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보폭을 맞춘다는 것

사리아 - 곤자르

by Jess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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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이 터오는 사리아의 새벽을 깨우며 조심스레 길을 나섰다. 오늘은 아주 오랜만에 H와 함께 길을 나섰는데 내 앞엔 호주에서 온 브렛과 대만 출신의 팽이 함께 걸음을 맞춰 길을 걷고 있었다. 호주에서 부부로 인연을 맺고 마침내 함께 꿈꾸던 산티아고로의 긴 여정을 떠나 왔다는 커플. 서로 다른 국적, 문화, 관심사까지 같은 환경에서 자라오지 않았기에 더욱 맞춰 가야하는 부분이 많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서로를 알아가는 하루하루가 더 소중하고 즐겁다는 그들의 이야기에 긍정적인 기운을 얻었다. 사랑에 있어 정말 중요한 것은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함께 그 시간들을 견뎌낼 수 있는 마음과 서로를 토닥여주며 오래도록 걸을 수 있는 마음이 아닐까. 그들의 뒷모습은 연애를 처음 시작한 뜨내기 커플처럼 파릇파릇했다. 우리는 비오는 사리아를 뒤로 한 채, 그렇게 꽤 오랜 시간을 서로의 보폭에 맞추며 이야기를 나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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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아를 벗어나자 조금씩 날이 개이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H와 나의 발자국 소리가 우리가 걷는 풍경을 가득 메웠다. 함께 걷지 않았던 시간동안의 그 어떤 마음들을 우린 서로에게 꺼내놓지 않았지만 이미 어제의 포옹으로 많은 이야기를 나눈 것인지도 몰랐다. 연애를 한번도 하지 않았다는 H는 하느님이 이미 운명의 상대를 정해두었는데 누군가를 만나며 에너지를 낭비하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입장이었지만, 좋은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는 서로 다른 사람과 연애를 해보는 게 좋다는 나와 대화를 나누면서 조금씩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달라져 가는 듯 했다. 나는 말했다.


"난 그렇게 생각해. 지금의 나는 과거에 내가 만났던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 모습이라고 말이야. 연애도 그런 것 같아. 내가 가진 환경 속에서 오롯이 만들어졌던 내가 누군가를 만나며 그 사람의 좋은 습관과 취향을 닮아가고 그 것이 나의 모습에 더해져 조금 더 괜찮은 사람이 되어가는 과정이라고 말이야. 물론 상대가 좋은 습관과 성숙한 사고를 가지고 있는 사람인지는 첫 만남에 알 수 없지만 몇 번의 사랑이 지나고 크고 작은 다툼을 거치면서 자연스레 괜찮은 사람을 알아보는 안목도, 상대에 좀 더 유연해지는 내 스스로의 모습도 만나게 되겠지. 물론 좋은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는 내 스스로가 더 좋은 사람이 되어야할테고. 나를 사랑할 수 있게 된다면 자연스레 누군가를 더욱 성숙된 자세로 사랑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지난 사랑 이야기를 덤덤히 꺼내 놓는다.


"사랑이 무서워 피하기만 한다면 평생 사랑할 수 없을지도 몰라. 이별이 두려워 시작을 미룬다면 영원히 외로움과 가까이 지내야할지도 모르지. 나 역시도 처음 누군가를 좋아했을 땐 사랑이 그런 것인지 잘 몰랐어.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고 사랑이 찾아왔을 땐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도 몰랐지. 난 너무 많은 마음을 보여줬던 거야. 숨길 줄 몰랐지, 누군가가 감출 수 없는 세가지가 가난, 기침 그리고 사랑이라고 말한 것처럼 말이야. 하지만 모든 걸 다 내려놓고 온 몸으로 느꼈던 사랑이었어. 헤어지자는 가벼운 말 한마디에 나는 왜, 라고 몇 번이나 물으며 울었었지. 2년이란 시간을 마음에 품고 쉽게 놓아주질 못했어.


