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를 배우는 방법

폰프리아 - 사리아

by Jess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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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밤 알베르게는 꽤 아늑하고 편안한 곳이었다. 튼튼한 나무 침대라 다른 알베르게의 철제 침대처럼 요란한 소리를 내지도 않고 따뜻한 물도 잘 나왔으며 저녁식사도 무척이나 훌륭했다. (그야말로 전통적인 스페인 가정식을 대접받는 기분이었다고나 할까.) 온통 하얀 피부의 외국인들 사이에서 까맣게 그을린 우리 셋은 도드라져 보였지만 모든 구성원들이 우리에게 따뜻한 시선을 건내주었다.



어느 덧 내 생체 시계는 이른 아침에 눈을 떠 길을 나서는 일상이 익숙해진 모양인지 닭이 우는 소리에도 문득 눈이 뜨였다. 지난 밤 모두와 함께 저녁을 먹고 잠자리에 들기 전 W는 "누나, 내일은 버리고 가지마"라고 몇 번을 이야기 했지만 이른 새벽에 눈을 뜨자 습관처럼 침낭을 정리하는 나를 발견하고 말았다. 생각이 많은 탓이다. 아이들보다 먼저 생각을 정리하며 산을 내려가 마을 언저리에서 커피를 마시며 기다려야 겠다는 결심이 섰고 아이들의 머리 맡에 쪽지를 남겨두고 길을 나섰다.



산 허리에 자리한 알베르게에 머물렀기에 오늘은 안개가 자욱한 산을 완전히 다 내려가야한다는 부담이 있었다. 발에 물집이 여기저기 생기고 나면 오르막보다는 내리막 길이 더 고통스럽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무게 중심이 앞쪽으로 몰리면서 물집이 더 생겨나거나, 기존의 물집에 또 다른 물집이 생기는 경우도 있고 미끄러운 비탈길에서 발목을 삐끗하는 경우도 훨씬 많기 때문이었다. 특히 무릎을 다치게 된 경우에는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더 내리막길이 고통스러워 진다. 아마 앞서 이 길을 걸은 H는 아직 채 낫지 않은 무릎으로 이 산을 넘으며 몇 번을 멈춰 쉬고 또 쉬면서 스스로가 걸어온 길을 몇 번이고 돌아봤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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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지대의 안개는 예상보다 더 자욱했다. 시야가 10m도 채 확보되지 않는 상황에서 비탈진 산길을 내려가기란 그리 쉬운 일은 아니어서 점차 걸음이 더뎌지던 찰나, 문득 멈춰서서 내려다 본 산 아래는 하얀 안개로 조용히 덮여있었다. 인생도 이렇게나 자욱한 안개에 쌓여 불과 몇 미터 앞도 채 보여주지 않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씩 걸음을 내딛고 있다는 게 그리고 언젠가는 그 안개도 걷히게 된다는 사실이 작은 위안이 되었다. 우린 보이지 않는 여정에 대해 그 무엇도 짐작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안개 속에서 누가 내 뒤를 걸어오고 있는지, 내 앞엔 누가 앞서 걷고 있는지도 말이다. 그저 그 곳에 길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앞서 걸었던 누군가를 짐작만 할 수 있을 뿐.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기있는 한 걸음을 내딛은 사람이 박수를 받을만한 것은 두려움을 이겨내고 불확실한 길을 걸어왔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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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을 내려오자마자 특이한 모습의 나무가 사람들의 이목을 사로잡았다. 나무 속에 또 다른 나무가 자라나고 있는 모습은 마치 부모와 자식의 모습을 표현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지난 밤, 테이블에서 나누었던 이야기처럼 엄마를 '엄마'로서 대하는 것이 아니라 엄마도 한 사람의 '여자'라는 사실을 잊지 않고 산다면 무조건적인 희생을 강요하지 않게 될 것이며, 엄마 역시도 본인의 삶을 더 아끼면서 사실 수도 있으셨을텐데. 옆 자리에 앉았던 모녀의 모습이 자꾸만 떠오르는 이유는 그들이 살아가는 모습이 마치 한 사람의 일방적인 희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친구같은 모습이었기 때문이었다.


