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모든 기회에 감사하는 법

곤자르 - 멜리데 : '한계'는 '감사한 삶'을 위한 선물이더라구요

by Jess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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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아침부터 사람들이 부스럭 거리는 소리에 덩달아 눈을 떴다. 밖으로 나와 주섬주섬 짐을 챙기는데 이탈리아 엉클인 그라시아 아저씨가 반갑게 안아주시며 모닝 키스를 양쪽 볼에 나눠주셨다. 몇 일 전, 페레헤 숙소에서 아저씨를 만나 내가 반가움에 눈물을 터뜨린 후로 아저씨와 나는 눈에 보이지 않는 깊은 동료애가 생겼다. 우리는 함께 커피를 마시기로 하고 알베르게의 카페에 앉아 아침을 맞이했다. 짐을 주섬주섬 챙겨 내려오는 후니에게도 '유어 브라더'를 챙겨 오라며 살뜰히 다른 순례자들을 챙기시는 아저씨의 모습에 따스함이 가득 묻어났다.


커피를 마시며 나의 지금을 따스함으로 채워주신 아저씨와 추억의 사진을 한 컷 남겼다. 아저씨는 오래 기억하고 싶은 인연이 생기면 언제나 그들과 사진을 남긴다고 하셨는데 순례길이 끝나고서도 아저씨는 이따금 나와 함께 찍었던 사진들을 앨범에 예쁘게 담아 나에게 메시지를 보내곤 하셨다. 이탈리아의 은퇴한 군인인 아저씨에게 벌써 두번째인 이 길은 어떤 의미일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처음의 그것과는 조금 다른 모습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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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리시아 지방에 가까워지면서 안개가 자욱한 길을 걷는 아침이 조금 더 많아졌다. 사실 갈리시아 지방의 안개도 안개이지만 오락가락하는 날씨가 걸음을 조금 더 더디게 만들기도 했다. 판초우의를 꺼내기도 애매하고 가방에 넣어두기도 애매한 날씨가 계속 되었고 옷이 축축하게 다 젖을 무렵에서야 잠시 멈춰 판초우의를 꺼내 입을 수 있었다. 안개가 자욱한 길은 꽤나 몽환적인 분위기를 띄고 있었고 길의 끝이 우리를 어디로 인도하는지조차 알 수 없도록 하는 묘한 감정에 빠져들게 만들었다. 앞이 전혀 보이지 않는 미래도 어쩌면 이 안개가 자욱한 길과 닮아있는 것만 같다. 지금 이 길 위의 내 목적지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이지만 여전히 내 삶의 목적지는 안개 속에 휩쌓여 있다는 생각이 자꾸만 내 발목을 붙잡고 발걸음을 더디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길을 걷게 하는 건 안개가 자욱한 이 길이 언젠가는 끝날거라는 기대감과 함께 길 끝에 있을 '무언가'에 대한 설레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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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까지 75km,


오늘도 산티아고까지의 거리를 알리는 비석 위에는 어제와 오늘동안 길을 걸었던 사람들의 마음이 남았다. 안개와 함께 흩뿌리는 비가 내린 후 비 비린내가 공기를 가득 메웠다. 비가 내리기 시작할 때의 비 비린내를 썩 좋아하지 않지만 오랜 시간동안 깊이 물방울을 머금은 풀잎 사이로 풍기는 이슬 냄새는 그 무엇보다 좋아한다. 물방울을 가득 머금은 초록의 향기를 풍기기 위해서는 그 비 비린내의 시간을, 서로가 부딪히며 만들어낸 '처음의 냄새'를 겪어내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을 것을.