그런데 있잖아, 그 아팠던 기억은 마음에 굳은 살을 만들어준 것 같아. 다음 사랑이 왔을 땐 그리고 이별을 맞이했을 땐 처음 순간만큼 미친듯이 아프지도 않았고 세상에서 사라지고 싶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지. 내가 성숙해졌던 건지, 처음의 이별이 나를 단단하게 만들어준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난 살면서 한번은 나를 모두 버릴만큼 누군가를 사랑해봐야 한다고 생각해. 그렇게 누군가를 사랑해 본 사람만이 또 다른 사랑도 두 팔 벌려 해낼 수 있고 이별도 건강하게 해나갈 수 있다고 믿어. 물론 나 역시도 그런 과정들을 몇 번이고 앞으로도 겪어 나가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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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하며 걷다보니 어느 새 산티아고까지 100km가 남았다. 이 상징적인 비서 위엔 많은 사람들의 메세지와 마음이 가득 담겨 있었다. 누군가가 놓아두고 간 작은 꽃송이와 비석들은 이 길 위에 뿌려진 무수한 축복들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800km 표지판 앞에서 저 숫자가 언제쯤 줄어드는 것일까 라는 생각을 한 지가 엊그제 같았는데 100km도 채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 나는 너무나도 알 수 없는 감정에 휩쌓이고 말았다. 흘러가는 시간이 야속하고 아쉽기도, 다른 한편으로는 하루 빨리 순례길을 완주하고 예쁜 옷을 입고 근사한 식사를 하고 싶었지만 대부분의 감정은 아직 내가 원하는 만큼의 깨달음에 닿지 못했다는 조급함이었다. 무언가를 깨달아 가겠다는 혹은 변화된 사람이 되겠다는 강박관념을 가지지 말자고 몇 번이나 스스로에게 부탁했지만 너무나도 간사한 사람의 마음은 자꾸만 중요한 것들을 잊어버리게 만들었다. 이런 때일 수록 스스로에게 더 자주 이야기를 건내야 했다. 나는 눈을 감고 비석에 두 손을 얹은 뒤 스스로에게 말을 건냈다.


"고마워, 지금까지 너무나 잘 걸어와주어서.

지금의 마음과 끈기 그리고 스스로를 이겨내고자 하는 마음 모두 잊지 말고 너를 아껴주는 모든 사람들을 깊이깊이 생각하며 네 앞에 놓여진 인생의 길도 꿋꿋하게 걸어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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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H의 이야기를 들으며 오래오래 길을 걸었다. 몇 년 전, 홀로 이 길을 걸으셨다는 H의 아버님은 순례길이 그리 알려지지 않았던 시기에 홀로 산티아고를 완주하셨다고 한다. 그리고서는 H가 홀로 이 길을 걸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비행기 티켓을 선물로 주셨단다.



"너는 정말 멋진 부모님이 계시구나. 특히나 이 먼 곳에서 언어도 음식도 홀로 해결하시는 게 쉽진 않으셨을텐데 대단하시다는 생각이 든다. 더군다나 그 멋진 깨달음을 너와 함께 나누시기 위해 비행기 티켓까지 선물로 주실 정도라면 말이지. 너도 미래에 좋은 아버지가 되어 있을거야, 너희 아버지처럼 말이야"



"누나,

나는 누나가 아버지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 해주기 전까지 그렇게까지 생각해 본 적은 없었던 것 같아. 누나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아버지가 얼마나 대단하신 분인지 깨달았어. 사실 아버지는 이 길을 걸으시고서 많이 바뀌셨거든. 승진 시험 공부를 비롯해 다른 분야의 공부를 시작하시고 책을 읽는 것도 꾸준히 하고 계셔 지금까지도 말이야. 그런 아버지를 보며 나도 모르게 많이 배워왔던 것 같아. 나도 커서 아버지 같은 모습이 되고 싶다.


새삼 아버지가 존경스럽다. 이 길을 혼자서 걸으셨다는 것이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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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한동안 각자의 생각에 빠져 길을 걸었다. 돌담 너머로 푸르게 펼쳐진 밀밭을 배경 삼아 걸음을 옮기는 순례자도, 날씨도 무척이나 아름다워 보였다. 나는 그들을 배경삼아 "행복하다~"라고 말을 던졌다. 뜬금없는 행동과 엉뚱함으로 똘똘 뭉친 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영감과 에너지를 주는 씩씩한 나도, 감수성이 풍부한 내 자신이 좋았다.


