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레헤 - 폰프리아
피곤함에 선뜻 잠이 들 수 없는 밤이었다. 잠시 바람을 쐴 겸 밖으로 나가 있는데 우연히 며칠 전 만났던 눈이 깊은 아저씨와 알베르게에서 조우했다. 우리는 반가움에 인사를 나누고 밤이 깊어 가도록 벤치에 앉아 오래도록 이야기를 나눴다. 별이 뜨는 걸 보고서야 비로소 잠들 수 있었다. 지난밤의 이야기도 역시 살며 도움이 될만한 깊은 이야기였었는데 어쩌면 내가 길을 걸으며 더 많은 것들을 깨달을 수 있도록 누군가가 끊임없이 배울 수 있는 사람을 곁으로 보내주시는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에 빠져들만한 시간들이었다.
동이 터오기 시작할 무렵, 사람들이 깰까 봐 침낭을 말아 들고 나와 밖에서 짐을 꾸리고 있는데 눈이 깊으신 아저씨께서도 주섬주섬 짐을 안고 나오셨다. 불면증이 있으시다는 이야기는 들었었는데 내가 밖으로 나가는 소리를 듣고 잠이 깨서 나오신 듯했다. 아침은 언제나 혼자 길을 걷곤 했지만 오늘은 모든 대화에 느낌표를 찍어주시는 아저씨와 함께 길을 걷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 함께 길을 나섰다. 지난번 커피도, 어제의 저녁도 모두 아저씨가 사주셔서 오늘은 내가 먼저 "아저씨, 제가 커피 사드릴게요!"라고 제안을 드렸더랬다. "그러려무나"하고 시크하게 대답을 하신 아저씨는 이내 가방에서 뭔가를 꺼내 건네셨다.
분홍이 예쁘게 내려앉은 납작 복숭아 하나,
"과일을 잘 챙겨 먹어야 해. 과일 좀 사 먹고 그러나?"라는 시크한 물음에 감춰진 따뜻함을 이미 읽어내고선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그렇게 아저씨와 나는 보폭을 맞춰 비에 젖은 도로를 걸었다. 대화는 이따금 이어지기도 또 끊어지기도 했지만 불편함이 느껴지지 않았고 그 적당한 거리와 온도가 걷는 내내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었다.
"아저씨는 눈이 참 깊으신 것 같아요. 그 눈빛이 너무 인상 깊어서 또 뵙고 싶다고 계속 생각했었는데 이렇게 다시 뵙고 이야기 나눌 수 있어서 너무 좋아요"
"헤이, ABU 하지 마"
잠시 ABU가 무엇인지를 생각해야 했지만 그것은 '아부'라는 걸 이내 깨닫고 허허 웃어버렸다.
"아저씨, 진심인데요? 그리고 그때 해주셨던 이야기들이 마음에 참 와 닿았어요. 저희 아빠와 비슷한 나이 또래이시고 직장 생활을 오래 해오셨지만 다양한 나라에서 주재원을 하시면서 남들보다 더 다양한 경험 속에서 더 우러나는 말씀들을 많이 해주셨잖아요. 그래서 대화를 나누는 동안 많이 배우는 기분이었어요. 감사했어요"
"내 눈은 양쪽이 달라. 아마 그래서 한쪽 눈을 보고 더 깊어 보인다고 말했겠지. 카메라를 다루고 있으니 잘 알겠지만 내 눈의 조리개는 고장이 났어. 골프공에 맞은 후로 나아지지 않았지. 나는 한 가지에 미치면 그 하나를 아주 오랫동안 하는 습관이 있어. 그 첫 번째가 카메라였어. 좋은 카메라를 사고 장비를 사고 출사를 다니고 나중엔 사진을 직접 뽑아보고 싶은 마음에 집에 암실을 만들었지. 그땐 우리나라에 카메라가 널리 보급되지 않던 시기라서 더 비쌌거든. 그래서 부인에게 오랫동안 꾸지람을 들었고 결국 취미생활을 접게 되었지. 무튼, 그렇게까지 한 가지에 미쳐서 사진을 찍었다네."
