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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노동과 세시풍속, 음식들

by 서한겸 Aug 09. 2024

할머니를 만나고 올 때마다 나는 크고 작은 충격에 휩싸였다. 농사... 일제강점기... 짚을 깔고 살고 애기들이 거기에 똥오줌 누면 치우고 그냥 거기서 먹고 자고...

엄마는 왜 그런 얘기 안 했어?

뭐 무슨 얘기.

농사짓고 그런 거.

하면 뭐 하냐 지겹기만 하지.

엄마도 새 보러 가고 그랬어?

새 보고 나락 까고 다 했지. 방아 찧고 밥하고 빨래하고, 야, 말도 못 해.

엄마나 할머니나 말도 못 한다는 말을 계속한다. 너무 말도 하기 싫어 보이고 너무 할 말이 많아 보인다. 그래도 내가 할머니한테까지 관심을 보이니까 엄마는 조금 더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제일 중요하게 맺힌 이야기는 또 나중까지 미루긴 했지만.

동쪽으로 넓은 들을 따라서 마을이 군데군데 있고 저 건너에도 동네들이 또 옹기종기 이어져 있어. 그 마을들 중에 우리 동네는 상당히 컸던 것 같아. 들 가운데로 보가 있고 물이 흐르고. 나 어렸을 때 수리조합이 생겨서 똘로 물을 대서 농사를 지었어. 들에서 동네로 들어서면 마을이 U자 형으로 돼 있어. 북쪽에는 남쪽 바라본 집 있고 남쪽에는 북쪽 바라본 집 있고. 마을 가운데는 텃논이 있어서 벼를 심었고 서쪽에도 또 집들이 막아서 전체적으로 소쿠리 모양이야.

엄마네 집은 남쪽을 바라보며 동네 한 중앙에 자리 잡고 있었다. 기와집이고 마을에 들어오는 큰길에 있고 그 동네에서는 좋은 집에 속했다. 그러면 뭐 하냐 딸들 학교도 안 보내놓고 싶지만 양지바른 집터였다고 한다. 그 주위로 거의 다 4촌, 6촌들이랑 일가친척들이 살았다. 바로 옆으로 첫째 할아버지 집, 그 아래로 셋째 작은 아버지 집, 엄마 집 아래로는 둘째 할아버지 집, 그 위로는 팔촌 당숙집, 또 그 위로 엄마네 할아버지와 막내 작은 아버지가 사는 집... 이런 식이다. 몇 집 건너 떨어진 곳에 타성이 사는데 마을 대부분이 같은 성이고 대여섯 집만 타성이라서 타성들이 말썽이라도 일으키면 이 동네에서 배겨 나지 못했다. 타성과 연애 사건이라도 터지면 당연히 타성이 동네에서 쫓겨나야 했다.

연애는 다 나빠? 그럼 서로 아무도 사귀면 안 되겠네 다 친척이니까? 아무도 연애를 안 해?

그때는 그랬어. 어디서 외지 소식 하나 들어오기 어려운 들골짜기 마을이어서 옛날 그대로 사는 게 제일로 생각하고. 거의 우리 아버지가 촌장처럼 그런 곳이었어. 우리 집은 정남향이고 사랑채 곳간채도 안채를 등지고 남쪽을 보고 있고. 봄이면 사랑 앞에 살구꽃도 피고 감꽃도 피면 장두감꽃은 크고 떫고, 작은 감꽃은 주워서 먹기도 하고 실에 꿰어서 목걸이를 만들어서 동생들한테 매 주기도 하고.

엄마의 동생들, 이모들, 삼촌의 어린 모습을 상상해 본다. 엄마가 꿴 감꽃 목걸이를 걸고 있는 어린아이들. 할아버지는 남한테는 잘했다. 물려받은 가산이 있던 그는 애들 데리고 살 집 없는 가족에게 집안 산에다 집을 지어주고 산을 지키며 살게 해 주고, 아편을 해서 전답 다 없애고 딸만 일곱인 집은 대나무밭 가까이에 집을 또 지어서 대밭 지키라고 살게 해 주고, 또 다른 산기슭에도 집을 지어서 집 없는 사람들에게 살게도 했다. 추석 명절에는 햅쌀로 차례 지내라고 제삿밥 지을 만큼씩 쌀을 나눠주기도 하고 남들에게는 두루 살피는 남자였다고. 들어 보면 부자 같다. 사람이 어리석기가... 딸은 전혀 귀하지도 중하지도 않다는 건가. 아니면 시대의 한계인가. 없어서 못 가르쳤다면 안타깝기나 하지, 이렇게 넉넉한데 딸이라고 학교를 안 보내다니.

그렇게 남한테 잘하고 인심 얻으면서 아들들은 신경 써서 공부를 가르치려 했다. 정작 아들들은 공부를 안 하려고 했지만. 소 팔아서 군대도 안 가게 하면서도 특히 후처의 큰딸인 우리 엄마한테는 더 엄하게 했다. 엄마가 말대답을 하거나 혹은 대답을 조금 늦게만 해도 버럭 화내고 무서운 욕을 했다. 저 눈깔을 손가락을 파버리겠다는 둥. 엄마는 새벽밥을 짓는 할머니를 따라 밥솥 국솥에 불 때는 게 일이었고 밥 짓기도 일찍 배웠다. 오빠가 결혼했을 때 엄마가 13살이었는데 이미 너무 일을 잘해서 시집온 올케가 보고 놀랬노라고 나중에 얘기했을 정도다. 할머니도 힘들고 마음 풀 데 없으니 엄마가 만만했겠지만 엄마라고 무슨 죄람. 학교 갈 때도 돼지 밥은 꼭 주고 가는 줄만 알았다. 올케도 은근히 엄마를 많이 시켜서 학교 다녀오면 집안일하느라 공부할 시간은 조금도 없었다고.

그 시절이라고 다 그랬던 건 아닌 게, 엄마 동네에서도 가르칠 사람들은 가르쳤다고 한다. 엄마 집 가는 길 오른쪽에 연방죽, 왼쪽 언덕에는 정각이 있었는데 동네에서 제일 부자인 먼 외가 친척 할아버지가 꾸며놓은 것이었다. 그 집은 다른 성씨 집안인데 엄마네 윤씨들이랑은 다른 세계에 사는 것처럼 일찍이 깨어서 자식들 공부시키는 데에 열심이었다. 공부도 잘하고. 그 집에 엄마 친구 종숙이 살았는데 종숙의 집은 기와집이고 샘도 있고 꽃이 많았다. 붉은 동백꽃이 뚝뚝 떨어지면 실에 꿰어 목걸이를 배꼽까지 내려오게 길게 해서 걸고 다녔다. 여름에는 수국도 피고 배롱나무도 화려하게 분홍 꽃을 피웠다. 배롱나무는 간지럼을 탄다고들 했다. 간지럼을 태우면 정말 흔들리는 것 같기도 했다. 이런 꽃나무들은 이 집에만 있었다. 이 친구집 위주로 모여 사는 사람들은 딸들도 학교에 보냈다. 이 집에 놀러 가면 앞마당이 북쪽이라 겨울에는 뒷마당에서 놀아야 했다. 겨울에 북풍이 불편 얼마나 추운지 이 집에 가면 마당에 들자마자 얼음이 천지였다. 차가운 겨울바람이 애아라 노아라 치맛자락이 춤춘다고 아주머니들이 입살 좋게 떠들기도 했다. 이 집에 살던 친구 종숙은 도시로 중학교에 갔다.