지면에 닿아 온전히 땅속으로 스며들기까지 그들도 서로를 알아가는 시간이 필요한 것처럼 그 어떤 처음도 익숙하지 않기에 힘든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결국 모든 것들은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다. 한참을 길을 걷자 그제서야 코 끝이 냄새에 적응하기 시작했다. 코 끝에 익숙해진 푸른 이슬 냄새, 사실 이 것은 내가 아침 일찍 걸음을 걷게 된 두번째 이유이다. 동이 트는 새벽을 홀로 걸으며 '아름다운 외로움'을 온 몸으로 느끼는 것 그리고 코 끝에 가득 채워진 푸른 이슬 냄새. 행복의 기준은 크고 화려한 것들이 아니라 자연이 건내주는 작은 부분임을 나는 매일 길을 걸으며 온 몸으로 느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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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미노 위의 마을들을 지나며 깨달은 것 중 하나는 마을과 가까운 곳에 공동묘지와 납골당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 그래서 였을까? 사람들은 삶과 죽음이 동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어디에나 공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항상 마음에 품고 사는 것만 같다. 우리네 삶에서처럼 '죽음'이라는 것은 무섭고 두려운 삶의 이면이 아니라 삶과 같은 선상 위에 나란히 놓여 있으며 '삶의 유한함'을 마음에 새기고 살아야 한다는 것을 그들을 보며 깨닫는다.


우리는 모두 언젠가는 '그 곳'을 향해 가겠지만 '끝'을 마음에 품고 산다면 오늘을, 지금 내가 행복한 일을, 나와 함께 하고 있는 사람들을 그리고 나에게 주어진 일들을 하며 적어도 후회는 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만약 내일 죽는다면, 이라는 가정을 하며 주어진 하루하루 더 열심히 살아가려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삶의 모습이 다를 것이라는 것은 너무나도 자명한 사실이 아닐 수 없다.


매일 크고 작은 것들을 산티아고의 풍경 속에서 배워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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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많은 비가 쏟아지는 바람에 비를 피할겸 숲 속의 카페에 배낭을 내려 놓았다. 외관만큼이나 내부도 멋진 카페는 갑자기 쏟아지는 비를 피하기 위해 마을 사람들과 순례자들이 골고루 섞여 삶이 곧 여행이라는 의미를 띄고 있는 것만 같았다. 누군가는 일기를 쓰고 또 다른 누군가는 창 밖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대화가 사람 사이의 공백을 채우지 않아도 이따금 타닥타닥 타들어가는 장작 소리와 주인장이 커피를 내리는 소리가 그 공백을 빈틈없이 메꿔주었다. 나는 그 공백을 틈타 아침의 생각들을 일기장 한 켠에 써내려 간다. 깨달음과 그 깨달음을 차곡차곡 담아가는 시간들이 감사하기만 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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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를 마시고 한참동안 글을 쓰다보니 어느새 비가 그치고 하늘이 거짓말처럼 맑아졌다. 갈리시아 지방의 변덕스러운 날씨는 이미 스페인 사람들 사이에서도 정통이 나있는 모양이다. 안개가 많이 끼고 비가 자주 오락가락하는 편이라 이 지역의 건물들은 지면에서 조금 떨어져 축조되어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햇살을 맞이하기 위해 활짝 열어둔 창문과 창틀에 널려 바람에 이따금 살랑거리는 옷가지들에는 사람 사는 냄새가 묻어있었다. 그 따스한 냄새를 따라 가다보면 빨래가 말라가는 소리, 돌담에서 햇살이 잠시 쉬었다가는 소리가 이따금 들렸다. 괜스리 좋아진 기분에 콧노래가 저절로 흘러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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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 순례자들이 비가 내려 부쩍 미끄러워진 산길을 따라 주르륵 흘러 내려갔다. 어찌나 빠르게 사라지는지 그들의 모습은 눈을 몇 번 깜빡이자 이미 사라진지 오래다. 그들이 점이 되어 사라져 가는 모습을 보며 시간이 흘러가는 모습을 지켜본 것만 같았다. '이제 정말 몇일 남지 않았구나..' 사실 정말 아쉽고 슬픈 것은 내가 알지도 못하는 순간동안 그 긴 길을 모두 걸어 버렸다는 것, 현실로 돌아가면 '앞으로 해 나갈 일'들을 정해야 하는 것 그리고 속 깊은 길동무였던 H와도 헤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익숙해져버린 무언가와 이별을 고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많이 힘든 일이다. 그 것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말이다. 알 수 없는 감정의 의미가 무엇인지 나는 이 아이를 다시 만난 지금도 여전히 알 수가 없다.