무심히 내 카메라에 담긴 사진을 보며 이야기를 이어가시던 아저씨는 뿌리가 깊어서 쉬이 흔들리지 않는 나무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카페에 도착해 커피를 사드리려고 했는데 아저씨는 담배 한 갑을 사시 고선 커피 두 잔과 크로와상 두 개를 주문하셨다.
"내가 동전이 너무 많아서 처치 곤란이라 그러니 이 것도 그냥 내가 계산할게. 산 넘어서 다시 만나면 내 가방에 있는 컵라면을 같이 먹도록 하자"
아저씨는 내가 곤란하지 않을 만큼 소리 나지 않게 이것저것 챙겨주셨지만 그것이 어른으로써의 권위의식이라던지 보여주기 혹은 자랑하기 위해 이야기를 꺼내던 다른 어른들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셨다. 아저씨 정도의 내공은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고 아마 아저씨도 해외에서 살아오신 20년이 넘는 시간 동안의 경험들이 결코 쉽지만은 않으셨을 거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아저씨를 비롯해 규오빠, 사하군에서 만났던 B언니도 오늘날 우리가 모두가 동경하는 대기업을 다녔지만 과감하게 일을 그만두고 이 길을 걷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회사 그만둔 거 후회하지 않으세요?"하고 물었을 때 모두들 "아니, 물론 그 회사는 너무 좋은 회사야. 돈을 많이 주거든. 다신 그런 연봉받으면서 일할 수도 없을 거야. 하지만 지금 이 선택에 후회는 없어"라고 대답했다.
'돈'이 직업을 선택하는 기준이 된다면 길 위에서 내가 만난 사람들처럼 행복한 삶보다는 남과 비교하는 삶 속에서 스스로를 좀 먹으며 살아갈 수밖에 없을 거라고 조심스레 생각했다. 그들은 돈이 아니라 스스로가 원하는 삶을 살기 위해 과감히 이 길을 선택했고 그 누구보다 행복해 보였다. 물론 이 길을 선택하기까지 그 누구보다 힘든 결정을 해왔겠지만 그 걸음이 더 당당해 보이는 것은 '올바른 삶의 기준'을 위해 길을 걷고 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아저씨는 담배를 피우고 천천히 갈 테니 먼저 출발하라고 하셨다. 혼자 걷는 시간을 위해 티 나지 않는 배려를 해주시는 어른의 모습을 보며 '소리 없는 배려'는 어떠한 모습인지를 배웠다. 아저씨가 베풀어주신 마음을 먹고 든든하게 길을 걷는다. 오늘은 지나온 마을 끄트머리에서 대한민국 국기가 펄럭이는 모습을 보고 잠시 반가운 마음을 감출 수 없었는데 알고 보니 그곳에서는 신라면과 공깃밥, 김치를 팔고 있다고 했다. 한식이 그리운 사람들들을 위한 한식당을 이 먼 곳에서 만날 수 있는 걸 보면 순례길은 이미 한국인들에게 유명해져 버린 길이 맞나 보다.
앞서 걷는 순례자들 위로 구름이 아주 가까이서 지나고 있었다. 고지대라서 구름이 생각보다 더 머리와 가까운 곳에서 지나고 있었다. 말없이 그렇게 한참을 걷고 또 걸으며 아저씨가 해주신 말씀을 몇 번이고 생각해 본다. 스토리텔링이 모든 분야에서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서. 어찌 보면 산티아고도 그런 스토리텔링의 대표적인 사례라고 말이다.
"성 야고보의 유골이 산티아고에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사람들이 이 길을 걷는 이유가 무엇이겠나, 이 곳만큼 스토리텔링으로 작은 마을들을 살려 놓은 사례도 드물지"
아저씨는 산티아고를 다른 관점에서 보고 계셨다. 아는 게 많아야 보이는 게 많은 건데 이 길을 걷기 전 체력적인 부분만 단련해온 나에게 보이는 것은 부끄럽지만 사실 그리 많지 않았다. 앞으로 살아가며 얼마나 더 많은 공부를 해야 하는지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은 먼 나라에서도 그리 다르지 않았다. 빨래를 널다 이웃과 너스레를 떨고 마당을 쓸고 동물들에게 먹이를 주고, 또 지나는 순례자들에게 이따금 인사를 건네는 것 말이다. 단지 다른 점이 있다면 '여유'가 조금 더 그들에 삶에는 녹아 있다는 것.