가을에 밤에... 달은 밝고 나락은 누렇게 익고. 바람이 살랑살랑 불면 벼이삭 부딪치는 소리가 슬프게 들려. 내 마음이 좋으면 고운 악기 소리로도 들렸겠지. 곡식들은 익어가지고 손길을 다 기다리고 있어. 콩 팥 녹두 동부. 겨울에 먹고 살 식량들, 벼들 다 서둘러야 해. 벼가 늦게 익어서 첫눈 올 때까지 못 거두면 낭패야. 가을걷이가 늦어서 나락이 다 떠버리면 쌀이 냄새도 나고 붉은색을 띠는데 그걸로 밥 해 먹고 살기도 해. 영양가가 없는 쌀이었겠지. 지금도 생각나는 게 1967년인가 8년인가, 가뭄이 심하게 들어서 농사를 지을 수가 없어. 모를 심을 수가 없어서 모가 모판에서 그대로 다 말라죽고 어쩌다 겨우 심어 놔도 다 햇볕에 타 죽어. 메밀을 심을래도 호미가 들어가지도 않아서 심지도 못하고. 이렇게 어려워지면 자기 논밭도 없이 품 들어 먹고사는 집은 더 살기 어려워지지. 오늘 품 팔러 오면 한 집에서 한 사람에 모든 식구들이 따라와서 밥을 먹어. 갈 때는 다음날 아침에 끓여 먹을 쌀을 바가지에다 받아가지고 옆구리에 끼고 어린 자식은 손을 잡고 간다. 그 쌀은 내일 품삯이 되는 거야. 그렇게 가면 퍽 서글펐어. 그렇게 살던 사람들이 이제 다 죽고 없다고 생각하면 허무해. 그렇게 품 팔고 살다가 겨울에는 가마니 짜고. 짚을 외상으로 사다가 가마니 짜서 팔아다 갚고. 또 그렇게 겨울 견디고 봄이면 또 품팔이하고. 각박하기 한이 없는데 그중에도 웃음도 있고 사랑도 있어서 자식들은 많이 낳아.

자식이 사랑의 결과라는 거야? 엄마는 전혀 아닌 것 같은데? 할아버지는 그냥 엄마랑 동생들 낳아 놓고 신경도 안 썼잖아! 이런 생각이 왈칵 들었지만 너무 가슴 아파서 말은 못했다.

겨울에 볏가리에서 고드름 따먹으면서 양지바른 곳에 앉아 놀던 때가 그리워. 달도 없는 겨울밤에는 관솔에 불을 붙여서 들고 골목을 다닐 때면 뭐가 그리 재밌고 뭐가 그리 우스웠는지. 밖에서 피운 관솔에도 콧구멍이 새까매져. 눈 오는 밤에 모여 놀면 이불 하나에 발만 넣고 둥그렇게 앉아서 가위바위보 해서 손목 맞기도 하고 화투놀이도 하는데 친구 하나가 그 아버지도 화투를 좋아해서 집안이 기울었는데 그 친구가 유난히 화투를 좋아하더라고. 언제인가 들리는 소문이 화투를 쳐서 집까지 없앴대.

시집갈 준비를 하려면 광목에 십자수 놓는 게 유행이었다. 베개 모에 동양자수도 놓고 처녀가 되면 남들도 하니까 엄마도 그저 따라서 했다. 사촌 언니하고 십자수를 놓다가 무슨 얘기를 했던지 웃음이 멈추지 않아 할아버지한테 야단을 맞기도 했다. 다 큰 딸애들이 뭔 짓이냐 그만 근처라. 이런 수놓기도 겨울에나 주로 하지 봄 여름 가을은 일이 많고 덥고 해서 이제 곧 시집갈 사람이 못다 하면 도와주는 정도다.

한 번은 올케 언니가 새벽에 샘에 가서 물을 길어 오더니, 어젯밤에 누구 댁에 닭을 족제비가 물어 갔대. 지난밤에 우리 사랑방에서 청년들이 닭서리를 해다가 구워 먹은 거 우리는 알고 있었거든. 그때는 설이를 하면 눈 감아주는 게 보통이었어. 메주도 해서 달아 놓으면 속을 파서 먹기도 하고. 된장이 늘 넉넉한 건 아니라서 아주 혼나기도 해 그러면. 청년들이 밤에 심심해서 몸이 꼬일 때 하는 짓이지 배도 고플 수도 있고. 화롯불에 고구마도 구워 먹고 무 구덩이에서 무도 파다 먹고 동치미도 겨울밤 간식으로 최고지. 그렇게 하다 어느새인가 닭 잡아가면 경찰에 고발하고 토끼 잡아가도 고발하고 하더니 지금 세상이 된 거야. 그때가 뭐냐 50년, 60년 전이니까 그때는 세상이 더디 변했어. 요즘은 너무 빨리 변해서 어지러운 것 같아.

나는 인터넷으로 '살아있는 닭 가격'을 검색한다. 9만 원도 있고 10만 원도 있다. 그걸 그냥 눈감아준다니 이해하기 어렵네. 그리고 새벽에 샘에서 길어온 물, 겨울에 볏짚에서 딴 고드름도 먹고. 뭔가... 웰빙인가. 동네 친구들끼리 모여서 손목 맞기라... 그런데 연애를 안 한다고? 그리고 맨날 한탄만 하더니 엄마도 꽤 좋은 기억도 있잖아, 하는데 엄마의 노동 이야기는 아주 꽤 많이 계속되었다. A4로 10장 분량이나 된다. 나는 무슨 민속학 사전을 읽는 느낌으로 듣는다. 엄마가 나를 늦게 낳기는 했어도 한 세대 차이인데 생활은 상상도 할 수 없이 다르다.

사랑방 하니까 사랑방 터줏대감 승용이 아재 생각이 나네. 아재지만 나이는 대여섯 살 위야. 이 아재가 뙈기를 칠 때면 참 멋있었어. 벼가 뜨물이 들면 새를 보러 가야 돼.

새를 관찰하러 가는 게 아니라 새들이 벼를 못 먹게 막으러 가는 거다. 할머니한테 들어서 알고 있던 얘기다.

해마다 이른 벼를 심는 논이 정해져 있어. 제사상에 올릴 밥을 지을 벼지. 새막을 지어 놓고 식구들이 번갈아가면서 새를 쫓아야 돼. 새들도 먹을 거를 찾아서 날아다니다가 넓은 들에 몇 군데에만 이른 벼가 있으니까 발견하고 거기로 몰려드는 거야. 작은 참새 떼가 한 번 지나가면 벼이삭이 하얗게 말라. 대나무 간짓대로 휘 휘 젓기도 하고 돌도 던지고 흙도 뭉쳐서 던지고 훠이 훠이 엄청 목청껏 소리도 지르고. 우리 논에 가기 전에 작은 할아버지네 논이 있는데 이 집 삼촌 승용이 아재가 뙈기를 딱 쳐서 새를 쫓으면 새들이 놀라서 멀리 날아가. 뙈기라는 게 짚을 머리 땋듯이 길게 땋아서 끝으로 갈수록 가늘어지게 돼야 돼. 그 끝에서 삼노끈을 달아서 머리 위로 서너 바퀴 휘휘 돌려서 땅에 딱 부딪치게 하는데 그러면 딱! 하고 총소리가 나. 이 승용이 아재가 이걸 아주 잘해. 이 삼촌은 작은 집 할머니 막내아들인데, 딸 하나에 아들 여섯 중에 막내, 사십 넘어 태어난 막내아들이야. 자식을 키우다 키우다 지친 사람처럼 이 삼촌은 그냥 우리 집 일꾼 머슴들이랑 있으면서 자라고 아주 우리 집 사랑방에 살아. 동네 무슨 설이 무슨 설이에 이 삼촌이 끼지 않는 데가 별로 없고.