어느 덧 산 아랫마을에 닿았다. 안개는 조금씩 걷히는 중이었다. 나는 마을 끄트머리에 자리한 카페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고 카페 콘 레체를 마시며 한 시간을 기다렸지만 녀석들은 얼마나 늦게 일어난 것인지 꽁무니조차 보이질 않았다. 테이블에 앉아 어제 S기 나에게 던진 물음을 곱씹는다.


"언니, 언니는 H 오빠에 대한 마음이 어때?"


"글세, 익숙해진건지 내가 너무 많은 마음 속 이야기와 상처들을 꺼내보여서 그런 것인지 옆에 없으면 참 허전하고 또 보고싶고 그런 것 같아. 그런데 이상하게도 같이 있으면 혼자이고 싶고. 그래서 사실 내 마음을 나도 잘 모르겠어. 그래서 다시 H를 만나면 물어보고 싶었어. 너는 마음이 어떠냐고, 이 감정은 무엇일까 하고"


".......


언니, 사실 있잖아. 내가 버스를 타고 내렸는데 때마침 H오빠가 지나가길래 같이 길을 걸었거든. 그러다보니 오빠랑 언니 이야기를 하게 되었는데 오빠가 그러더라고.. 언니를 좋아하게 될까봐 두려워서 거리를 두려고 무리를 하면서도 많은 길을 걸었다고. 언니도 알잖아. 오빠 무릎 안좋아서 절뚝거리는거 말이야..근데 그 고통을 이겨낼만큼 힘든가봐. 사실 언니 만나기 전 날 W오빠랑 나랑 H오빠랑 다 같이 만나서 저녁먹고 알베르게에서 자는데 H오빠가 밤새 뒤척거리면서 괴로워 하더라구.. 그러더니 새벽에 동 트기도 전에 나가더라. 많이 괴로운가봐 언니.. 언니가 보고싶기도 한데 한편으론 두려워서 그렇게 걷지 않고는 견딜 수 없데"


복잡한 마음을 잔뜩 곱씹으며 카페에서 한참을 아침이 오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그렇게 스스로를 아프게 만들면서 자신의 마음을 부정해야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좀 더 당당하게 그 상황과 마주할 수는 없는걸까. 어쩌면 사랑을 한 번도 해보지 않은 누군가에게는 이 모든 감정들이 나보다도 더 혼란스럽고 두려울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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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을 고민하다 와이파이가 되는 곳을 벗어나면 연락이 힘들어질거라는 생각에 카톡을 보내기로 했다.



'넘어지는 것이 무서워서 자전거를 겁낸다면 넌 평생 자전거를 탈 수 없을지도 몰라'