작은 마을을 지나며 소를 만나면 시골집이 생각나 반가운 마음이 들곤 했다. 내 등록금을 위해 애지중지 키우던 소를 팔았던 할머니, 그 덕분에 대학교 등록금을 내고 학교에 입학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래서인지 녀석들을 보면 반갑고 고맙기만 하다.
어젠 엄마를 생각하다 문득 떠오른 한 사람이 있었다. '엄마 교수님'이라는 호칭으로 부르곤 했던 경영학과 교수님으로 비록 경영학과생은 아니었지만 모든 수업을 앞자리에 앉아 들어온 덕분에 교수님과 가까워지게 되었다. 성 차별이 무척이나 심했던 20여 년 전, 여자로서 현대자동차 인사부에 들어가 인정받기 위해 결혼도 마다하고 열심히 일만 해오시던 강한 분이셨다. 문득 밀려오는 외로움에 40대가 되어서야 비로소 결혼을 하셨는데 이젠 아이를 가지고 싶어도 더 이상 가질 수 없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함께 눈물을 흘린 적이 있었다. 그 이야기 이후로 나는 교수님을 '엄마'라는 호칭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교수님은 나를 '딸'이라는 이름으로 부르셨다.
1년간 서울에서 고시원 생활을 하며 많이 지쳐있던 내가 서울에 올라오셨던 교수님을 만나던 날이었다. 지하철에서 재회한 교수님은 나를 보시고선 안쓰러움에 눈물을 흘리셨다. 때론 용돈을 쥐어주시고 용기를 내라며 응원의 선물을 남겨주시고 이따금 만날 때면 속이 든든해야 된다며 밥을 한 가득 사주시던 교수님. 사는데 치이고 치여 고마운 분들께 연락조차 제대로 드리지 못한 내가 부끄러울 다름이었다. 항상 받기만 했던 못난 '딸'의 역할에서 벗어나 이젠 엄마께 자랑스러운 제자이자 딸이고 싶은데 자꾸만 작아지고 또 작아지기만 했던 시간들을 반성했다.
도로를 따라 이어지던 길은 어느새 작은 마을로 통한다. 마을은 아직 잠들어있는 건지 조용한 정적이 머물러 있었다. 9세기에 사라세노 백작에 의해 만들어진 마을로 큰 도로변에 자리하고 있어 오래된 느낌은 많이 사라졌지만 조금 더 세련미가 느껴졌고 숙박시설도 구멍가게도 잘 갖춰져 있어 잔뜩 지친 사람들에게는 두 번 고민할 겨를도 없이 멈춤을 외치게 만드는 장소였다. 아침에 아저씨와 함께한 크로와상과 커피 한잔 덕분에 안락한 마을의 유혹에 빠지지 않고 든든한 기분으로 신발끈을 고쳐 메고 다시 길을 나섰다. 순례자들이 길을 떠난 호스텔의 열린 창 너머로 이불을 털어내는 아주머니와 눈이 마주쳐 '올라'라고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다시 기분 좋은 느낌을 가득 안고 길을 걸어내는 순간이다.
한참 동안 마을을 지나는데 향긋한 빵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아니나 다를까 조용한 마을 한가운데 그 무엇보다 유쾌한 냄새로 사람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만드는 베이커리에는 꽤 많은 순례자들이 걸음을 멈춘 채 머물고 있었다. 든든하다고 했던 내 이야기는 금세 묻힌 채 나 역시도 빵집으로 들어가 핸드메이드 쿠키 한 봉지를 기쁘게 사들고 다시 길을 나섰다. 고작 쿠키 한 봉지일 뿐인데 쿠키 하나를 입 안에 넣고 와그작 깨물어 먹는 순간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나는 잔뜩 부푼 기대감을 안고 길을 걸어낼 수 있었다.