앞으로의 인생도 지금의 길처럼 즐겁고 재미있게 살 수는 없을까? 어떻게 하면 그렇게 인생을 살 수 있을까, 나는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그리고 이른 결론은 '오늘' 그리고 '지금 내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 최선을 다하며 그리고 삶의 목표를 잊지 않고 지내는 것. 지금 내 삶의 목표가 무엇인지 아직 나는 알 수 없었지만 조금씩 머릿 속으로 희미하게 그림을 그려나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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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을 길을 걷다 파란 하늘과 무척이나 어울리는 집을 발견했다. 알고보니 최근에 만들어진 알베르게란다. 햇살이 잔잔하게 들어오는 알베르게에서 기분 좋은 낮잠을 자는 상상만으로 금새 따뜻한 기분이 들었다. 나에게 가장 기분 좋은 낮잠은 언제였나를 떠올려보니 증조할머니의 따뜻한 온돌방에 누워 있다 잠든 열 두살 때의 기억이다. 기분 좋은 추억은 거미줄처럼 또 다른 기분 좋은 추억을 꺼내 엮어내고 또 다시 엮어내고를 반복했다.


증조할머니의 곰방대에서 구름처럼 피어오르던 담배 연기를 보며 신기해 하던 어린 시절, 할머니가 나에게 주시려고 낱장의 신문지에 꼬깃꼬깃 싸셨던 다이아몬드 모양의 설탕이 듬뿍 발린 박하사탕 그리고 몇 번을 꺼내보아도 처음 본 듯 했던 할머니의 젊은 시절 사진과 처음으로 태어난 증손녀인 내 까까머리 사진까지. 꺼내보는 것만으로 행복해지는 추억들이 있었다. 기분 좋은 추억을 더 자주 떠올리며 스스로에게 행복해지는 주문을 걸어보는 것, 크고 거창하지 않지만 하루를 더 행복하게 보내기 위한 주문 하나 즈음 가지고 있는 것은 더 풍부하게 살기 위한 방법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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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소 100km를 걸어야 비로소 산티아고 대 성당 뒷편에 위치한 순례자 사무실에서 순례 증서를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사리아에서부터는 여러 무리의 순례자들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학교에서 단체로 길을 걷기 위해 먼 길을 찾아온 학생들을 비롯해 아주머니, 아저씨 단체도 보이기 시작했고 길은 더욱 다양한 이야기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낯익은 얼굴들을 만나긴 어려워졌지만 대신 더욱 특별한 광경들을 마주하게 되었는데 특히나 오늘은 자유분방하게 도로를 누비는 소떼와 그 소떼를 이끄는 개가 그러했다. 사납게 컹컹 거리는 목소리로 목줄 하나 없이 덩치 큰 짐승을 이끌고 가는 모습은 시골에서 살아온 나조차도 본 적이 없을 만큼 무척이나 생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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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이 아름다웠다. 푸른 하늘을 향해 재잘거리며 걸어가는 아이들의 모습이 지났다. 삼삼오오 짝을 지어 걷는 아이들 사이에서도 소녀와 소년은 좋아하는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끝내 손을 잡고 때론 어깨동무를 하며 무리에서 조금 뒤쳐져 걷고 있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감정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아직 알지 못하는 아이들이지만 그들이 지금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떨림을 오래도록 기억하며 서로를 아껴주길 조심스레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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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대화가 없는 순간이지만 그 공백이 어색하지 않았다. 나는 공백을 틈타 훈이와 나눴던 이야기들을 혼자 곱씹기 시작했다. 멋진 삶을 살아오신 H의 아버지를 생각하다가 나 역시도 아빠의 모습을 떠올렸다. 감성적인 덕분에 글을 쓰고 사진 찍는 일을 즐기던 아빠. 첫 딸인 나를 위해 몇 십통의 필름을 인화해 앨범을 만들어 사진마다 이야기를 가득 담아 주셨던 일, 꼼꼼하고 손재주가 많아 크고 작은 장식품들을 뚝딱뚝딱 만들어내고, 모든 일에 앞서 종이 가득 준비물과 필요한 것들을 메모해 미리 준비를 하시던, 그 어떤 아빠들보다 개방적이었기에 어린 시절부터 다양한 것들을 경험할 수 있도록 해주시던 그 모든 것들이 아빠의 장점이자 자랑이었다. 나는 그런 아빠의 좋은 점을 찾아보려 한 적이 있었을까 혹은 H처럼 너무나 당연한 일들이었기에 그 사실들을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나는 이제서야 아빠의 좋은 점들을 깨닫기 시작했다. 너무나 당연한 마음이라 여겨왔기에 느끼지 못하고 있던 사실들을 이제서야 깨달은 나의 우둔함을 흔들어 깨웠다.


