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에 친할머니가 돌아가셨다. 90세가 넘은 나이로 크게 아프지 않으시고, 병원에서 크게 아픈 곳 없이 어느 날 갑자기 돌아가셨다. 돌아가신 그 날에는 당황했고, 정신이 없지만 나중에 생각해 보니 할머니가 복되게 돌아가셨구나 생각이 들었다. 긴 투병생활도 없고, 다치지도 않고 90세가 넘으셔서 돌아가셨으니 감사한 일이었다.
친할머니가 돌아가신 날, 자주 찾아뵙지 못한 것이 후회가 되고 마지막 할머니와 통화한 것이 생각이 나서 펑펑 울었다. 이 세상보다 더 아름다운 천국에 가셨겠지만, 그래도 이 세상에서 더 이상 뵐 수 없다는 사실이 슬펐다.
돌아가시기 전, 개인적으로 할머니에 대한 미움은 없었지만, 아쉬움이 있었다. 친할머니가 좀 더 지혜롭게 결정했더라면, 아버지와 사촌 여동생(고모 딸) 사이에 불화가 없었을 것이다. 친할머니의 오판과 선택으로 아버지와 사촌 여동생의 사이의 감정의 골이 매우 깊어졌고, 법정까지 갈 법한 상황까지 왔지만 아버지는 그 길을 선택하지는 않았다.
불화는 오해와 잘못된 선택으로 불거진다. 그리고 용서하지 않은 마음은 사람의 태도에 따라 더 강화되기도 하고 수그러들기도 한다. '할머니는 왜 그런 선택을 하셨을까?' 궁금했다. 자신의 아들보다 고모 딸을 더 신뢰했다. 아버지는 자식으로서 할머니에게 모든 책임을 다했지만, 세상에서 보이는 보상은 없었다. 그럼에도 아버지는 친할머니의 장례를 누구보다 성의껏 치르셨고, 가장 좋은 자리에 묻어드렸다.
가족사를 이 공간에 모두 설명할 수 없지만, 누군가의 잘못을 용서하는 일은 자신을 그 상황의 메임으로부터 자유하게 한다는 사실을 배웠다. 평생 용서하지 하지 않고, 다시 보지 않으면 내가 더 편할 것 같지만, 생각만큼 그렇지 않다. 평생 그 생각에 나를 가두고 그 탓만을 하며 앞으로 나아갈 것도 나가지 못하게 되기 때문이다.
용서는 상대를 위하는 것 같지만, 결국 나를 위한 일이었다. 내가 그 일에서부터 자유롭기 위해서다. 그래서 복수보다 용서를 택하는 일은 결코 손해가 아니다. 이미 일은 벌어졌고, 그 피해가 다시 돌이킬 수 없다면, 누군가를 평생 탓하는 것은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그보다 그 일을 어떻게 슬기롭게 나올 수 있을 지에 집중하는 것이 유익하다.
우연한 기회에 유튜브에서 '위라클' 유튜브를 운영하는 박위라는 사람을 봤다. 그는 20대에 자신의 실수로 사고를 당했다. 그리고 전신마비가 되었다. 그때 의사는 결코 일어날 수 없다고 말을 했지만, 그는 지금 휠체어를 타고 있고, 자신의 힘으로 어디든 갈 수 있는 상태까지 건강해졌다. 누군가를 탓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그때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거나, 혹은 탓할 상대가 없으니 세상과 하나님을 원망했다면 지금의 그는 없었을 것이다. 스스로를 용서했기 때문에 그는 그 상황으로부터 자유했고, 신앙 가운데 일어설 수 있었다.
그래서 나를 포기하지 않는 1순위가 용서라 생각한다. 그리고 그 용서는 화를 화로 끝내지 않고, 전화위복으로 내게 다시 돌아온다. 용서가 그 당시에는 쉽지 않을 수 있지만, 결국 나를 위한 일이 된다.
Dear J
용서는 하늘을 움직인단다. 비록 네가 이 땅에서 네 마음을 푸는 일이지만, 그 마음은 하늘을 감동시키지. 이 땅에서 너를 아프게 하고 어렵게 하던 모든 상황과 사람을 용서할 때, 그때부터 너의 문제가 풀리기 시작할 거란다. 세상은 용서하지 않고 복수하라고 말하지만, 결코 옳은 방법이 아니란다. 앙갚음하지 않더라도 그 앙금이 네 안에 남으면, 그 기운이 너를 지배하게 돼서 너를 전진하지 못하게 해.
용서가 결국 너를 위한 길임을 깨닫게 되었다니 내 마음이 참 시원해. 위대한 사람은 내가 받은 만큼 돌려주는 것이 아니라, 그를 용서하는 것을 넘어서 품을 수 있는 사람이지. 이상적인 일인 것 같고 불가능한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단다. 나는 네가 그런 사람으로 성장하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