여기저기 들러 쉼표를 찍느라 여유롭게 걸었던 나는 어느새 천천히 걸음을 옮기는 많은 이들과 함께 길을 걷고 있었다. 딸과 함께 길을 걷는 엄마, 가족들과 삼삼오오 모여 걷는 사람들, 머리가 하얗게 샌 노부부 그리고 누군가는 택시를 타고 우리를 스쳐 지났다. 모두들 같은 길을 걷고 있었지만 각기 다른 방법과 다른 모습으로 길을 걷고 있었다. 아마 이 길의 끝에 달려있는 깨달음도 저마다 다른 모습을 지니고 있을 것이다.
루이텔란이라는 마을에 들어섰다. 자전거 순례자들이 자전거를 정비하며 나에게 인사를 건넸다. 자전거 순례자들은 오후 5시 즈음부터 체크인이 가능한데 이는 걸어서 순례길을 걷는 사람들을 위한 배려를 위해서라고 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만약 알베르게에 자리가 없다면 다음 마을까지 5~10km를 다시 걸어야 하는 순례자들에게는 너무나 힘든 순간이 될 테니 말이다. 나름의 배려와 규칙이 존재하는 순례길이다. 루이텔란에 자리하고 있는 마을들은 자연과 가까우면서도 도시로 접근하기 위한 도로가 잘 닦여 있어 고급 주택들이 여기저기에 들어서 있었다.
도로를 벗어나 산길로 접어들었다. 한참 동안 오르막길을 오르는데 갈리시아 지방에 들어섰다는 표석이 덤덤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앞서 걷던 아주머님께서 비석과 함께 사진 한 장을 부탁하셨고 흔쾌히 추억을 남겨드렸다. 표석은 앞서 길을 걸은 사람들의 흔적으로 가득했다. 그리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니었지만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나의 마음과 같길 바라는 것은 어쩌면 오만이기에 이런 모습 또한 카미노라는 생각을 하며 덤덤히 그 표석까지도 마음에 받아들였다. 고집스러운 생각들에서 벗어나 조금 더 많은 것들을 아우를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길 나는 몇 번이고 바라고 또 바랐다.
그렇게 혼자 산을 오르며 지칠 만큼 지쳐있을 무렵, 오세브레이로에 닿았다. '오세브레이로 성당'은 카미노에 있는 가장 오래된 건물 중 하나로 순례자들을 위해 자리해왔다. 이 성당에 잠들어 있는 사제 '돈 엘리아스 발리냐 삼페드로'는 카미노의 노란 화살표를 창안해낸 사람이자 사람들이 카미노를 무사히 완주할 수 있도록 평생 도움을 준 사람이다. 성당에 걸터앉아 그런 고귀한 삶을 살아온 사람을 떠올리고 있는데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빈지노의 노래를 나에게 전파한 W와 벙거지 모자를 쓰고 길을 걷던 S로 버스를 타고 꽤 먼 거리를 건너뛴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이 곳에서 만나니 만감이 교차했다. 무엇이라도 주고 싶은 반가운 마음에 가방에 깊숙이 넣어둔 체리를 꺼내 건넸다. 아이들도 오랜만에 만난 내가 반가웠던 모양이다. 잔뜩 상기된 목소리로 오늘은 꼭 함께 길을 걷자는 이야기를 건넨다.
배가 고팠던 건지, 아직 채 낫지 않은 다리 때문인 것인지 다음 마을에서 쉬었다 가자는 제안을 하는 아이들. 그 와중에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알아차리고 넌지시 물었더니 연인이 되기로 했단다. 한 사람이 떠난 후 그제야 마음을 알게 되어 버스를 타고서 다음 목적지에서 기다리고 있었다는 그 용기가 대단하기도 예쁘기도 해서 점심 식사를 하다 말고 우리는 간단한 축배를 들었다. 좋아하는 사람이 생긴다면 나 역시도 저런 용기를 낼 수 있을까를 몇 번이고 고민을 하면서 말이다.
W가 좋아하던 '아쿠아맨'이라는 노래를 어느새 S가 흥얼거리고 있었다. 처음엔 상대가 좋아하는 것들에 관심을 가지게 되고 그러다 보면 어느새 그 사람만큼이나 그 무엇을 좋아하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마법 같은 일. 어쩌면 지금의 나도 과거에 마음을 나누었던 사람들이 만들어준 모습일지도 몰랐다.
