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엄마-서울, 자수

by 서한겸 Aug 12. 2024

백합자수 사장님


삼선동에서 12년인가 살 때였는데 좋은 집은 아니었다. 오래된 붉은 벽돌 다세대주택으로 겨울이면 목욕하기가 아주 추웠다. 그래도 엄마는 수도꼭지만 틀면 찬물, 뜨거운 물 나오니 얼마나 좋냐는 말을 몇 번인가 했다. 설거지 물 쓸 때도 세탁기 돌릴 때도 가끔은 감탄하고 한탄하는 엄마였다. 엄마는 옛날에 일한 이야기를 지치지도 않는다는 듯이 생각날 때마다 했다. 

이제 서울 산지도 30년인 넘었는데. 태어나기는 시골에서 태어났지. 시골 치고는 가난하지 않은 집이었어도 시골 부자래봤자 이 많은 게 시골 부자래. 자고 새면 밥하는 게 일이고 빨래하는 게 일이고. 하루면 물 긷기를 이십 번은 넘어. 여름이면 비 맞으면서 겨울이면 흙이 얼었다 녹아서 코뱅이 고무신 신고 물 길러 가면 신발 위로 흙이 올라와서 버선까지 타고 올라와가지고...

아휴...

발이 젖어서 발가락이 얼어서 감각이 없어질 때도 있고 물동이에서 물이 넘쳐서 옷이 다 젖기도 하고. 그러면 아궁이 불 앞에 앉아서 신발을 벗어 놓고 버선 신은 발을 불 가까이에 대면 김이 뭉개뭉개 피어나. 그렇게 살다가 이제 도시로 온 거지.

진작에 혼자 나와서 살았으면 좋았을텐데 그때는 길이 전혀 안 보이더니 이렇게 큰일이 있고 보니 이제는 혼자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에는 큰집에 살고 거기서 결혼하느라 눈치가 보이더니 광주 엄마 집에 와 있으니 새로 눈치가 보였다. 이혼 절차가 끝나고 광주에서 동양자수를 배웠다. 본래 할 수 있는 일이어서 크게 어렵지는 않았지만 돈을 많이 벌 수는 없는 일이었다. 평소 바느질이나 수놓는 데 소질이 있어서 큰엄마네 친정조카며느리가 동양 자수를 사람을 데리고 한다고 해서 거기 가서 일을 했다. 아예 집을 나가서 그곳에서 살아 보기로 맘을 먹고 갔다. 엄마가 스물네다섯 때의 일이다. 먹고 자고 할 수 있으니 쉽게 집에서 나올 수 있고 해서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일을 시작했다. 이불과 요를 싸서 머리에 이고 갈 수 있는 거리였다. 태어나 처음으로 직장, 남의 집에 살게 된 거다. 하기야 자랄 때도 엄마 아버지랑 같이 살지 못했지만. 

예닐곱 명의 처녀들이 모여서 병풍에 수 놓는 일을 했다. 엄마 나이가 제일 언니였다. 주인 여자가 따지자면 외사촌 올케 되는 셈인데 남편을 일찍 보내고 남매를 키우고 있었다. 한글도 잘 모르는 사람이지만 똑똑했다. 엄마 나이에 이런 일을 하는 사람도 없고 먼 친척도 되고 하니 사장이 엄마에게 책임을 주었다. 살림을 맡기고 외부일도 보고 서울에 물건을 가지고 가기도 하고. 그밖에 그 집 아들애의 비위도 맞춰야 했다. 처녀들이 모여 일하는 곳이라 당연히 연애하는 사람도 있고 옆집 총각을 혼자 좋아하는 애도 있었다. 그 애는 택시 운전하는 총각을 알아서 택시 타고 드라이브도 하고 쉬는 날에는 멀리 구경가기도 했다. 엄마로서는 새로운 세상을 만난 거다. 이런 세상은 처음 느껴보는 것이었다. 명절 때도 집에 가는 게 여기 있기보다 싫어서 엄마가 밥을 해주고 엄마도 먹고 했다. 일하는 집에 그렇게 있어도 집에서는 오라는 기별도 없었다. 

낳은 부모라도 다 잘하는 것도 아니야. 그때는 내가 안 갔으니까 하고 별로 섭섭하지 않았는데 지나고 보니까 걸어서 올 거리인데 동생들 보내서 오라고 하면 되지 참 할머니도 무정한 엄마였지. 그러니까 애초에 나를 큰집에 두고 이사를 했겠지... 어떤 한 편으로는 얼마나 할머니 당신도 살기 힘들었으면 그랬을까도 싶어.

할아버지도 엄마 안 부른 거잖아? 왜 할머니만 탓하는 거야.

모르겠어 아버지는 아버지다 싶지. 할머니만 그렇게 탓해지더라.

말도 안 돼. 

집이 가까이 있어도 정도 못 붙이고 명절이 되어도 집에도 가지 않고 일하는 집도 불편하지만 내 엄마도 나를 오라고 부르지도 않고. 서럽고 울적해서 견딜 수가 없어서 죽고 싶어도 그렇게도 못하고. 기찻길을 걸어가면서 기차가 갑자기 지나가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도 해봤다니까.

