 티끌은 보이지 않는다. 아마 내 인생의 작은 순간들도 그럴 것이겠지. 지금 당장 부끄럽고 자신이 없어서 도전하지 못한 일들, 내일이면 기억나다 말 그런 일들을 마주 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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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리막에 자리하고 있는 허름한 카페는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여러 나라의 국기가 바람에 흩날리고 있었는데 그 사이에 익숙한 대한민국의 국기가 눈에 띄었다. 타국에서 만나게 되는 대한민국의 흔적은 언제나 반가운 법.

내 앞을 터벅터벅 걷고 계셨던 아저씨도 나와 같은 마음이셨는지 카페 앞을 한참 동안이나 떠나지 못하고 펄럭이는 국기를 바라보고 계셨다. 아마 아저씨도 고국에 있는 가족과 사랑하는 사람들의 생각에 잠시 잠겨있으셨던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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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들게 산을 내려가자 세련된 알베르게가 보였다. 뜨거운 햇살을 피해 늘어지게 낮잠을 자고 있는 개를 보며 나는 얼마나 많이 부러워했던가. 흥겨운 기타 소리가 들려 얼핏 고개를 돌리니 사아 군에서 만났던 브라질 소년 베드로가 여자아이들 사이에서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불러주고 있었다. 제 버릇 어디 안 간다더니, 나는 살짝 흘겨봐주고 내 길을 걸었다. 마을을 만났으니 화장실에 갈 요량으로 펍에 들어서서 클라라 콘 리몬을 들이키며 잠시 숨을 고를 여유를 가진다.


마을은 휴가를 즐기는 사람과 그들을 찾아온 친구와 친척들로 조금은 북적거리는 모습이었다. 여전히 갈 길이 많이 남았다. 나는 흥겨움이 가득한 마을을 지나 다시 길을 걸었다. 물집이 잡힌 발로 걸을 때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은 내리막을 걸을 때인데 눈이 녹으며 질척거리는 진흙길을 미끄러지지 않고 내려가려면 온 몸의 근육에 긴장을 풀지 않아야만 한다. 몇 번의 고비와 멈춤 끝에 다음 마을에 드디어 도착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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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만난 마을은 몰리나세카, 관광객과 순례자들이 어우러져 북적거리는 모습이다. 중세풍 다리를 건너야 닿을 수 있는 마을은 강가를 따라 크고 작은 집들과 노천카페가 분위기 있게 줄지어 있다. 힘든 몸을 이끌고 가던 중 우연히 발견한 7유로의 방에 대한 팸플릿, 나는 그 매력적인 조건에 이끌려 팸플릿이 붙어있던 호텔로 들어섰다. 호텔 매니저로 보이는 사람이 익숙하게 장부를 꺼내고 내 순례자 여권에 도장을 찍어 주었는데 돈을 지불하고 간 곳은 호텔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일반 가정집이었다. 그곳에는 내 몸채만 한 개가 두 마리나 있었고 야생 닭들이 열 마리쯤 마당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알베르게를 보고서 환불하고 싶다는 이야기가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이미 돈을 내고 한참을 걸어온 터라 용기 있게 말을 꺼내지 못했다. 자기 합리화가 특기인 나는 그래도 조용히 시간을 보낼 수 있음에 감사하며 30여 킬로미터를 묵묵히 걸어준 나를 위로했다. 와이파이가 필요하면 호텔 리셉션으로 찾아오라는 매니저 아저씨, 호텔의 분위기라도 느껴보고 싶다는 마음에 호텔을 방문했는데 매니저 아저씨는 빵과 커피를 내주셨다. 혼자 속았다고 생각하며 아저씨를 미워했는데 다시 '그라시아스'를 외치게 되는 순간이다.



잔뜩 지친 물 먹은 솜 같은 몸은 '절대적인 휴식'을 원했다. 빵 한 덩이와 맥주 한 캔, 과자 한 봉지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한 저녁이었다. 나 홀로 전세를 낸듯한 테라스의 테이블에 앉아 동물들이 마당을 자유롭게 누비는 모습을 바라보는 일은 여행자의 모습과도 닮아있었다. 그 광경을 바라보며 지나온 길의 흔적과 앞으로 걸어야 할 길을 눈으로 쫓았다. 문득 한국으로 돌아가 아빠와의 상황을 어떻게 풀어 나가야 할 지에 대한 고민을 하다 보니 앞이 까마득했다. 아빠의 손을 잡고 이야기를 꺼낸다는 상상만으로 내 머릿속은 하얘지고 온 몸은 굳어지고 만다. 길의 끝이 보일 때까지 자주 또 오래 어려운 생각들을 꺼내는 연습들을 해야 할 모양이다. 그렇게 일기를 쓰다 보니 하루가 조금씩 저물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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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6일


겉모습만 보고 무언가를 판단해 본 적이 잦았다. 그것이 사람이든 물건이든 혹은 장소이든 간에. 여전히 나는 그런 것들을 구별하는 방법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사람. 행여 무언가를 선택했다면 후회를 하지 않고 받아들이기 위해 더 많은 노력을 해야 하는데 나는 혹시 불평과 불편을 쏟아내며 아까운 시간들을 허투루 보내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혼자 길을 걸으면 스스로를 더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게 된다. 그것이 설령 보고 싶지 않은 모습이라도 그 날 것의 부끄러움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스스로가 지나온 길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어지는 것이다. 그 생각들을 바라보며 걷다 보면 결국은 그것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되는 순간이 오는데 이를 겪어내고서야 비로소 한 단계 성숙할 수 있는 사람이 된다. 나는 나의 부끄러운 모습들을 매일 하나씩 마주하며 길을 걷는다. 사람들에게 나를 포장하느라 급급했던 시간들이 지나고 이제야 비로소 나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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