이 아재가 서울로 일자리를 찾아 떠났는데 얼마 못 견디고 내려왔다. 그렇다고 시골에서도 부지런하지 못했다. 그때는 나이가 과년해지면 꼭 결혼을 했는데, 어렵게 부부로 맺어져서 자식도 낳고 살았는데 아짐이 자살했다는 소문이 소리끝을 흐리며 들리더니 몇 년 뒤에 아재도 그렇게 세상을 등졌다는 소리가 살짝 전해 왔다. 엄마로서는 귀를 씻고 싶은 소식이었다. 어릴 때 사랑도 못 받고 자기 집도 아닌 큰집 사랑방에서 자고 겨우 밥이나 집에서 먹는 둥 마는 둥 하다가 그리 가다니.

새막에 혼자 있으면 심심하기도 해서 나락을 까서 쌀을 만들어서, 하나씩 먹으면 별론데 모아서 먹으면 맛이 있어.

새가 벼 못 먹게 지키고 있으면서 엄마가 벼를 까먹어도 돼?

새들은 진짜 말도 못 해. 떼로 오면 어마어마해. 내가 까봤자 얼마 못 먹지. 한 움큼 쌀을 까려면 손톱이 한쪽이 닳아서 패여 들어가. 조개껍질이나 어디서 박카스 병이라도 하나 생기면 새막으로 가져가서 빠끔살이 혼자 하고 놀고 친구 데려가기도 하고. 네 군데 기둥을 세워서 중간에 칸 만들어서 사다리 몇 개 올라가 앉아 있으면 새막인데 거기선 멀리 들판이 보여. 나락들이 바람에 무슨 물결처럼 흔들리고 바람도 시원하고 나락잎 부딪치는 소리만 들리고 조용해. 점심때가 되면 교대로 동생들이나 아버지가 오면 새 보는 일은 오늘은 끝이야. 집으로 가는 길에 똘물에 발도 씻고 나락 모가지 하나 끊어서 까먹으면서 연방죽에서 연잎 하나 따서 머리에 쓰기도 하고. 연꽃이 피면 그 아련한 게 분홍색이 가슴을 애이도록 아름다워. 연방죽 가운데 섬처럼 배롱나무가 있는데 이 꽃이 세 번 피고 지면 쌀밥을 먹는다고들 했어.

쌀밥 중심의 삶인가... 벼가 중요 재산인데 집 밖에 내놓아 두었으니 지키는 데에 과연 온 식구가 투입될 만도 하다. 경쟁자는 참새라니. 벼도둑도 있었겠지.

갑자기 물레 생각이 나네. 물레에 미영을 자면 먼지가 얼마나 나는지, 코가 간지러워. 그 실을 한 꾸리 한 꾸리 만들어서 베를 짜서 옷을 해 입는데 모시베는 또 어떻고. 나무껍질을 벗겨서 한 올 한 올 가늘게 쪼개서 그걸 이어서 베를 짜서, 그걸로 또 옷을 해 입고.

그게 엄마 어릴 때 이야기야?

나무껍질을 벗겨서 옷을 만들다니 무슨 선사시대 이야기 같기 때문에 아득하고 비현실적이다. 가끔 '명인'이나 '장인' 프로그램에서 베 짜는 모습을 보긴 했어도... 그건 '전통문화'지 매일 입을 옷을 그렇게 만들었다고?

어, 베 잘 짜는 사람은 하루에 한 필을 짜기도 해. 한 필이면 옷 한 벌 만들 양이야. 한 올 한 올 짜서 스무자를 만들다니 그때도 나는 놀랐어. 나보다 2, 3살 위 사람들이 그 일을 하고 내 세대는 짜보지는 않고 미영 잣거나 모시는 삼아 봤지. 모시 삼으려면 오른쪽 무릎을 내놓아야 돼. 거기에 모시올 두 개를 대고 밀어 비벼서 잇고, 침을 발라서 바구니에 동그랗게 사려 담아. 그래서 모시 삼으려면 아무리 어려운 사람이 있어도 몸을 살짝 돌리고 앉아서 무릎을 훤히 내놓아야 돼.

뭐 남녀칠세 부동석이니 하면서 물 길러 밭 매러는 다 내보내고, 그럼 시아버지나 일꾼 있어도 무릎은 내놓고 모시 짜고 시킬 건 다 시켰네?

그렇지 뭐 할 건 해야지 어쩌냐. 모시 올에 풀칠하는 건 베를 맨다고 하는데 모시베는 매는 사람이 따로 사야 됐어. 뭘로 주든간에 품삯을 주고 사야 돼. 찬바람 불면 모시올이 딱딱해져서 부서지니까 이건 덮고 습도가 높아야만 돼서 여름밖에 못해.

별로 안심되지 않는다. 겨울에는 겨울 할 일이 가득이었겠지. 겨울 옷에 솜 넣어서 빨기, 솜 넣어서 짓기, 그런 거. 엄마는 이야기를 이어간다.

모시나무랑 삼나무랑 비슷한데 모싯잎은 깻잎 비슷하고 삼은 단풍잎 비슷하달까, 많이 달라. 둘 다 여름옷으로 좋지만 삼베는 죽음옷도 돼. 여름에 모시적삼 두 개가 등이 다 녹아 떨어지면 등을 파내고 새 모시 조각을 대서 입어. 그렇게 땀에 삭아서 없어지는 거야. 그것도 먹고살만해야지 입지 무명베도 어렵사리 입고 사는 사람이 더 많지. 무명베도 목화나무에서 목화꽃이 피고 지고 나면 열매가 익어서 퍼지고. 다시 목화가 꽃처럼 하얀 게 퍼져. 그걸 따다 씨 골라내고 활로 튕겨서 솜을 만들고... 수수깡 끝쪽을 막대로 만들어서 솜을 돌돌 말아서 길게 빼놓는 게 고친데, 그 고치를 물레에 잣는데 가락이라는 쇠꼬치에 실꾸리를 만들어서 한올씩을 분리를 해. 이거를 또 길게 한 필 스무 자씩 짜서 옷을 만들어 입고.

엄마 무슨 사전이야? 엄청 자세하게 기억하네. 그런 걸 다 알고 있으면서 나한테 안 가르쳐주고.

매일같이 하는 일이니까. 잊고 살았는데 얘기하려고 생각해 보니까 기억이 나더라고. 무명옷은 사철 입고. 이렇게 하다가 나중에 공장에서 광목이 나오기 시작하면서 물감을 들여서 옷을 만들어 입기 시작했지.

공장 생겼다고 옷을 파는 게 아니라 천부터 팔았구나.