엄마 나는 지금 그래요. 지금까지 계속 그랬어 찻길로 뛰어들고 싶고 전철로 뛰어들고 싶을 때가 있어. 이렇게 말을 안 했다. 엄마가 젊었을 때 그랬다는 이야기도 가슴이 아픈데 딸이 그런 말을 하면 얼마나 가슴이 아플까. 엄마는 내가 그런 생각을 하는 거는 모를 것 같은 눈치였다. 엄마 보기에는 엄마 자란 거에 비하면 나는 더 나아 보여서 그럴까? 아니면 엄마도 내가 죽고싶어하는 걸 훤히 알지만 자기도 그랬으니 얘도 그러는구나, 원래 그런 거 아닌가, 이랬을까? 

수 놓는 집도 사는 게 어려웠다. 딸도 반항적이고 학교도 잘 안 가고 아들은 엄마한테 함부로 하고 대들고. 엄마로서는 처음보는 광경이었다. 아들이 늘 먹을 거 타박을 하는데 같이 먹으려고 달걀을 사다 두면 한 번에 다 삶아서 먹어치운 적도 있었다. 달걀 한 판을 다 먹는 사람은 처음 봤다. 세 들어서 겨우 아가씨들 붙잡고 수 놓아서 서울 가서 팔아다 먹고 사는데 자식들이 이렇게 하니 살림이 제대로 될 수가 없었다. 일 년도 못 있는 동안에 월급이라고 제대로 줄 때가 드물었다. 이 주인 사장 형편도 점점 어려워지고. 아들애가 자꾸 돈을 쓰고 경찰서도 가고 해서 편할 날이 드물었다. 곧 이집에서의 일을 그만두었다. 

그러니까 그때는 아직 광주였던 거네?

그렇지. 그러다가 어쩔 수 없이 집으로 다시 돌아가서 가리개 병풍에 수를 놓아서 일하던 집 여자한테 부탁해서 팔아달라고 했어. 당연히 그 여자도 돈을 남겨 먹는 건데, 나는 팔 길을 모르겠으니까 부탁할 수밖에 없었지. 서울 오는 차비를 마련한 거야. 추석이 되어서 서울 오는 당숙모를 따라 서울역에 내렸는데 첫눈에 들어오는 게 자가용이 많더라고. 고가도로도 보이고. 그 나를 치마에 숨겨서 학교에 입학시켰던 그 고모가 옥금이 고몬데 서울에서 자수를 하고 있어서 그나마 그 끈이 있어서 서울로 오게 된 게, 그때는 다행이었지.

그 고모가 대단한 인연이네. 은인인가?

뭐... 어쨌든 새 길이 마련이 된 거지. 고모가 우리 동네서 이혼 1호였는데. 이 고모가 친할아버지의 두번째 할머니 외동딸이야. 그때 당시로 정말 늦은 나인데 할머니가 41세에 어렵게 낳았다고 하더라고. 할아버지는 53세 정도 되시고. 그렇게 어렵게 태어났는데 고모가 평범하게 다소곳하지 못해가지고 할머니가 탱자 가시나무로 고모를 때렸다고도 하고 그랬어. 그때 우리동네는 한 달만 먼저 태어나도 위아래를 아주 엄격하게 따져. 거기다가 촌수도 고모였으니까 나보다 높이면서 자랐지. 할머니, 고모, 할아버지, 막내 작은 아버지 이렇게가 우리집보다 높은 집터에서 살았어. 우리집은 평지고 좁은 고삿길 지나 언덕 꼭대기에 고모가 사는 집인데 우물은 동네 한가운데 있어. 우리집에서도 집 대문을 나서면 앞으로 한참 가서 두어번 꺾어서 백미터 정도 가야 샘이 있어. 물 길어서 머리에 이고 오면 동네 어른들 눈에 띄기 좋은 곳인데 고모는 머리에 물을 이고 팔짱을 끼고 물을 잘 길어가지고. 그러다 넘어지면 사람 다치는 것도 문제지만 그때는 물동이 깨지는 것도 사람 다치는 거 지지 않게 중요했거든. 요욤하게 물동이를 이고 쪼긋쪼긋 걷는다고 흉보는데 고모는 그런 행동을 고치지 않더라고.

염병...? 너무 끔찍해. 온마을이 다 서로 알고 관찰하고 있어? 어떻게 살아?

그때는 다 그렇게 살았지 뭐. 

고모는 둘째 작은 엄마의 동생이 중매를 해서 결혼을 했는데 얼마 되지 않아 이혼을 하고 친정으로 돌아왔다. 온갖 흉은 다 보고 그럴 줄 알았다, 쌤통이다, 그 영감 입찬 소리 잘하더니 자기 딸은 이혼까지 하고 시원하다고 난리들이었다. 온통 집안이 큰일이 난 거다. 시집갈 때 가져간 세간살이를 작은 엄마 집에 들여놓는데 농이 안 들어가서 문턱을 자르는 일이 있었다. 그 때 막내 작은아버지 꿈에 할아버지가 나타나서 어서 너희 둘째 형네 가봐라 해서 내려와 보니 문턱에 톱질을 하고 있더라는 둥, 막내 작은 어머니 작은 아버지는 벌써 할머니하고 관계가 나빠질대로 나빠진 상황이었다. 이 속에서 할머니의 위치가 불안하게 됐다. 고모 시집가고 할머니는 큰방에서 작은방으로 옮겼는데 이건 할머니의 권리가 그만큼 줄어든다는 증거였다. 시집보낼 때 돈 쓰는 일로 관계가 틀어진 거다. 그런데 그렇게 시집보낸 딸이 이혼하고 다시 돌아오다니. 어렵사리 눈치 보며 키운 딸인데 돌아오기까진 말았어야 했지만. 자랄 때 착하게 보이게 자랐으면 덜하지만 좋게 봐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때는 나를 죽이고 살아야 칭찬을 듣고 사는데 할 말 다 하고 따질 것 다 따지면 싫어했다.