그 무엇도 당연한 것은 없고 내가 걷는 이 길조차도 다른 누군가에 의해 '길'이라 불리기 시작했다는 것, 그 모든 새삼스러운 일들을 깨닫는 것은 감사할 일들이 많아진다는 뜻이며 그 모든 순간과 존재들로 삶이 조금 더 아름답고 풍요로워진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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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꽤나 뜨거워진 날씨는 겉옷을 벗어버리게 만들었다. 가벼운 옷차림만큼 기분도, 걸음도 힘이 났다. 물을 자주 마시고, 자주 쉼표를 찍는 것, 기분 좋은 추억을 회상하고 긍정적인 에너지를 다른 이들에게 나누는 것. 나는 나만의 방법으로 그리고 사람들은 저마다의 방법으로 길을 걷고 있다. 내가 걸어온 길을 걸어올 누군가를 위해 작은 돌멩이로 화살표를 남겨주고, 가방 속 남은 빵 조각과 마음을 나누는 순례자들. 그리고 배고픈 순례자를 위해 대문 앞에 바게트 빵을 걸어두거나 순례길 위로 걸어나와 사과를 나누는 친절한 사람들. 그들은 카미노 위에서 삶을 살아가며 매일 축복과 감사를 받고 있었다.



아름다운 모습으로 살아가야겠다.

내가 존재함으로 혹은 그들 곁에 내가 잠시 머물렀던 것만으로도 힘이 될 수 있는, 그래서 다시 언제고 보고 싶은 사람이 되는 것. 크진 않지만 오랫동안 내가 꿈꾸는 나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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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은 포르토마린으로 이어졌다. 멀리서 바라보는 마을은 길을 걷는 순례자들의 마음을 무척이나 설레게 만들었는데 마을에 들어서자 높은 마을 언덕에서 바라보는 강이 마음에 잔잔한 휴식을 가져왔다. 마을에는 12세기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어진 산 니콜라스 성당이 자리하고 있었는데 원래 성당이 자리했던 곳은 저수지에 잠겨버려 현재의 광장에 다시 지어졌다고 한다. 중앙 광장에는 관광안내소를 비롯해 기념품을 파는 가게와 순례자의 허기를 채워줄 테라스 카페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평화로운 강을 건너는 다리 위에 섰다. 두 사람이 지나기엔 좁디 좁은 다리라 모두가 일렬로 적당한 거리를 두고 걸음을 옮겼다. 배꼽시계가 울리는 걸 보니 점심시간이 다 되었다는 걸 몸이 먼저 알아 차렸다. 우리도 아름다운 포르토마린에서 허기를 채우기로 했다.