그렇지. 그렇게 매일 천 짜고 옷 짓고 하면서 이것저것 해먹기도 하는데 고구마 줄기를 삶아서 된장 식초 넣고 마늘 깨 넣어 무치면 진짜 별미 중에 별미야. 그렇게 참을 해서 먹어 가면서 옷을 만들어 입고. 우리 아버지는 남들이 무명 잠뱅이도 감지덕지 입을 때 특별하고도 요염하게 하얗게 풀 먹여 다리미질한 모시옷을 입고 다니셨어.

(입고 다니시기는...!)

나는 우리 아버지는 일하면 안 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어. 어쩌다 장작을 패고 땀을 흘리시면 그렇게 마음이 아프고 불쌍해 보이더라고. 한 번은 니 큰 이모랑 아버지 흉을 보다가 그런 얘기를 했더니 이모가 화를 내더라고. 남의 다른 아빠들은 날마다 출근해서 돈 벌어다 식구들 먹여 살리는데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는 거야. 시골서도 남자들이 일을 많이 하지, 우리 아버지는 틀렸다 이거야. 우리들도 그렇고 엄마들은 쉴 새도 없이 땀에 절어서 일을 하는데 그럴 수는 없다는 거야. 나는 그때서야 아 그렇구나 싶더라고. 늘 그렇게 사시니까 나는 아버지 생활을 그렇게 받아들였던 것 같아.

할 말이 없다. 엄마는 고구마 무침 이야기를 하면서 입맛을 다시더니 여러 가지를 생각해 냈다. 여러 번에 걸쳐서 음식 이야기를 하는데 퍽 즐거워 보였다.

먹고사는 건 요즘 웰빙이라고 하지, 그때가 웰빙이었지. 밥도 거의 늘 잡곡으로 먹고. 그때는 흰쌀밥이 귀해서 그랬던 거지만. 풀도 직접 뜯어다 나물 해 먹고 신선하고. 맛은 그때가 더 있었던 것 같아. 큰 명절날이나 시제 모실 때는 집에서 돼지를 잡는데 동네 장정들이 모여서 이런 일들을 해. 돼지가 들어갈 만한 큰 그릇이 없으니까 땅에 구덩이를 파고 어느 집 돼지를 잡을지도 의논하고. 애들은 그저 뭣도 모르면서 어른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면 들떠서 같이 설치는 거야. 저리 비키라고 야단을 들어도 재밌기만 하고.

이야기를 듣는데 생생하고 장난이 아니다. 몇 집이 어울려서 오늘 잡을 돼지가 정해지면 뒷다리는 뒷다리끼리 앞다리는 앞다리끼리 새끼로 묶고 다시 앞뒷다리를 연결해서 묶는다. 통나무 가리장으로 걸어 메고 잡을 곳, 뜨거운 물을 끓이는 집으로 가져온다. 돼지는 발을 하늘로 매달린 채로 끌려오면 불쌍하고 무섭기도 하다.

사람처럼 징한 게 없지, 사람처럼 징한 게 없어 다 잡아먹고. 사람들이 돼지 들고 칼 들고 있으면 야만인같이 보이는데 그 고기가 또 얼마나 맛있는데.

으응... 직접 잡아먹는다고 야만인이면 뭐 정육점에서 사 먹으면 문명인인가. 그게 그거 아닌가?

끌려와서 잠시 후면 인간의 먹거리가 될 이 짐승은 동네서 제일 큰 칼로 멱을 딴다. 새빨간 피를 저배기에 받아서 어떤 남자들은 먹기도 했다. 아마 무슨 병이 든 사람이었을 거다. 그야말로 돼지 멱따는 소리가 몸이 쌀알처럼 되는 걸 참느라 귀를 막고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이제 구덩이에 짚을 깔고 가마니를 깔고 멱딴 돼지를 집어넣고 팔팔 끓인 물을 부어 주면 그 물이 깨끗할 수는 없다. 흙물이 묻는 고기를 다시 가마니 위에 건지고 남은 털을 잘 갈린 칼로 깎고 손질을 해서 부위 부위 나누고 돼지 값을 낼 형편이 안 돼서 여기에 참여하지 못한 집은 제사상에 올리라고 조금씩 나눠주기까지 한다. 막 잡은 돼지다리 하나를 큰 도마 위에 올려놓고 식구들끼리 생으로 먹는다. 된장과 마늘 풋고추도 있으면 더 맛있고 이렇게 먹고 싶은 만큼 먹는다. 아직 온기가 남아 있는 고기는 고소하고 맛이 좋았다. 어른들이 먹으니 아이들은 그저 따라서 먹은 게 생 돼지고기도 잘 먹게 되었다. 잡으면서 술까지 준비해 가지고 잡는 곳에서 맛있는 부분은 칼잡이 몫이었다. 내장도 남자들이 손질해서 주면 엄마들이 끓여서 그날부터 동네는 잔칫날이었다.

땅에 돼지를 묻어서 요리하는 걸 '걸어서 세계 속으로'에서 본 적이 있다. 무슨 미식 기행 같기도 하고, 생 돼지고기를 먹는다는 건 처음 들었는데, 동네에서 제일 큰 칼이라는 건 칼도 돌아가면서 쓴다는 건가? 어차피 다 친척들이라 이건가 온 마을이 한 집인가... 그 자리에서 돼지 피를 마시는 얘기에는 정신이 얼얼하다. 지금도 선지를 먹기는 하지만 그때는 항생제나 위생 관리가 어떻게 됐을까. 병자가 먹었다니, 그래서 더 오래 살았을까 해로웠을까 모르겠다.

엄마를 원망하기 위해서 아니 이해하기 위해서 이야기를 듣기 시작한 건데. 엄마는 시골 생활 이야기를 하기를 아주 좋아했다. 지긋지긋하다면서도 그립기도 하고 향수도 있어 보였다. 이걸 여기에 어느 정도 적어야 할까 고민되지만 일단 이야기해 보기로 한다. 엄마는 시골에 대한 방송을 즐겨 본다. 시골로 돌아가 살고 싶다는 이야기를 늘 하지만 집 문제도 있고 움직이기가 쉽지 않다. 막상 가도 허리와 무릎이 아파 상추라도 키워 먹고살 수 있을지 모르겠다. 병원도 많이 다녀야 하니 도시에 사는 게 편하고.

나 어려서는 그 시골 동네가 세상 다인 줄 알고 자랐지. 가을에는 밭에는 콩이 한참 열매를 키우느라 초록잎이 무성하고. 고추는 빨갛게 익으면 어서 따서 말려야 돼. 온통 햇볕에만 말려야 하니까 방에 불을 때어서 고추를 애벌 말리기를 해. 싱싱한 그대로 햇볕에 내놓으면 색이 날아가서 안 이쁘게 돼. 깨도 익어서 금방 쏟아지려고 하고. 깨는 말리면 봉선화 씨처럼 톡톡 튀어서 흩어지니까 아주 적당할 때 수확을 해야지만 돼. 논에는 또 벼가 자라고 논밭 사이 밭둑에는 늙은 호박이 이제 달아지려고 하고 있지. 이럴 때는 지금 생각해 보면 이루 말할 수 없이 풍요롭고 평화로운 느낌이 있어.