마을엔 지친 순례자들이 잠시 쉬어갈 수 있도록 벤치가 곳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따금 배고픈 순례자를 위한 커다란 봉지 속 바게트까지도. 순례자들을 도우며 그들은 아름다운 순례길의 일부가 되었다. 평생 누군가를 도우며 사는 삶의 성스러움을 배운다. 한국으로 돌아가면 다시 예전처럼 지치고 힘든 누군가의 손발이 되어주는 일들을 하며 살아가는 모습을 상상해 본다.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기분 좋아지는 일들을 하는 것이 곧 내가 행복해지는 일임을 이제는 너무나 잘 알기에 나는 그렇게 살아가겠다는 다짐도 매일의 걸음에 담으며 길을 걷는다. 결국 세상은 작은 것들이 그리고 그 작은 꾸준함이 바꿔가는 것이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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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 이탈리아 엉클이 말씀하셨던 유명한 볼보(문어요리)를 먹기 위해 멜리데에서 여정을 마무리 하기로 했다. 카미노에서 가장 유명한 음식 중 하나가 바로 이 볼보라는 이야기를 듣고서 오늘은 순례자의 옷을 잠시 벗어두고 여행지의 일상을 잠시나마 즐기는 여행자로 역할을 잠시 바꿔보는 조금은 색다른 경험을 하는 것이다. '뽈뽀'라고 잘못 발음하면 성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기에 발음을 하는데 유의해야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후라 조금은 부담스럽긴 했지만 일단 그 유명한 음식을 꼭 먹어보겠다는 의지가 컸다. 문제는 멜리데에 가까워지가 레스토랑 간판 곳곳에서 '볼보'라는 단어가 등장하기 시작했고 호객행위도 활발해졌다는 것. 하지만 우리는 꿋꿋하게 가장 유명하다고 알려진 레스토랑으로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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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리데까지 1.2km

길을 걸으며 H는 자꾸만 네잎 클로버를 찾아내곤 했는데 오늘은 조금 더 운이 좋은 내가 두 개의 네잎클로버를 찾아냈다. 반가운 마음에 냉큼 꺾어 책 사이에 그들을 끼워 두었다. 사실 이 모든 것들은 사람들이 만들어 낸 미신이라는 것을 알지만 때론 그런 믿음에 기대어 작은 소원을 빌어보고 싶은 마음이다. 그 간절한 마음이 또 다른 '행운'을 불러올 지도 모를 일이니 말이다. 마음은 힘이 세다. 정말 오래도록 온 마음을 다해 간절히 바라고 또 바라다보면 나는 그 '꿈'이 이뤄진다고 믿어왔고 그 덕분에 이 길을 걷고 있기도 하다. 내가 해내고 있는 일, 그 일들로 인해 내가 또 다른 멋진 꿈들을 또 다시 꾸고 이뤄갈 수 있기를 두 손에 놓인 네잎클로버에 가득 담아 책 한켠에 고이 넣어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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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심히 걸음을 옮기던 중 집 안에 있는 누군가를 간절히 기다리는 고양이를 만났다. 아무리 불러도 기척조차 없는 고양이는 우리가 점이 되어 사라질 때까지 오랫동안 한 자리에 앉아 현관을 응시하고 있었다. '이별에 대한 예의'라는 표현이 생각나는 순간이었다. 한 사람에 대한 깊고 깊던 마음을 모두 정리할 때까지 섣불리 다른 누군가를 만나지 않는 것, 그 사람이 내 마음에서 떠나갈 때까지 충분히 둘만의 추억을 음미하고 또 추억하며 마침내 그 사람의 행복을 빌어줄 수 있을 때야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는 그 것은 마음 가득 내어주었던 마음 한 켠에 대한 배려이자 이별에 대한 예우였다. 새로운 누군가를 쉽게 만날 수 없다면 그 것은 충분한 시간을 가지지 못한 것이며 새로운 누군가를 들일 마음의 방이 채 비워지지 않은 상태일 것이다. 누군가를 오래 바라보며 기다리는 고양이와 같은 우직함으로 '이별에 대한 예의'를 갖춰야 하는 시간이 누구에게나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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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리데의 분위기 좋은 알베르게에 짐을 풀었다. 신발을 벗자 오래도록 찌든 땀 냄새가 풍겼지만 그 조차도 이미 순례자의 익숙한 일상이 되었다. 간단히 샤워를 하고 빨래를 했다. 해가 떠있는동안 보송보송하게 하루동안 땀에 절어버린 양말과 옷을 빨아 너는 일은 가장 기분 좋은 일이다.