내가 만약에 이혼하면 난리 나겠네 엄마? 라고 말하려다가 이런 말만 해도 엄마는 난리를 치기 때문에 그냥 말았다. 그놈의 이혼이 뭐 죽고 사는 일 같다 엄마한테는.

고모는 그러다가 그 동네서 떠나고 할머니는 아주 일이 혼란스러운 중에 돌아가셨어. 자살을 했다고도 하고 자세한 건 모르겠지만. 그 할머니가 똑똑했는데. 우리 아버지가 이 고모 어머니한테 서모라고 '하소'라고 했다고 고모가 나중에 그러더라고. 그런 한 맺힌 이야기를 그냥 이야기 삼아 한다고 전화로 하더라고. 나도 그때 당시에는 아무 생각도 없다가 고모가 말해서 그때서야 알았지. 그래도 그 할머니가 따로 얘기할 데가 없었는지 무슨 의논할 게 있으면 우리 아버지하고 얘기를 많이 했어. 

할아버지도 진짜 웃기는 양반이야. 근데 무슨 양반이기는 해 엄마네 집이?

몰라. 가문이랑 자세한 건 몰라도 그래도 선산이랑 물려받은 게 많았어. 아버지는 그 동네서도 맨 나중까지 갓을 쓴 사람이고. 양할머니 돌아가시고 삼년동안 머리에 두건 쓰고 다리에 행건하고 영위를 모시고 할아버지 삼 년, 하루에 상식을 두 번씩 올리고... 말하자면 할아버지는 둘째 작은 아버지가 모셔야 됐는데 왜 아버지가 다 맡아 했는지. 그냥 아버지가 맡아서 하겠다고 했을 것 같아. 작은 아버지도 작은 엄마도 책임을 회피하니까. 그 속에서 우리 엄마만 고생이 두 배 세 배 된 거지. 음, 고모가 어떻게 해서 동양자수를 시작해서 서울로 왔는지는 물어보지도 않았네 자기도 말한 적 없고. 

이혼 정도는 해야 서울로 올 수 있는 건가?

이혼은 정말... 큰일이긴 하지. 

차라리 잘된 것 같아 그런 동네 벗어나서 서울도 오고. 아니면 계속 조선시대처럼 살았을 수도 있잖아.

잘된 게 어딨냐 이혼이. 

됐어... 아빠만 안 만났으면 잘된 거였을 수도 있어. 서울에서 학교도 좀 다니고 그러지.

그러기도 쉽지가 않아 남의 일 해서 먹고 사는데. 

그래서 서울 어디였어? 

응암동인데, 어느 빌딩 5층에서 고모랑 같이 수놓는 일을 하게 됐어. 서로 숙질간이라는 걸 남들 아는 게 싫어서 성을 다르게 부르기로 약속을 하고 그냥 그날부터 수놓는 걸 배우면서 일을 시작했어. 

고모는 저녁 때면 퇴근하고 엄마는 그곳에서 먹고 자기로 되어 있는데 이불이 없으니 어떻게 잤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한다. 며칠 뒤에 집에서 이불을 소포로 보냈다. 서울이라는 곳에 적응하느라 길도 모르는데 어떻게 찾았는지 서울역 옆에 우체국에 가서 이불을 찾아가지고 돌아왔다. 지금도 이 우체국이 그대로 있다. 엄마는 이불을 찾아가지고 버스를 타고 가지고 왔다. 택시를 타보지 않아서 두려워서 택시를 못 탔다. 물론 돈도 없었겠지만. 그렇게 이불이 생겼는데 엄마보다 먼저 와서 수 놓던 애가 늘 엄마 이불을 같이 덮고 잤다. 싫다고도 못하고 많이 불편했지만 딱하기도 해서 같이 덮었다. 

그 건물이 지금도 있더라고. 죽을 수는 없었는지 죽기가 싫었는지 내가 서울 와서 머리를 하늘로 쳐들고 다니다니 꿈만 같더라.

빌딩 전체 두 층을 쓰면서 연탄 난로를 놓고 오륙십명 정도가 모여 앉아서 고개를 숙이고 라디오 레시바를 귀에 꽂고 정말 정교한 수들을 놓았다. 레시바는 유선 이어폰 비슷한 것인데 라디오에 연결해서 귀에 꽂고 듣는 거였다. 실내에 들어앉아 고개를 숙이고 수만 놓지만 그래도 라디오를 늘 듣고 있으니까 소식을 많이 듣고 알고 했었다. 특히 야구 경기가 있을 때는 출신에 따라 경상도 전라도 갈라서 서로 응원을 하면 다들 앉아서 수를 놓으면서도 야구장같은 흥분을 느끼기도 했다. 때로는 약간의 다툼으로 번지기도 하고. 광주 일고와 부산 무슨 고등학교의 경기였던 것 같다. 엄마도 레시바를 가지고 있긴 했지만 일이 많아 잘 듣지는 못했다.