커피믹스 두 개를 탁탁 털어 넣고 이따금 커피를 마시는 일,
'네루다'의 책을 가까이하는 일,
브라운 아이즈의 노래를 흥얼거리는 일,
버스 제일 뒷좌석 앞에 앉는 일,
집에 나만의 서재를 만들어 가는 일
그런 소소한 습관들은 어쩌면 나에게서 시작된 것이 아닌 그 누군가에게서 시작된 습관임을 금세 깨닫게 되고 만다.
W는 눈치 있게 둘만의 이야기를 하라며 한 템포 느리게 걸어왔고 S와 나는 그 날 하루 동안 참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그토록 말 수가 적었던 이유가 된 S의 집 안 사정, 트라우마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스스로의 힘만이 아니라 부모님의 도움이 더 많이 필요할 텐데 과연 그것이 가능할 것인지에 대한 의구심까지. 행복한 가정은 비슷한 이유로 행복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는 글귀를 어디선가 읽은 적이 있다. 세상에 사정없는 집은 없지만 불행의 이유는 정말로 천차만별이고 건강한 정신을 가지지 않고서는 그것들을 결코 이겨낼 수 없다는 것도, 유복하지는 않아도 부모님이 건강하고 행복하게 지내시는 것만으로 얼마나 큰 축복이고 행복인지를 나는 이제야 안다.
소똥 냄새가 깊게 배어있는 농촌 마을에 도착하고서야 우리는 짐을 풀 수 있었다. 슬이와 이야기를 하며 길을 걷는 동안 나는 안일하게 생각해온 내 생각들이 하나 둘 무너지는 경험을 했고 알베르게에 도착하고서 맥주를 두 잔 즈음 연거푸 들이켰다. 오늘 저녁은 건너뛰겠다는 마음으로 침낭을 펴고 누웠는데 아이들은 식사를 하지 않겠다는 내 팔을 붙잡고 밥은 무슨 일이 있어도 먹어야 한다는 강한 의지를 보였다. 아이들과 함께 자리에 앉아 음식 맛만 보고 가겠다는 이야기를 했었는데 나는 이미 자리에 앉아 두 그릇째 밥을 먹고 있었다. 알베르게에서 제공한 식사는 무척이나 훌륭했다. 수프도 두 그릇이나 먹고 빠에야와 돼지고기 요리도 두 그릇 즈음 먹어치웠다. 더 이상 숟가락을 들 수 없을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옆 자리에 앉은 아주머니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옆자리에 앉은 이들은 모녀로 스페인에서 온 아주머니는 미국에 공부하러 간 딸이 방학을 맞이하고서야 비로소 함께 할 수 있게 되어 무척이나 기쁘고 또 행복하다는 이야기를 전해주셨다. 나 역시도 한 번도 비행기를 타보지 않은 엄마를 모시고 해외여행을 가는 것이 꿈이라는 이야기와 함께 당신들처럼 멋진 곳으로 여행을 떠날 그 날을 위해 영어 공부를 열심히 해왔다는 이야기를 하자 나를 꼭 안아주시며 늦지 않게 그 꿈이 이루어질 거라는 격려를 해주셨다. 침대로 돌아가기 전 "엄마와 함께 행복하고 의미 있는 산티아고 길을 걷길 바랄게"라는 이야기를 건네자 딸은 들꽃처럼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사람들에게는 저마다의 아픔이 있다. 그 아픔을 이겨내야 비로소 어른이 되는 거라고 결코 말할 수 없었던 이유는 그 아픔이라는 것이 어쩌면 내가 상상하는 그 이상의 것 이기 때문인 것이며 어쩌면 그것이 가벼이 들을 수도 없는 아주 무거운 무엇이기 때문이다. 나는 아주 어렵게 마음속의 생채기를 덤덤히 꺼내 보여준 그 아이의 어떤 이야기에도 쉽게 반응할 수가 없었다. 너무 가벼운 끄덕거림이나 섣부른 위로는 다시 또 상처가 될지도 모를 일이었으니까. 내가 마음이 아픈 사람들의 곁에 머물 땐 언제나 그들의 이야기를 가만히 들어주었다. 그것은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이자 아픈 누군가에게 가장 필요한 온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