추석이 얼마 남지 않으면 모시잎 송편을 해야 한다. 흰 송편도 해야 하고. 들에는 곡식들 한창 자라고 이을 때라 농사일도 바쁠 때라서 일 다 마치고 달빛에 송편을 빚을 때는 온 식구들이 모여서 즐거운 마음으로 하지만 어른들은 피곤에 절어 졸기도 하면서 부지런히 마친다. 이 집 저 집 다 송편이 있지만 쌀이 없는 집은 밀가루 송편도 했다. 추석 무렵이면 곡식이 넉넉지 않은 철이었다. 해콩도 어중간하고 겨우 이른 콩 아직 덜 여문 걸 골라다 송편에 넣기도 하고, 깨를 넣은 송편이 맛있었다. 아침이면 또 일어나서 추석 차례 준비를 해야 한다. 아이들이야 마냥 들뜨고 즐겁기만 하다. 평소 못 먹던 과일이며 고기 생선에 송편 식혜. 맛있는 음식들이 있으니 배가 작아서 못 들어가게 먹고 즐겁다. 바쁘더라도 일주일 정해 놓고 쉬는 기간이다. 오랜만에 객지서 온 친구도 보고 이 집 저 집 다니며 그 집 음식도 먹어 본다.

사극이야?

거의 그렇지 뭐. 추석에는 그네를 타고 밤에는 달 아래 강강술래를 해.

(...)

강강술래도 아무데서나 하는 게 아니라 할 수 있는 집 마당이 정해져 있어. 밝은 달 아래 색색의 한복을 입고 둥글게 손에 손을 잡고 돌면 얼마나 재밌는지. 처음에는 발이 잘 안 맞다가도 여러 번 돌아가는 사이에 발이 딱딱 맞아. 한두 사람이 소리를 매기면 강강술래~하고 합창을 하는데, 소리 매기는 사람은 정해져 있어 목청 좋고 소리도 잘하는 사람. 끝쯤에는 한 곳에서 손을 놓으면 길게 한 줄이 되는데 한 사람이 가운데 서고 계속해서 빙글빙글 돌면서 크게 모아서 덕석말이라고 하고. 다시 돌면서 풀어주고. 이렇게 놀이를 끝내고 나면 얼마나 더운지 몸이 삼복더위 때처럼 땀에 젖어. 찬물로 목욕을 하려면 첫물은 춥지만 곧 참을만해지고. 담밑에나 울타리 아래서 목욕을 하는데, 평소에는 긴팔에 긴치마 입게 하면서 목욕은 한데에서 하게 그렇게 뒀다? 넘쳐나는 나무며 대나무며 어디에 쓰려고 그렇게 살게 했어. 목욕하고 다시 모이자고 약속을 해놨으니까 목욕을 하고 다시 우물가에 모여서 무슨 얘기가 그리도 많던지. 이런 명절날에는 어른들 눈치도 살피지 않아도 돼서 밤늦도록 놀아. 대나무 밭 옆에 밤나무 한 그루가 있었는데 그 밤을 따다가 제삿날마다 상에 올리고 나서 겨우 어쩌다 한 개씩 얻어먹으면 정말 맛이 있었어. 차례 지내고 대추 사과 배 같은 거를 사촌 육촌 줄줄이 서서 하나씩 받아서 손에 움켜쥐고 먹는 맛은, 진짜 일 년에 그날만 같아라 이거야.

(그놈의) 제사는... 꼭 지내야 하는 거야? 제사를 지내야 그 핑계로 맛있는 것도 해서 먹고 그러는 건가?

모르긴 몰라도 그때는 그렇게 제사가 중요해. 벼는 아직 설익어서 고개가 숙여질까 말까 할 때도 바람 불면 아직 살랑살랑은 아니고 못 이긴 척 흔들거리는 정도고. 시골에서는 일이 한창 많을 때야. 햅쌀로 메를 지어 올려야 하니까 종가댁에서는 벼 익기가 마음이 급해. 아침마다 논에 가서 벼를 살펴보는 거야. 근데 아직도 쌀이 되지가 않으니까 풋나락을 베어다가 찐쌀을 만들어가지고 선영에 햇곡식, 햅쌀로 메를 올려. 고구마 옥수수 참외 수박 다 햇것들로 장독에도 차리고 쌀독 위에도 차려 놓고. 햅쌀 못 만드는 집에는 메 지을 수 있게 그 집 제사 수에 맞춰서 찐쌀을 나눠 주고. 고추 익고 깨 익고 할 때는 수확을 기다리는 곡식들이 많아. 수수도 익고. 콩은 아직 설익었을 땐데 잎이 너무 무성해서 바람이 통하지 않으니까 사람이 지나가줘야 한다고 콩밭을 다니면서 이리저리 해쳐 주기도 하고. 추석날 입으려고 노랑 저고리에 빨간 분홍치마를 아침 이슬에 널었다가 다리미질해서 농 속에 넣어 두면 몇 번을 열어 보고 만져 보다가 추석날 아침에 너도 나도 차려입고 애들은 좋아라 들떠 있어.

저고리에 분홍치마... 이제 와서지만 한복을 입고 사는 거야?

한복이라고 해야 하나, 요즘 한복이라고 하는 거랑 조금 다르긴 한데 그런 식이지.

아침이슬에 널어서 다림질을 해... 누가 일만 대신해 주면 엄청 고급진 삶인 것 같아.

누가 대신해 주냐. 추석 쉬고 열흘 지나면 또 제사를 지내야 되는데 그 제사도 또 완전히 다시 새로 추석처럼 지내. 기제사는 저녁에 지내니까 아버지는 목욕재계하고 절을 올리고. 너무나도 정성을 다해서 모시기 때문에 여자들은 음식을 다 했어도 제사 지낼 때는 숨을 죽이고 한쪽에 모여서 기다렸다가 남자들이 제사 순서를 다 끝낼 때까지 기다렸다가 음식을 같이 먹어.

염병...? 이라는 말이 목까지 차오르지만 들을수록 뭔가 엄마가 사극에서 튀어나온 사람 같고 타입슬립물인가 싶고 드라마 <대장금>에서 본 수라간 나인의 엄중한 마음가짐 같기도 하고 그렇다.

집집마다 제사 지내는 법이 조금씩 달라서 제사 자랑은 않는 법이라고들 해. 우리 아버지가 오려 만든 용모양 문어발은 진짜 신비에 가깝도록 맛이 있어. 오려 놓은 모양도 아주 잘 만들어가지고 제기에 놓여 있으면 제상이 화려해져. 이렇게 잘 모시던 제사도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묘제로 하라고 하셨어. 아버지도 맡은 일이어서 책임을 다했지 자식한테는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았나 봐.

'용 모양 문어'라고 검색하니 '설날 차례상 건문어 용모양 만들기'라는 영상이 뜬다. 어떤 할아버지가 칼로 문어 다리를 깎아 모양을 내고 있다.

그럼 엄마도 추석빔 얻어 입었어?

그랬지. 근데 명절 되면 외지 나갔던 친구들도 고향으로 오는데 도시 물 든 친구들은 양장을 입고 구두도 신고 완전히 다른 세상을 살아. 나는 부러워는 하면서도 도시로 나가겠다는 말도 못 하고. 밤이면 모여서 뒷동산 묘도 있는 바로 옆에 발을 뻗고 어깨동무도 하고 앉아서 놀고 술래잡기도 하다가 보면 옷에 이슬이 젖어 축축해져. 푸른 잔디 푸른 들, 푸른 밭 다 파랗고 싱그럽고. 밤이면 달도 밝고 좋은 시절 좋을 때야. 친구들이랑 모여서 고구마 설이 감자 설이도 해서 사촌 언니네 집에 가서 쪄서 먹으면 나는 고구마가 훨씬 맛있는데 친구는 감자가 더 좋대.