기모노니 오비니 하는 일본 사람들의 옷감에다 수놓는 일이 70, 80년도에 크게 성했다. 많은 시골이나 도시 처녀들이 이 일을 했다. 모두들 사정이 딱해 잠자리 주고 먹여 준다니 서울로 올라와서 힘든 생활을 하고들 있는 젊은, 아니 오히려 어린 여자애들이었다. 어려운 시절에 먹고 자는 걸 해결해주는 대가로 적은 임금을 주고 처녀들을 썼다. 대부분 열일곱 열여덟살이고 많으면 스물 일곱인지 여덟 정도까지. 여기서도 나이가 많은 엄마였다. 

밤에 자고 나면 빌딩 문이 유리문 한 겹인데다 낡고 문틈도 맞지 않아서 겨울에는 눈이 이불 위에 쌓여 있기도 했다. 밤이면 서로 난로 옆에서 자려 하지만 먼저 온 사람이난로 옆을 차지하고 무언중에 선배니 힘센 사람이니 자리는 정해져 있는 것이다. 늦게 온 사람은 남는 곳에서 자야만 했다. 그나마 이불도 없어서 남의 이불 옆에 붙여서 자는 애들도 가끔 있었는데 자다 보면 이불 주인이 그냥 맨몸으로 자고 있기도 했다. 이불도 못 덮고 웅크리고 자다 보면 온몸이 아파서 울상이 되었다. 

아이고... 그분들 지금 다들 잘 살고 계시면 좋겠다. 월급이 얼마 정도였어? 몇천원 이런 단윈가?

생각도 잘 안 나네. 사람은 많고 말도 많고 견뎌내기가 힘들어. 그래도 갈 곳이 없으니까 어쩌지도 못하고 일하고 있는데 마침 동갑내기 친구가 한 명이 왔어. 너도 알지 수연이 엄마. 내가 나이가 많아서 동갑은 생각도 못했는데 수연이 엄마가 있어서 의지가 됐지. 살필 새도 없이 그냥 친구가 된 거야. 중에 애기도 같은 때에 낳고. 너도 봐서 알겠지만 얼굴도 예쁘고 자기주장도 강하고. 걱정도 있어 보이더라고. 그런대로 세상 경험이 있어 보이고. 세상 물정 전혀 모르는 나랑은 달랐어. 아침 7시부터 오후 7시까지 근무였는데 일 끝나면 수연 엄마랑 자성빌딩 5층 아래 시장에서 자주 만나서 포장마차에서 소주 한 잔씩 먹고 그랬어. 서로 어려운 사정 얘기도 하고 그랬는데... 이 친구가 미국 오빠 찾아 떠난지도 벌써 몇년이냐... 너 여섯 살에 갔으니까. 지금은 소식조차 못하고 세월이 너무 잘 가버리네. 어려울 때 만나서 지냈던 친구라서 가끔씩 생각나. 잘 지내고 있으면 좋겠어. 이 친구랑 고모집에 같이 가기도 하고 그때부터 고모랑 잘 지냈어. 고모도 방 한 칸에서 자취하면서 출근하는 거야. 이렇게 서울살이를 시작했지. 

수연이는 나도 기억난다. 수연이가 미국에 간다고 해서 나는 나도 따라가겠다고 했다. 그때도 집구석이 싫었는지, 나는 진심이었는데. 하긴 수연이네가 나를 왜 데려가겠는가. 그리고 엄마도 나 없이 이 집에 남기는 싫었겠지. 

얼마나 지났을까. 사람이 너무 많고 여러 사람 속에서 지내기 힘들어 가정집에서 가내 수공업식으로 하는, 사람이 더 적은 곳으로 옮기기로 했다. 그땐 어지간한 거리는 이불을 머리에 이고 짐을 날라 이사했다. 자수 시장도 꽤 좁았다. 한창 잘 되던 시기라 경쟁도 치열했다. 기술, 솜씨가 좀 익을까 하면 다른 곳에서 몰려 데려가고 또 더 잘하게 되면 또 옮겨가기도 하고 주인 사장들끼리 싸우고 원수처럼 지내기도 했다. 그땐 그 일도 외화를 벌어들이는 일이었던 것 같다.

새로 간 집 사장 여자는 본인도 수를 할 줄 알았다. 당번을 정해서 밥을 해먹고 대신에 월급을 조금 더 받는 걸로 서로 말이 많았다. 누구는 더 하고 누구는 덜 하고 더럽다는 둥 말들이 많아 조용하지를 못했다. 꼴을 못 보는 사람이 일을 더 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도 견디기 힘들어 그냥 밥을 해주는 곳을 찾아 다시 옮겼지만 어디 가나 사람 사는 곳은 탈도 많고 말도 많았다. 나이가 많다는 것도 기가 죽는 일이었다. 어린애들의 눈치를 살피게 됐다. 

그러다가 책임자 자리를 맡게 되기도 했는데 조금 그래도 할 말이 있으니 있기가 나아졌다. 물론 주인의 비위도 맞춰야 했지만 다른 아가씨들보다 아주 조금이라도 올라온 대접을 해주었다. 한 곳의 살림을 맡은 셈으로 마음이 무겁기는 했지만 맡았으니 최선을 다해서 일을 했다. 이곳은 일본 사람이 사장이고 여기 사장은 한국 일을 맡고 있는 작은 회사였다. 지방에도 일하는 곳이 있어 매주 일감을 고속버스로 보내고 받아오고 했다. 사장은 잘 사는 부모에 잘하는 남편에 자기도 벌고 어려움을 모르는 여자였다. 사장의 조카며느리가 경리였는데 사장이 어떻게 엄마한테만은 잘해주냐고 무슨 비결이 있냐고 물었다. 