성장을 위해선 때론 자신이 직면하고 있는 감정들을 아프고 힘들지만 밖으로 꺼내놓고 들여다볼 용기가 있어야 한다. 솔직하게는 지금까지의 나 역시도 불편한 감정이 밀려올 때마다 그 감정들을 마주 하지 않은 채 피하기만 했었다. 마주하지만 않는다면 그 감정들은 나와는 상관없는 일일거라고 생각하며 스스로에게 끝없는 합리화를 하고 오랫동안 비겁한 삶을 살아왔다. 이제부터라도 다른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나는 그 모든 감정들을 꺼내놓고 바라보는 용기가 필요했다. 어쩌면 그 아이에게 보낸 메세지는 내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던 것이다. 다시 만난다면 무슨 말을 해야하는지, 내가 느끼고 있는 감정은 무엇인지 분명하진 않았지만 분명한 것은 나도, 그 아이도 용기를 내야하는 시간이라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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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동안 아이들을 기다리다 결국 포기하고 나는 다시 길을 나섰다. 트리아카스텔라에서 양갈래로 길이 나뉘어졌는데 나는 짧은 길보다 더 오래 돌아가는 길을 택했다. 복잡한 마음은 걸으면서 털어내버릴 생각이기 때문이었다. 6.5km가 더 늘어났지만 아스팔트로 덮여버린 길보다는 자연을 벗삼아 도란도란 걸을 수 있는 길이 더 좋았다. 한참을 걷다보니 자전거 순례자들이 사진을 찍어줄 사람을 기다리던 찰나에 등장한 나에게 엄청난 반가움을 표했다. 그들의 등 뒤로는 '사모스'의 베네딕트 수도원이 자리하고 있었다. 오락가락하는 갈리시아 날씨에 판초우의를 입고 길을 걷는 바람에 모양은 조금 우습지만 나 역시도 자전거 순례자들 덕분에 홀로 걷는 길에 기념이 될만한 사진 한장을 얻었다. 피로감이 묻어나지만 내 얼굴은 조금씩 편안하고 행복한 모습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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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길을 조심스레 내려가자 산 속에 고요하게 자리잡은 수도원이 보였다. 오르비오 강 건너편에 자리한 수도원은 스페인에서 가장 오래된 수도원으로 아름다운 경치를 벗삼아 주변에 아기자기한 레스토랑과 카페들이 자리하고 있었고 관광버스 몇 대와 단체 관광객들이 우르르 내려 수도원을 둘러보고 있었다. 관람료를 내야 수도원을 둘러볼 수 있기에 잠시 고민을 하던 내 뒤로 카메라 셔터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나를 바라보던 몇몇 관광객들이 순례자인 내 사진을 대놓고 찍어대고 있었던 것이었다. 살짝 기분이 언짢아진 나는 수도원 밖으로 허둥지둥 나와 불편했던 기분을 떨쳐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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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당에선 하루 종일 정기 예배가 있고 저녁 7시 30분에는 만종이 울린다. 스페인에서 가장 오래되기도 했지만 가장 넓은 규모를 자랑하는 수도원이기도 하며 낮시간에는 정기적으로 수도원 투어가 진행되는 곳이라고 한다. 마을은 단체 관광객들이 아니라면 꽤 잔잔했고 쉬어가기에도 더할 나위 없이 좋을 장소라는 생각이 들만한 곳이었다. 수도원 옆으로 잔잔하게 흐르는 강물을 따라 길은 끝없이 이어져 있었다. 관광객들을 벗어나 다시 아무도 없는 거리를 따라 걸었다. 관광객들 사이를 지날 땐 채 느끼지 못한 고통이 다시 아무도 없는 길 위에 서자 밀려오는 중이었다. 노랗게 곪아버린 발은 자꾸만 아프다고 소리를 질러대고 있었다. 결국 고통을 참지 못하고 마을 끄트머리의 벤치에 걸터앉아 신발과 양말을 모두 벗어 던졌다. 대일 밴드도, 물집 밴드도 모두 말을 안듣는 이유는 다 내 욕심에 있었다. 물집이 생기지 않게 더 자주 멈춰 신발과 양말을 벗고 바람을 쐬어주는 노력이 필요했는데 너무 오래 땀에 절은 발로 걸음을 걸었기 때문이었다. 생각이 많아진 머리는 결국 몸 한 구석이 고장나야 비로소 쉴 수 있는 여유를 스스로에게 허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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넉넉한 휴식 후 강을 따라 걷는 길은 자꾸만 콧노래를 흥얼거리게 했다. 이따금 비가 내리곤 했지만 또 금새 맑아졌다. 잔잔한 강은 큰 요란없이 가장 낮은 곳으로 멈춤이라곤 잊어버린 듯 흘렀다. 나는 이따금 길 위에서 만난 몇몇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이 곳에서도 가끔 현실 세계를 걱정했다. '이 시간에도 다른 사람들은 토익 준비를 하고 자소서를 쓰고 공채를 넣고 있겠지'같은 걱정들 말이다. 좋은 회사를 다니고서도 40이 다 되어가는 나이에 나와 같은 문제로 길을 걷고 있는 사람들은 만난 후에는 나는 오늘의 내가 결코 느린 것도, 멈춰 있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삶의 목적'과 '방향'없이 이어지는 걸음은 결국 더 먼 길을 돌아가게 할 수도 있다는 것을 어디로 가던지 간에 삶에 대한 방향성 하나만 알게 된다면 나의 노질은 결코 느리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나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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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을 벗어나자 급격히 사리아에 가까워졌다. 드디어 산길을 벗어나 도시로 접어드는 도로를 만났으며 반짝거리는 햇살을 마주하기 시작했다. 길 위의 햇살이 가득 내리쬐는 알베르게의 정원에는 몇몇 순례자들이 책을 읽고 있었다. 매일 두세시쯤 알베르게에 도착해 샤워를 하고 나오면 어김없이 생각의 시간이 찾아오곤 했다. 그럴 때 의지할 수 있는 책이나 글귀를 두고두고 읽는다면 깊은 깨달음을 얻게 될거라는 생각이 들지만 아쉽게도 나는 순례자를 위한 책 한권과 작은 일기장이 전부였다. 대신 그 깨달음의 시간이 올 때면 나는 언제나 그들을 일기장 한 가득 꾹꾹 써내려갔다. 채워내고 다시 비워내고를 반복하는 시간이 바로 하루의 여정을 끝낸 후 샤워를 하고 일기장과 맥주 한 잔을 든채 테이블에서 글을 써내려가는 순간이었다. 그 달콤한 여정의 끝을 그리며 무거운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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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도착한 사리아.