책과 노트를 들고 거리로 나섰다. 이 곳까지 왔으니 와인과 볼보를 먹어야지? 하며 멜리데의 가장 유명한 레스토랑을 찾아 길을 나섰다. 레스토랑 앞은 이미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있기도, 냄새가 멀리까지 풍기기도 해 어려움 없이 찾을 수 있었다. 기다림 끝에 마주한 볼보 한 접시와 와인 한 병 그리고 빵까지 남김없이 모두 먹어치운 우리는 만족감을 가득 배에 채우고 마을의 작은 골목에 자리한 카페에서 언제까지고 그리워질 풍경들을 조금 더 즐기기로 했다. 카페에 앉아 다시 와인과 맥주 한잔씩을 주문한 우리는 테이블에 앉아 몇 일 남지 않은 이 길의 일정을 함께 하기로 했다.


"나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에 산티아고 대성당을 오롯이 느껴보고 싶어. 그러려면 내일 50km를 걸어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바로 전의 마을까지 가볼까 해"


"누나, 그럼 내일이 마지막이니까 우리 함께 가자. 그리고 50km를 걸으려면 체력적으로도 힘드니까 배낭 하나를 택시로 보내버리고 나머지 배낭 하나에 우리 짐을 조금씩 담아서 메고 가는 건 어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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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그 어떤 책에서 '음식은 위로'라는 글귀를 읽고선 잠시 심장이 뛴 적이 있다. 그렇다면 나는 살면서 얼마나 많은 위로를 받아온 것일까. 지갑을 잃어버리고 울고 있던 내 앞에 내가 좋아하는 빵들을 고루 담아 봉지 가득 안고 웃고 있던 옛 연인, 먼길와서 힘들었지? 하며 굽은 허리를 하고 추운 부엌에서 계란 프라이를 해주시던 외할머니, 비행기를 타고 돌아오면 항상이지 따뜻한 쇠고기 무국을 끓여내주는 엄마까지.


많은 사람들이 내게 건냈던 "밥 먹었어?"라는 한 마디는 어쩌면 '힘내'라는 말을 에둘러 표현한 것이라는 생각이 이제서야 든다. 아마 그들은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에서 마주하는 외로움과 지친 마음을 위로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따뜻한 끼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언젠가는 힘들어하는 이에게 나 역시도 따뜻한 밥 한끼의 위로를 건내며 함께 공간의 공백을 따스함으로 메꿔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


매일, 나는 되고싶은 사람의 모습을 꿈꾸며 길을 걸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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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21일


나는 언제나 한계(Limit)이 존재하는 사람이었다.

경제적으로든, 환경이든, 능력이든, 외모든 말이다.


오늘에서야 비로소 깨달은 것은 나는 한계가 있는 사람이었기에 나에게 주어진 모든 기회가 간절하고 또 절실했다는 사실. 나는 어쩌면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나의 한계치로는 할 수 있는 일들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을 말이다. 그렇기에 나에게 주어진 기회는 한계치를 뛰어넘을 수 있는 유일한 발돋움판이었고 나는 감사하지 않는 삶을 살 수가 없었다.


나는 모든 상황들에 '감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감사를 통해 느끼는 모든 감정들에 대해 감사했다.


심장 한 구석이 찡 하고 울렸다.

이 순간의 감정을 오래도록, 간직하고 싶어 나는 자주 멈춰 일기장에 묵혀 있던 감정들을 써내려간다. 이 길 위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매일 일기를 쓰며 나를 돌아보게 된 습관과 마음 가득 차오르는 감사한 마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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