비결이야 일 부지런히 하는 것밖에 없지. 

아휴 좀 덜 부지런히 하고 학교를 좀 다니지 그랬어?

그러게. 그렇게 하는 애들도 있는데 그러려면 일을 좀 소홀히 하게 돼. 내 성격이 그렇게를 못해. 

엄마는 결국 나 결혼하고 할머니 돌아가시고 나서야 학교에 다닌다. 할 일 다 하고 나서 다니려니 70이 돼서야 학교에 간다. 

나이가 있어서 책임자로 일하는 때가 많았어. 그러니까 여러 가지 일을 하느라고 수 놓는 시간은 많지 않고 다른 애들 일할 수 있게 준비해주는 일이었는데 일거리를 준비해서 지방에 부쳐주고 받으러 고속버스 터미널을 자주 다녔어. 그 때 지금처럼 택배가 있었으면 얼마나 편했을까. 택시를 타고 다니는데 잠수교 개통한 날도 택시 타고 잠수교 건넜던 게 기억이 나. 일본 옷 만드는 원단이라서 무거웠는데 젊었으니까 할 수 있었지. 택시 아저씨들이 얼마나 물건을 빨리빨리 하라고 재촉하는지 그때부터 택시만 타면 마음이 급하고 바빠지는 불안증이 생겼어. 그때 여자 처녀애들만 한 사십 명이 방석 깔고 앉아서 전부 고개를 숙이고 머리는 까맣고 귀에 레시바 꽂고 수 놓는 풍경이 깨끗하고 정숙해도 보였어. 

사무실은 다른 곳에 있어서 여기는 모두 여자 젊은 처녀들만 있으니까 남자들이 대문 앞에서 서성이기도 하고 때로는 바바리맨을 봤다고 소시지 같다고 벌벌 떠는 애도 있고 연애하는 아가씨들은 무서워하기도 했다. 세탁기 하나 없이 겨울에 빨래를 말리기가 어려워 밤이면 방안에다 빨랫줄을 치고 말려 입었다. 처녀들이 밥은 할 줄 몰라도 빨래는 잘했다. 밤이면 부엌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니까 주전자에다 몰래 라면을 끓여 먹고. 아침에는 사장 아주머니 목소리가 거칠게 야단을 친다. 아무리 말려도 다 지킬 수가 없었다. 

그 집엔 등나무가 큰 게 한 그루가 있어서 등나무 꽃이 보라색으로 아래로 늘어져 피면 그늘도 지고 향도 나고 참 아름다웠다. 꽃이 지고 나면 울타리콩 모양의 열매가 맺어 넉넉해도 보였다. 그 등꽃 아래다 연탄 난로르 피워 놓고 밀가루 풀을 조금씩 끓여서 수놓은 뒷면에 풀칠을 해주는데 풀을 끓일 때면 연탄 냄새가 나서 엄마는 등꽃에게 미안했다. 옷감은 주로 일본 상류층 여자들이 입는 옷감이라고 했다. 일본의 한복이나 마찬가지인 기모노, 하오리, 오비 이런 것들에 손으로 수를 놓은 옷이니 무척 비싼 옷감이라고 했다. 일하는 처녀들에게 떨어지는 돈은 적었지만. 

방을 얻어서 출퇴근을 하는데 주인집이랑 마루를 같이 쓰는 건넛방이었다. 직장과 가까운 데여서 밥은 안 해먹기로 하고 구한 방이었다. 그 집에는 쌍둥이 딸이 있었는데 한 애는 결혼을 하고 한 애는 결혼을 안 했다. 결혼 안 한 애는 다리를 저는 처녀였다. 둘 중에 남은 애가 언니라고 했다. 기가 많이 죽어 보이는 게 정말 불쌍했다. 누가 누구를 불쌍히 여기는지. 결혼한 애가 친정에 오면 집안이 시끌벅적 사람 사는 집 같았다. 시집 안 간 애는 더욱 기죽어 보였다. 그런 말이면 엄마도 덩달아 마음이 괴롭고 심란했다. 될 수 있으면 마루에 아무도 없는 틈을 타서 나오고 들어가고 했다. 

부모도 잘 사는 자식이 편하고 좋은 게 당연한 거지.

이런 말을 듣는 반 백수 우울증 환자 자식도 마음 한 구석이 뜨겁게 그슬린다. 

일하는 곳도 가까우니 출근을 하면 아침을 먹고 일을 시작하는데, 아침이면 아주머니가 불평을 해. 어젯밤에도 부엌을 엉망으로 해놨다 이거야. 어느 날은 점심시간에 밥을 먹고 거의 그대로 상이 널부러져 있길래 나도 화를 못 참고 큰 소리로 욕을 했더니 어떤 애는 벌벌 떨어. 어떻게 그런 욕을 하느냐고. 어떤 애들은 지금 치우면 되지 왜 그렇게까지 해야 하느냐는 식으로 떨떠름해가지고 있고. 과하게 화를 냈으니까 제 풀에 조용히 하기도 그래서 몇 번 더 소리를 지르고 참는 척을 해. 주인 아줌마 들으라고 더 소리를 지르기도 하고.

욕하고 소리지르는 엄마를 상상해 본다. 소리를 지르거나 아빠랑 싸우는 건 봤어도 욕은 절대 안 하는 엄마였는데. 계모라서 저런다고, 아니면 저러니까 두 번 결혼한다고 소리 들을까봐 욕을 그만둔 걸까. 