친구는 감자가 더 좋대. 이 말을 듣는데 왠지 찡하다. 엄마가 지금 그 순간을 다시 살고 있는 게 느껴진다. 어린 여자애들이 몰려다니면서 까르르 웃고 작은 일에도 속닥이다 웃다 하는 게 보이고 들리는 것 같다. 그 친구들은 그 뒤로 어떻게들 살았을까.

한 번은 햇깨를 털어야 하는데 하필이면 추석쯤에 참깨가 익어. 엄마가 깨 털러 가자고 하면 친구들한테는 빨리 하고 올 테니 그때까지 놀고 있어야 된다고 뒷손을 흔들고 엄마를 따라가고 그랬지. 깨나무가 원망스러워. 그 작은 깨씨가 모여서 그릇에 담아지면 흐뭇하고 신기하기도 하고. 깨나무를 거꾸로 잡고 털면 작은 알갱이가 우수수수수 쏟아져서 바닥이 흰색으로 깔아져. 아주 작은 알갱이가. 깨나무 옆에는 콩 녹두 돈부 수수 고추... 먹고살아야 하는 곡식들이 아주 어서 먼저 자라야겠다고 야단법석을 하는 것 같이 있어.

돈부는 뭔지 잘 모르겠지만 깨나 콩 수수 고추는 나도 안다. 나도 먹고사는 것들이다. 지금도 누군가는 그것들을 키우고 수확하고 유통하고 있으니 나까지 먹는 거겠지. 너무 멀리서 일어나는 일이 되었지만. 멀어져서 좋은 건지 안 좋은 건지 잘 모르겠다. 일한 이야기를 들으면 지긋지긋할 것 같은데 엄마는 풍경화 그리듯이 세밀하게 떠올리며 이야기한다. 나는 들은 김에 더 기록해 두기로 한다.

추석 때는 일꾼까지 흰 광복으로 바지에 남방까지 해서 깨끗이 입게 해 주었다. 한가위만 같아라는 말이 진짜였다. 추석 때면 대단했다. 어지간히 바쁜 일은 미뤄 두고 모여서 송편 먹고 과일 식혜 평소에 잘 못해 먹던 맛있는 음식을 나눠 먹고 여기저기 모여서 윷도 하고. 특히 처녀랑 젊은 새댁들이 그네를 타고 논다. 남자들이 모여서 그넷줄을 엮어 매어 준다. 동네에 그네 매기 좋은 솔나무가 있었는데 그 밑으로 밭이 있어서 그네를 뛰면 곡식이 조금 상하게 돼 있었다. 그래도 밭주인이 이해를 해주었었다. 둘이서 마주하고 쌍으로 타는 그네는 더욱 재미있었다. 비슷하게 그네를 뛸 줄 아는 친구들끼리 하는 거라 서로 믿고 더욱 높이 뛰어올랐다.

이런 날이 지나고 가을 일들로 바쁘게 지내다 보면 또 설날이 다가온다. 그러면 또 한두 달 전부터 분주해진다. 엄마는 아이들 식구들 설빔도 장만해야 하고 어른들 옷도 신경 써야 한다. 제사상에 올릴 음식 재료를 장만하느라 오일장에 몇 번을 다닌다. 빠진 건 또 다음 장날, 또 다음 장날. 할머니는 홍어를 좋아해서 칼도 미리 사가지고 장에서 오는 길에 홍어를 갈라서 같이 간 분들과 나눠 먹기도 했다고 한다. 밤이면 호롱불에 바느질하고. 반짇고리는 항상 가득했다. 몸에 걸친 옷은 모두 다 풀을 맥여 다듬이하고 다리미질을 해야만 고와 보였다.

옷 이야기 듣는 게 특히 미칠 것 같아. 그걸 다 빨고 다시 짓고 하는데 곱기까지 해야 돼?

그래도 우리 집은 입성도 좋은 편이었지. 먹고살만하고.

일하고 산 거 들으면 별로 먹고살만한 것 같지도 않아 너무 힘들게 일해서.

다른 집은 더 못하게 살았지.

그 시절에도 미국 유학 가고 일본 유학 간 사람들도 있었을 걸...

그건 이제 진짜 다른 세상 얘기지.

설날은 흰 가래떡을 해서 정월 초하룻날에 떡국을 조상께 바치고 산 사람도 먹었다. 이 떡을 하려면 그 추운 섣달에 쌀을 불리고 가루를 내는데 방아를 찧어서 체에 쳐야 한다. 디딜방아는 곧게 자라다 가장이가 알맞게 갈라진 나무를 뿌리 쪽에 방아고를 박고 가장이 쪽에 네다섯이 서서 밟으면 올라가고 발을 떼면 내려쳐지는 거다.

그 방아 찧을 때 사람 심성이 다 드러나게 돼있어. 먼저 올라서면 힘이 드니까 다들 올라선 뒤에 슬쩍슬쩍 방아 찧는 흉내만 내는 사람이 있어. 세 분 작은 엄마 중에 둘째 작은 엄마가 그렇게 하셨는데 지금까지도 생각이 나는 거 봐라.

엄마도 조금은 그렇게 살지 그래?

그래 너는 그렇게 살아 그게 좋은 것도 같아. 우리 엄마는 확에 든 쌀을 방아가 들릴 때 얼른 손을 넣어서 휘저어 주고 채로 치고 아주 바쁘게 움직여. 생각해 보면 엄청 위험한 일인데. 이렇게 차례대로 떡가루를 시루에 쪄서 다시 방아에 쳐. 떡가루를 빻을 때는 돌고로 빻고 떡을 칠 때는 또 나무 고를 써야 돼. 큰집 떡부터 하는데 흰 가래떡을 쳐다가... 나무로 짠 아주 커다란 도마 같은 거 있어 떡판이라고 거기서 가래떡으로 길게 문질러서 말려서 썰어야 떡국거리로 돼.

나는 다시는 떡국을 먹고 싶지 않아 진다.

다들 쌀만 가져와서 떡까지 만들어서 집으로 가. 너무나 당연하게 그렇게들 사는 줄 알고 그렇게 산 거야. 또 설날이면 쑥떡을 꼭 하는데...

아아 그만... 웬일이야!

여름에 쑥을 캐서 말려 놓았다가 설 무렵에 삶아서 쌀가루랑 섞어서 뭉그리면 쑥떡이 돼. 쑥을 삶아서 쑥물을 빼느라 손에 쑥물이 들어서 그렇잖아도 거친 손이 발보다 더 거칠어져 완전히. 원숭이 손바닥처럼 돼.

원숭이도 그만큼 일하진 않을 것 같아.

마른 쑥이어서 삶는 것도 힘들고. 그렇게 하루 종일 떡을 찌니까 온돌이잖아, 방은 여름 못지않게 덥고. 그래도 새해 아침이면 다들 모여서 제사 지내고 해옷 입고 세배 하고. 일 년 사는 동안 좋은 일만 있기를 바라면서 들뜨기도 하지. 친구들끼리 이 집 저 집 모여서 다니면서 떡국을 먹다 보면 배가 부르다 못해 터질 것 같아.

그 그릇이랑 설거지는 누가 다 하는 거야?