이제 산티아고까지 110여 킬로미터가 남았다. 산티아고는 100km 이상만 걸어도 완주증을 받을 수 있기에 많은 사람들이 사리아에서부터 순례길을 걷기 시작한다. 그래서 이 곳부터는 알베르게 자리 전쟁도 조금 더 치열해지고 느긋함도 사라진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서일까, 사리아에 닿는 발걸음이 조금은 무거웠다. 그래도 오늘 아침 H에게 보낸 메시지처럼 나는 오늘 꼭 '사리아'에 닿아야 했다. 몸은 물 먹은 솜처럼 점점 무거워졌지만 마음 한 켠에 피어난 기대감이 한 걸음, 한 걸음을 뗄 수 있도록 하는 원동력이 되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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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즈막히 알베르게에 도착해 침낭을 깔고 샤워할 준비를 하고 있는데 누군가 내 어깨를 두드렸다.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니 H였다. H는 환하게 웃으며 "누나, 보고 싶었어"라고 말하며 나에게 포옹을 건냈다.


떨어져서 걸었던 그 몇일이 무색할만큼 우린 아무렇지 않게 마트로 향해 다음날 필요한 물건을 사고 카페에 앉아 대화를 나눴다. 마음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누었던 것은 아니지만 적당한 농담과 일상이 섞인 맥주 한 모금은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의미를 담고 있는 듯 했다. S와 W도 다시 만난 기념으로 우리는 도시에서 마침내 근사한 식사를 한 끼 하기로 했다. 화창했던 하늘에서 거짓말처럼 비가 흩뿌렸지만 비를 맞아도 우린 오랜만에 함께여서 행복했다.


그리고 이제야 비로소 자전거는 조심스레 앞으로 나아가는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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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9일


우리 모두 서로 다른 상처를 안고 서로 다른 이유와 목적으로 길 위에 섰다.

새로운 누군가를 만나고 헤어지고 함께 아파하고 즐거워하고 울고 웃으면서 하루하루 치유 받는 중이다.


단지, 이 길을 함께 걷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우리 모두는 각자의 목적지에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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