많은 일이 엄마에게 주어졌다. 전기 수도세 내는 일도 해야 하고 전기 수도 아껴 쓰라는 잔소리까지 해야 했다. 다 다른 사람들이 모여 사는데 조용할 리가 없다. 빨랫줄에 빨래를 밤에는 걷어 들이라고 해도 말을 안 듣고 아침에 빨랫줄에서 빨래가 없어졌다고 야단이 난다. 마당이 좁은 편이고 담이 낮으니 밖에서 발래를 걷어가는 일도 있었다. 처녀들이 많으니 총각들이 기웃거리고 술에 취해서 들어오는 애들도 있고 며칠 일하다 가는 애들도 있고 날마다 조용할 날이 없다. 

그분들 다 잘 살았으면 좋겠다... 열 몇살에서 스물 몇 살의 수 놓는 처녀들이 내 친구들처럼 느껴진다. 그래도 집 떠나 일도 하고. 이런저런 사정에 어쩔 수 없이 거기까지 몰렸을지 몰라도 대단하다, 용감하다 싶다. 

열이면 열가지 성격이고 사십 명이면 사십 가지 성격이야. 어떤 처녀애는 이 사람하고 결혼 약속을 해놓고 다른 사람이랑 결혼 날짜를 정했다고 먼저 결혼하려고 한 쪽에서 그 부모랑 총각이 여기 일하는 곳까지 찾아온 거야. 창피하기는 했는지 빨리 데리고 나가더니 다 정리했다면서 밤늦게 들어오더라고. 나중에 들으니까 뒤에 만난 사람하고 결혼했대. 나로서는 생각도 못할 일이지. 

양다리라... 엄청 훌륭한 일은 아니지만... 그분이 결혼한 남자가 더 좋은 남자였으면 좋겠다 싶을 뿐이다. 엄마나 잘 하세요... 아직 내 아빠를 만나기 전인 엄마에게 말해주고 싶다. 

그러다가 그 뒤로 또 한두 군데 옮기기도 하고 나도 방을 얻어서 자취도 해보고 하면서 일을 계속했지. 박대통령이 죽고 광주에 큰일이 나고 세상은 시끄럽지만 자기 할 일은 해야 살아가지. 일본에 수출하는 일도 점점 끝나는 때였어. 우리나라 임금이 오르고 일할 수 있는 사람이 부족해지니까 일본 사업자가 중국으로 눈을 돌렸다고 하더라고. 사무실을 수시로 들르니까 분위기가 언제부터인가 침울해지기 시작하더라고. 이때 야간 학교 다니는 학생이 한 명 있었는데 여러 가지 책임 짓고 하느라 나도 바쁜데 그 애가 4시에 학교에 가면 급한 마음에 부담이 되더라고. 그때 나도 학교에 가고 싶었지만 모든 게 불안한 상태였어. 그 애는 어리다는 게 무기도 됐겠지만 걔도 눈치를 보긴 봤지. 나는 여기서도 최선을 다해서 일하고. 큰집에 살 때도 헌신적으로 내 할 일은 다 했기 때문에 뭐 놀고 즐겁고 그런 일은 많지 않았어. 내가 해야 할 일은 책임질 수 있는 한 부지런히 하는 사람이었는데 그래서 내가 하고 싶은 건 다 놓쳐버린 거지. 이렇게 사는 건 나에게는 전적으로 보탬이 안 돼. 

나는 그렇게 열심히 사는 성격도 아니지만 도저히 엄마처럼 헌신하거나 열심히 일해서는 안되겠다는 결심마저 생긴다. 사실은 엄마 말을 듣기 전부터 그렇게 살아왔지만. 이 점은 아빠를 닮아서 다행이랄까. 무능한 대신 희생은 안 하기...?

오래 가지 않아 사무실 직원들부터 내보내고 남은 두세명의 직원은 다 사장의 시댁 친척들이었다. 끝내 몇 달은 엄마와 사장이 마무리했다. 수 놓는 처녀들도 갈 사람 가고 남은 사람만 엄마하고 일하기로 했다. 일할 사람이 없으니 자연히 수입이 적어지고 결국에는 회사를 접기로 하고 엄마에게 모든 집기나 남은 일할 수 있는 것들을 그대로 맡으라고 했다. 수를 놓을 수 있는 기술자들끼리 맡아서 일할 기회가 엄마에게 온 거다. 그래도 열심히 일을 해준 대가일까. 모든 집기들 재료들을 엄마에게 주면서 잘해보라고 했다. 그 사장한테는 일을 그만두면 별 볼 일 없는 물건들이지만 돈으로 계산하면 엄마에게는 그 정도 마련할 능력이 없었다. 사장님한테는 감사하다고 첫 번 달에 인사를 하러 갔다. 내가 결혼할 때도 그때 알았던 분들이 세 분이 찾아와 주셨다고.

일단 엄마가 일을 맡기로 하고 동생한테 부족한 돈을 빌려서 높은 곳 꼭대기에 큰 방을 구해서 엄마와 같이 하겠다는 아가씨들만 데리고 일을 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1983년에 엄마가 자수공장 주인이 된다. 수놓는 아가씨들 15명, 16명 정도를 맡아서 수를 놓는 기구며 재료를 모두 인수받아 큰 방을 구해야 했다. 나무로 된 네모난 수틀은 자리를 차지해 공간이 꽤 필요했다. 