나보다 앞서 걷는 H의 뒷모습을 보면서 그가 나보다도 한참이나 성숙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주말이면 교회에서 기도를 하고 주중에도 이따금 기도를 하는 습관은 스스로에게 하루를 돌아보고 반성하는 시간을 주었고 그 시간들이 이 아이의 마음을 깊어지게 한 것이 아닐까. 잘못을 뉘우치고 새로운 다짐을 하며 조금 더 성숙해지는 시간들을 쌓아왔을 H는 나보다 한참이나 어른이었다. 그런 친구와 함께 길을 걷게 된 것은 굉장한 선물이었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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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까지 약 90km가 남았다. 길어도 3일이라는 시간이 남았겠지. 아직은 실감이 나지 않는 마음이지만 뒤돌아본 강물의 반짝거리는 모습이 잊혀질까봐 잠시 겁이 났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은 쉽게 잊혀질 모습이 아니라는 생각이 간신히 발걸음을 돌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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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 광장으로 이어지는 계단을 오르니 벤치에 앉아 점심을 먹고 있는 한 순례자 커플이 눈에 띄었다. 배낭을 한 켠에 내려두고 햇살을 즐기는 모습이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언젠가 힘든 시간들을 겪으며 상대에게 모든 걸 의존하고 상대에 집착하고 구속하는 사랑을 하는 사람들을 본 적이 있다. 부족한 자신의 무언가를 상대에게 짊어지도록 하는 사람들과는 달리 내 눈 앞에 앉아 소박한 시간을 보내는 이 두 사람의 모습은 어쩌면 내가 닮아가고 싶은 연인의 모습이었다. 건강한 자아가 형성되었을 때에야 성숙한 사람을 만날 수 있고, 그런 사람들이 만나면 건강하고 아름다운 사랑을 해나갈 수 있다. 사랑은 상대에게 내 자신을 모두 의지하거나 구속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길을 묵묵히 걸어내며 그 과정에서 서로를 이해하는 힘을 기르고, 힘들 땐 함께 앉아 쉬어가야한다는 것 그리고 서로에게 끊임없이 좋은 점을 배워가고 또 함께 성장해야 한다는 것을 그들의 뒷모습에서 배웠다. 다음에 만나게 될 누군가에게는 그런 모습들을 배워갈 수 있지 않을까 조심스레 상상하며 아름다운 커플의 뒷모습을 마음 한 켠에 담은 채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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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곤자르에 배낭을 풀었다. 대도시에 도착한 기념으로 요플레를 한 통이나 먹어버린 것이 화근이었는데 눈에 보이는 알베르게에서 화장실을 해결하고 결국 그 곳에 짐을 풀고 말았다. 오늘은 H에게 내가 길을 걷기 전보다 무엇인가가 조금은 달라진 것 같다는 이야기를 꺼냈다.


"있잖아, 나 조금은 달라진 것 같기도 해. 예전의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비춰지는 모습이 더 중요했거든. 아마 그건 조금씩 사람들을 의식하기 시작하면서부터였을거야. 그런데 지금부터의 나는 그러지 않을 것 같아. 타인에게 내가 어떤 사람인가보다 내 스스로를 인정하는 내가 되고 싶어졌어. 내 스스로에게 거짓된 모습으로 살지 않을거야. 그리고 내가 아빠를 참 많이 사랑한다는 것도 깨달았어. 아빠의 마음도 말이야. 표현을 더 많이 할 수 있을 것 같아. 이제부터는 마음에 있는 말들을 더 많이 표현하려구. 지금 이 순간 그리고 나와 함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중요한지 더 많이 느낄 수 있도록 내가 마음을 열고 지금보다 더 다가갈 수 있을 것 같아.


돈과 명예 그리고 타인의 시선에 의해 결정된 것이 아닌 내가 주체적으로 하고 싶은 일들을 찾을거야. 그렇게 마음이 이끄는 삶을 살자 우리. 그렇게 살 수 있는 용기를 이 길에서 얻은 것만 같아"



"누나는 이미 많이 변한 것 같아, 걱정마"


H는 어른스럽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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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20일


무엇이 바뀌고 또 무엇이 변한걸까.


누군가가 보기에 나라는 사람이 그 무엇도 바뀐게 없어 보일 순 있겠지만 나는 분명 이 길을 걷기 전과 걷고난 후로 분명 무언가가 바뀌었다. 잠자리에 들기 전 내 안의 톱니바퀴가 철커덩하며 움직이는 소리를 냈다.


'변화'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 길 위에서 느꼈던 마음을 잊지 않기 위해 돌아가서도 끊임없이 지금의 마음을 되새기며 사는 것, 그 마음이 내일 내가 내딛는 걸음에 힘을 실어줄테고 그렇게 아주 먼 길을 걷고난 후에야 나는 걸어온 길을 돌아보며 '비로소 달라졌다'고 말할 수 있는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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