그건 모르겠네 엄마들이 했겠지. 떡국거리로는 닭을 많이 썼어 우리는. 아버지나 오빠들이 닭을 잡아가지고 모가지를 비틀어 한참 동안 쥐고 있어야 닭이 죽어. 그때마다 꼭 아버지가 나를 데리고 닭 잡는 심부름을 시켜서 그런 꼴을 많이 봤어 내가. 너무 불쌍해 보여서 닭이 불쌍하다고 한 번은 말했더니 이놈의 새끼 그런 소리 하면 못쓴다고 얼마나 야단을 치던지. 닭을 털을 뜯고 짚불에 그을려서 잔털을 없애고. 그러는 동안 옹배기에 물을 떠다 놓고 짚을 깔고 도마칼을 준비해 놓는 잔심부름을 내가 해. 명절 때는 닭을 두 마리 정도 잡는데 손질한 닭은 방으로 가져와서, 이런 특별한 데만 쓰는 발 달린 큰 도마에다가 살을 다 발라. 그리고 닭뼈를 쪼아. 닭발은 곱게 다져서 참기름 소금에 찍어서 먹으면 진짜 맛있어.

어 그건 할머니 오실 때마다 먹었었잖아. 그거 못 먹은 지 오래됐네.

그게 90년대니까 몇 년 전이냐. 오래전이지.

그렇네 세월이 많이 지났네.

닭뼈를 처음에는 나무 깎는 짜구로 애벌 쪼고, 다음에 큰 식칼로 곱게 다져서 동글동글 완자를 만들고 짭짤한 우리 간장에 조려 주면 뼈에서 진득한 골이 나와서 그대로 뭉쳐 있는데, 지금 생각해도 그 닭뼈 맛은 잊을 수가 없어.

엄마는 시선을 멀리 하고 입맛을 다시는 것 같다.

겨울이면 밤에 골목이 어둡고 바닥은 구불구불하고 울퉁불퉁하지 길이 지금 같지 않지. 관솔에 불을 붙여 들고 친구 집에 모여서 뜨개질도 하고 수도 놓고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에 이런 것도 하고 동해물과 백두산이 노래도 있는데 팔을 엇갈리게 위아래로 올리고 내리면서 하는 건데 즐겁고 재밌었어. 화투를 치면 적게 딴 사람이 팔뚝을 맞아야 하는데 때리는 사람이 손가락에 입김을 불면 그렇게 긴장되는 거야. 외지에 나갔던 남자애들이 오는 명절 때는 그래봤자 다 일가친척이지만 서로 손목을 잡고 때리고 맞는 게 살짝 들뜨기도 하고.

그럴 줄 알았다. 그런데 일가친척이라니 위험하잖아.

그런 일도 있고 그랬겠지. 친척끼리 연애하고. <혼불>에도 나오잖아. 그러면 난리 나는 거야. 설날에는 눈도 참 많이 왔었다. 가을에 나락을 훑고 쌓아놓은 짚단 끄트머리에 고드름이 열리면 그걸 따먹는데 햇볕은 따뜻하고 기온은 춥고. 이렇게 하다 또 정월 대보름이 오면 잡곡밥을 보름날 전 저녁에 해 먹어. 보름날 아침에는 팥 넣고 찰밥을 해서 나물과 같이 먹고. 이 날은 그 귀한 김도 먹을 수 있는 날이야. 달집도 태우고 청년들은 이 동네 저 동네서 불장난도 하고 그러다 큰 싸움이 나기도 하는데 화해하고 술 한 동이 내면 그냥 지나가는 정도. 이렇게 정월 한 달이 가고. 2월 초하룻날은 하드렛날이라고 하는데 이제 잘 쉬었으니 일할 준비를 해야 하니 썩은 새끼로 목매달아 죽는 날이라고도 했어. 하드렛날에 콩이나 보리를 볶아서 먹으면서 농사 지을 때 벌레 없게 해달라고 비는 날이라고. 이렇게 또 정이월이 가고 삼월이 오면 마당 가로질러 걸쳐 놓은 빨랫줄에 제비가 날아와서 짹짹하는데 턱 밑에 검붉은 털 배는 희고 꼬리는 연미복처럼 생기고 머리털은 동백기름을 바른 듯이 기름이 흘러. 오죽하면 십팔 세 소녀를 제비초리 같다고 할까. 힘들여 애쓰고 쌍으로 날아와 지저귀는 소리는 청량한데 어디에 집 짓고 새끼를 까서 키울 건지 집주인에게 인사도 할 겸 아침 일찍부터 날아와서 지지배배 하는 것 같아. 보리도 필 준비로 풋풋한 향기를 내고 개나리 진달래도 분홍빛을 날리며 기웃기웃 눈 눈치를 보면서 이제 필까 저제 필까 하고. 마음 한복판에는 기쁨에 서러움에 싱거운 눈물이 나고. 넓은 들에는 아지랑이가 눈부시게 아른거리고. 종달새는 높이 떠서 작은 날개를 파닥이면서 위로 아래로 날아다니며 지저귀고. 총각 일꾼이 황소를 길들여 논갈이를 시작하고 주인집 딸은 일꾼한테 새참으로 막걸리를 가져다줘. 총각 일꾼도 주인집 딸도 내외를 하면서 서로 얼굴을 바로 보지 않는 것이 암묵적 법이야.

무슨 문학 작품을 읽는 기분으로 엄마의 이야기를 듣는다. 하지만 손은 나뭇가지 꺾고 마른 쑥 삶느라 바삭바삭 갈라진 느낌이다. 아주 고급진 전통 생활, 더 이상 먹어보기 힘든 귀한 음식들과 거의 문명 이전 것처럼 느껴지는 고된 노동이 한데 섞인 게 엄마의 유년시절이었나 싶다.

쑥 캐러 가면 친구 두셋이랑 같이 남의 밭고랑을 해집고 다니면서 쑥을 캐서 혼자만 알 수 있게 표시를 해놓고 거기다 구덩이를 파고 캔 쑥을 묻어 두는 거야. 바구니에서 시들면 양이 작아 보이니까 그렇게 해. 양이 많아 보여야 어른들한테 칭찬도 받고 보람도 있지. 달래 쑥부쟁이 냉이도 캐서 봄이면 나물로 먹을 만한 풀들이 먹고 남게 돋아나. 보리밭에서 나물 캐다 멀리서 밭주인이 소리 지르면 쫓겨나야 돼. 아직 설익어서 보리가 망가져서 씨앗을 못 맺게 돼. 보리대는 속이 비어서 벼보다 약하거든. 보리타작은 초여름에 하는데 보리 까시락이 얼마나 까러운지 땀하고 범벅이 돼가지고 몸에 붙으면 쐐기 쏘인 듯이 따가워. 쐐기 하니까 생각난 건데 쐐기벌레는 감나무에 붙어서 잘 자라는데 스치기만 해도 몸에 두드러기가 돋아. 식초 찌꺼기를 발라주면 쉽게 가라앉기는 하는데 애들은 놀라서 울면서 땀 뻘뻘 흘리고 소리 지르고. 그럴 때는 얼굴까지 빨갛게 달아오르게 눈물 콧물 손등으로 훔치고 달래주기 바라면서 눈치 보면서 더 울지. 옥수수도 삶아 먹고... 금방 따서 삶은 옥수수는 부드럽고 연한 게 요즘 어느 단맛에도 비할 수가 없어.