엄마가 사장이 되다니. 멋있다. 내가 태어나기 전에 엄마는 사장도 했었구나. 그대로 일하다가 학교도 좀 다니고 그럴 것이지... 일은 그렇게 풀리지 않는다. 

어렵게 방을 구한 곳이 은평구 갈현동 박석고개 꼭대기였다. 부엌은 지하고 큰 방 두 개는 지상인데 처음 시작한 이곳이 얼마나 올라가는 길이 가파른지 겨울에는 썰매를 타도 될 곳이었다. 광주에서 동생이 놀러왔는데 이런 곳도 서울인가, 여기가 서울이라고 사는 거냐고 그렇게 물어봤다. 이런 곳이나마 엄마 힘으로 부족해 동생에게 빌린 돈도 이자 쳐서 다 갚으면서 마련한 곳인데 속이 상했지만 그저 너무 가파른 곳이라 그렇게 말했으려니. 버스에서 내려서 많이 걸어야 집에 도착하니 아가씨들도 힘들어했지만 그래도 말이라도 전에 사장과 일할 때보다 좋다고 해서 괜찮았다. 그때는 유선 전화만 있을 때였는데 감시하는 사람이 엄마 혼자인에 늘 밖으로 돌아다녀야 하니 가끔씩은 전화비가 많이 나와서 걱정이었다. 시외전화비도 따로 나오고 국제전화는 말할 것도 없었다. 사람이 여럿이면 염치없는 사람이 꼭 있게 마련이었다.

그렇게 나도 일을 하고 밥도 내가 하고 부지런히 하니까 월급 받는 것보다는 이익이 나더라고. 사무실에서 하청을 직접 받으니까 단계가 한 번 줄고. 일이 제법 잘 돼서 세금을 내는데 나 혼자만 먹고 사니까 세금을 많이 내야 한다고 해서 이모 앞으로 사업자를 했던 것 같아. 어느 날 세무서에서 나왔다고 직접 현장을 봐야 한다고 한 남자가 와서 방을 들여다보더니 좀 놀라는 표정으로 별 말 없이 가더라고. 생각보다 너무 별볼일 없이 하고 있어서 그랬는지. 

사업자 등록을 백합자수라고 했다. 엄마는 초록하고 깨끗한 흰색이 어우러지고 고개는 숙였지만 꽃잎은 나팔처럼 벌어져 크게 소리를 낼 것만 같은 이 꽃을 좋아했다. 향이 지나치게 진하기는 하지만. 

백합 자수라니. 백합 자수 사장님이었구나. 

그때는 전세 계약이 일 년이어서 일 년마다 방을 옮겨야 했어.

2년마다 옮기는 것도 지긋지긋한데 어떻게 1년 계약이었어?

그때는 그랬어. 그래서 높은 곳에 있기는 했지만 방이 넓어서 재계약을 할까 했거든. 그런데 바로 옆 작은 방에 나랑 동갑내기 주인집 딸이 이혼하고 애 하나를 데리고 살고 있었거든.

그때도 이혼 많이 했네. 맨날 신세한탄할 것도 없네.

그래도 이혼 안 하고 사는 사람이 더 많지.

그래서?

그 여자가 사업이 망해서 여기까지 왔다고 하더라고. 근데 나 혼자 아가씨들을 데리고 일하니까 이 여자가 나만 없으면 우리 아가씨들한테 와서 자꾸 시비를 걸고 싫은 소리를 하고 무시한다고 해. 그날도 회사 사무실에 가서 일거리를 들고 힘들게 고개를 넘어서 오니까 물을 많이 쓴다고 또 잔소리를 했다고 애들이 투덜거려. 그래서 며칠 뒤에 마음먹고 이모를 불러 놓고 그 딸하고 싸움을 한 거야. 잡았으면 경찰서 갈 셈 잡고 두들겨 패 줄 심산으로 막 쫓아다니니까 그 어머니가 사과하고 그 딸은 방으로 들어가서 문을 잠그고 안 나오지. 그렇게 싸움이 끝났는데 그러고 나니까 그 뒤로는 안 괴롭힌대. 그 여자도 이혼하고 친정에 와 있으니 화풀이를 하는 거고 나도 혼자 산다고 만만히 보는 것 같아 자존심이 상해서 더 악을 쓰고 했던 거지. 

나는 그 장면을 상상하며 조금 놀란다.

결국 조금 모은 돈을 합쳐서 교통도 더 낫고 더 아래 동네인 응암동으로 이사를 했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노처녀가 젊은 아가씨들을 데리고 일을 하니 무슨 돈이나 꽤 버는 것처럼 보이지만 엄마가 밥도 해 주고 살림도 하고 일감 가져다 주고 거의 모든 일을 다 하니 실상은 겨우 살아가며 조금씩 모으는 정도였다. 그때는 천만원 가지고 큰 방 하나 작은 방 하나 달아 낸 정도의 작은 부엌, 이렇게 구할 수 있었다. 방 두 개에 화장실이 따로 있는데 마루를 같이 쓰는 옆 방이 있었다. 그쪽 방이 두 개였고 시누이를 데리고 살며 빵집을 하는 여자가 살았다. 한 마루를 쓴다지만 늘 나가서 일하느라 마주치는 일이 별로 없었다. 엄마네는 항상 집에서 일하는 처녀들이 있고. 새로 가르칠만한 사람이 없어 한두 명 식구가 줄어든 상태였다.