엄마의 생각은 이곳저곳을 더듬으며 묘사한다. 김유정의 <봄봄> 같기도 해서 찾아보니 <봄봄>은 배경이 1930년대인데... 엄마가 저렇게 산 건 50-60년대이고. 엄마는 또 찾아냈다는 듯이 이야기를 이어간다.

볏짚이 아주 많이 쓰였는데, 엄마들이 애기를 낳으려면 볏짚을 깔고 낳고. 여름에 애기가 태어나면 볏짚에서 벌레가 나오기도 하고 그랬어.

으악...

마당에는 작년 벼를 아직 못 털고 둥글게 쌓아 놓은 나락벼늘이 크게 쌓여 있고. 벼타작을 한 만큼은 가마니로 둥글게 둘러치고 담아놓은 어리통이 있어. 그 틈을 지나서 변소도 가야 되고 돼지 밥도 줘야 하는데 저녁 늦게 가려면 무서웠어. 변소에 가면 귀신이 붉은 만두가 좋냐 검은 만두가 좋냐 한다는 얘기를 친구들끼리 하던 때였어. 그렇게 볏짚을 쌓아 뒀다가 새끼 꼬아서 망태 덕석 가마니 짜고. 어디 묶는 데는 꼭 새끼가 필요할 때가 너무도 많아. 빨랫줄도 새끼로 치고. 볏짚이 얼마나 중하게 쓰였는지 한 해를 보내고 다시 볏짚이 나올 때까지 아껴 써야 하니까, 좋은 볏짚은 골라서 허청 시렁에 얹어 놔. 동네서 꼭 필요한 집에 나눠주기도 하고. 여름에 제삿날 있으면 볏짚을 태워서 콩나물도 길러야 하고 볏짚 재로 잿물 내려 비누로 쓰고.

... 으악...?

밥 빼고는 된장국이 밥상에 늘 주인공이야. 다른 반찬 없어도 된장국 한 그릇에 밥이면 지나가는 손님한테 내줄 수도 있었어. 여름에는 반찬이 정말 없어가지고 가지 오이가 반찬거리인데 더우니까 한 끼 먹기도 급하게 변질이 되어버려. 김치거리도 귀하고 있다 해도 금방 시어버려서 잘못 살피면 구더기도 생기고. 특히 젓갈에 구더기가 생기면 밥상에 올라서도 구더기가 나와서 기어다니기도 했어. 그때는 공식처럼 가지는 쪽파랑 섞어서 나물하고 오이는 냉국 초무침, 그렇게만 해서 먹었어. 논을 갈면 우렁이도 있고... 우렁이를 주워다 된장국에도 넣고 삶아서 알을 빼서 회로 먹기도 했는데 무슨 미원처럼 맛있어. 우렁이는 발도 없는데 잘 움직여. 더듬이 두 개 세우고. 알 낳고 나면 우렁이가 살이 작은 게 눈에 보여. 시골 살 때는 이런 게 다 눈에 보여. 탱자나무에 누애만큼 큰 벌레가 어느 날 보면 호랑나비가 되는 것도 보이고. 갈나무 잎이 다음 봄에 새잎 돋을 때 다 떨어지는 것도 보이고. 그래서 우리 시골에서는 살림을 갈나무처럼 해야 된다고 했어.

할아버지가 식초를 좋아하셔서 식초 넣는 음식을 많이 해 먹었는데 시금치도 젓갈에도 식초를 넣어 먹었다. 오징어는 순전히 회로만 먹는 줄 알고. 늘 부뚜막에 초 병이 세 개 네 개가 놓여 있었다. 그 초를 만들려면 막걸리를 만들어야 한다. 막걸리 거르기 전에 위에 맑은 청주를 떠서 식초병에 부어줘야 하기에 먹고살기에 겨운 집에서는 식초로 만들어 먹는 게 쉽지 않았고 조금만 소홀히 관리해도 초가 죽어서 썩어 버린다. 특히 비린 맛이 들어가면 초가 죽고 만다. 작은 엄마가 식초를 잘 죽이고 사촌 언니에게 그릇을 들려서 초를 얻으러 보내는 게 다반사였다.

잘 키워서 먹으라고 초를 앉혀 주면 얼마 가지 못하고 다시 그릇 들여보내는 그런 행동을 해. 그 언니랑 놀던 때가 그립네.

우와... 엄마도 식초 좋아하고 나도 식초 좋아하잖아. 나 할아버지 닮은 거네.

식초 이야기를 들으니 군침이 싹 돈다. 막걸리로 띄운 식초 정말 맛있겠다. 근데 지금까지 실컷 욕하던 할아버지를, 그 식성을 내가 너무나도 닮았기에 부아가 치밀 지경이다.

어 그리고 할머니도 날음식 좋아하시고 너도 회 육회 좋아하잖아. 신기하도록 닮았지. 아버지는 초 좋아하지, 엄마는 날음식 좋아하지, 당연히 우리 집은 회를 아주 잘 먹고 좋아해. 나는 그래서 다른 사람들도 다 식초를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어떤 사람은 식초 자체를 싫어해서 나 수놓는 일 할 때 어떤 애는 초 넣는 음식 하면 아예 밥을 따로 차려줘야 했어. 걔가 일을 잘해서 소홀히 할 수도 없고 신경 많이 써서 해줬지. 지금은 소식이 없네. 어디서 잘 살고 있어야지. 홍어도 좋아하고. 제상에 올릴 땐 쪄서 올리지만 생으로 먹는 걸 좋아했지. 홍어는 물로 씻는 게 아니라 깨끗이 닦아서 먹는데 한 마리를 펼쳐서 놓고 코 날개부터 다 먹고 나서 살 부분은 여러 가지로 조리를 해서 먹어. 미나리를 데쳐서 넣고 회로 묻힌 게 제일 맛있었어. 여름에는 풋고추도 넣고 무치면... 고추맛이 배인 홍어가 아주 맛이 좋았어. 아휴, 미나리광은 시궁창 같은 덴데 미나리를 베려면 거머리가 얼마나 많은지 다리에 수두룩이 붙어서 피를 뺏겨야 미나리를 먹을 수 있는 거야. 그것도 보통 거머리도 많지만 소거머리는 어른 검지만큼 큰 게 붙으면 잘 떼지지도 않아. 미끄럽고 고무풍선처럼 부푼 게 얼마나 찰싹 붙어서 피를 빨아먹는지, 보통 일꾼들이 들어가서 미나리를 베어야 돼. 고무장갑 고무장화도 없던 시절 얘기지. 어쩌다 물에 빠져서 거머리한테 물린 애들은 기절할만큼 놀라서 울고. 아이 힘으로는 떨어지지도 않아.

식초에 홍어에 나도 입맛을 다시다가 풍선만큼 부푼 거머리 이야기를 듣는다. 엄마의 이야기는 방심할 수가 없다.

내가 아주 할머니 할아버지 입맛을 똑 닮았구나... 할머니랑은 언제부터 서울에서 살게 된 거야?

내 기억이 있는 가장 어린 시절부터, 다섯 살인가 그 이전부터 할머니랑 가까이 살고 있었던 것 같다.

할머니랑 가까이 산 건 훨씬 나중 일이지. 할머니는 삼촌이랑 광주에 살았고 나는 이제 이혼하고 광주 집에 가 있다가 안되겠어서 서울로 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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