이제 수 안 놓고 젊은 처녀들이 어디로 일하러 갔을까?

모르겠어 공장에 갔거나 그랬겠지.

큰 방에는 아가씨들이 수 놓느라 조용하고 엄마가 의지하는 가장 나이 많던 아가씨와 일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부엌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심상찮게 들려 문을 확 열었더니 머리를 빡빡 깍은 청년이 서 있었다. 누구냐 뭐냐 이게 소리를 지르니까 이제는 부엌문을 열고 도망을 가는 거다. 키가 작고 몸이 탄탄하고 앳되어 보이는 스물이나 되었을까 싶은 아이였는데 그때는 머리를 그렇게 짧게 깎지 않던 시절이라 아마 교도소 같은 곳에서 갓 나온 게 아니었을까 싶다. 엉겁결에 엄마도 집안에서 신던 털버선 바람으로 쫓아가보니 그 애는 횡단보도를 건너 멀뚱히 엄마를 쳐다보고 서 있었다. 엄마는 빨간불이 켜져서 못 건너기를 잘했는지도 모르겠다. 사차선 길이었는데 지금도 그 거리가 그대로 있다. 요즈음 같으면 있을 수 없는 일일까. 대낮에 그렇게 들어왔으면 흉기라도 가지고 있었을 수도 있는데. 그 아이는 길 건너에서 잠깐 엄마를 보고 서 있따가 그냥 유유히 아무 일 없는 것처럼 은평 세무서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엄마는 그제서야 정신을 차리고 보니 상당히 멀리 와 있었다. 버선바람인 것도 그때야 알았다. 

맨발로 길에 쫓아나가는 일이 또 있었구나...

처녀들이 여럿이 있다 보니까 옆에서들 다르게 보는 일도 있고 젊은 남자들이 기웃거리는 일도 많고 늘 마음이 불안하고 무섭고 그랬어. 그저 쫓아가 잡아야겠다는 생각이었던 것 같아. 평소에 시골서 살던대로 문단속을 잘 않는 버릇이 있었는데 그때부터 문단속을 철저히 했어. 행여나 우리 아가씨들이 피해를 당하면 어쩌나 걱정이 돼서.

시골도 치안이 막 좋은 건 아니지 않아? 그리고 잡으면 뭐 하려고. 너무 위험했다.

그땐 그런 생각이 안 들더라고. 그때는 세탁기도 없어서 빨래를 해서 널어 놓았다가 검고 빨갛고 노랗고 과자처럼 바삭바삭 빨래가 얼어. 그러면 밤이면 걷어다 방에 널고 어찌어찌 그렇게 산 거야. 먼저 일했던 사장 집에는 냉장고가 있었는데 나는 생선을 사면 씻어서 넣어 두어야 하는지 그냥 두어야 하는지 궁금할 때가 있었어. 나중에 냉장고도 늦게 겨우 마련했는데 냉장고를 샀던 그때가 인생에서 행복이랄까, 그나마 행복했던 순간 중 하나였던 것 같네.

내가 엄마 한탄을 듣다 지쳐서 엄마에게 행복하고 즐거운 기억은 뭐냐고 물었던 적이 있다. 그때도 한참을 생각하더니 처음으로 냉장고를 샀던 때라고 했다. 대답을 듣고 보니 나도 모르게 '너 낳았을 때지. 너 크는 거 볼 때지'라는 대답을 기대하고 있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서운했지만 그래도 엄마가 기뻤을 때가 있었다니 다행이고, 그게 냉장고를 샀던 때라니 겨우... 싶기도 하다. 

전에 수 놓으면서 책임자로 일하던 집에 고종조카라는 남자애가 일을 도와주었는데 거기서 수 놓던 처녀애랑 연애를 했어. 남자가 두 살 연하였는데. 나보다는 일곱 살인가 여덟 살 어린 청년이었는데 한 날은 나에게 외롭지 않으냐고 묻는 거야. 이게 무슨 소리야? 놀라서 승원씨 그런 말 하는 게 아니지요 이렇게 타이르듯 했는데 그래도 또 가끔 가끔 그런 티를 내. 그래서 사장한테 말하고 말았지. 그렇잖아도 그 아가씨 말고 다른 애랑도 연애해서, 말하자면 바람을 피웠다고 먼저 아가씨가 그 남자애를 나무라고 야단이 났고 그랬었거든. 남자애가 얼굴이 좀 괜찮게 생기기는 했었어. 보이는 게 그 집에서는 그 남자애가 유일하기도 했고 모두들 집에서만 일을 하니까 웬만한 밖에 세상은 구경하기가 쉽지가 않았거든. 한 달에 일요일도 두 번만 쉬고 아침 7시부터 저녁 7시인가 8시까지 일을 시키니 참 힘든 세상이었지. 그런데 사장이 되고 나니까 나도 또 그렇게 일을 시키게 되더라고. 그렇게 해서 돈이 조금 모아지고 나는 39살이 된 거야.

39살이라는 말에 나는 숨을 씁 들이쉰다. 엄마는 40에 결혼을 하고 나를 낳았다. 왜 그렇게 된 거야? 그냥 그 조금 모은 돈으로 다르게 살았더라면...! 하지만 일은 그렇게 되지 않은 게 분명했다 그 증거가 나니까. 



이전 15화 엄마-노동과 세시풍속, 음식들

브런치 로그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