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나이에 호주로 이민 와서 첫 직장 생활을 하면서 한국과 바로 다르다고 생각했던 것이 있었다. 물론 랭귀지(언어)가 가장 큰 차이였지만 그것을 제외하고 나서 가장 크게 다르다고 생각했던 부분이 사람들이 여유가 있고 상대방을 잘 배려한다는 것이었다.
이민 오기 전에 온라인 커뮤니티를 통해 호주 사람들이 특히 느리고 여유가 많다는 것은 이미 잘 알고는 있었지만 실제로 내가 직접 경험해 보니 그 느낌이 달랐다. 그것도 사석인 장소가 아닌 치열한 직장 내에서 말이다.
처음 Product Manager가 된 후 팀장이 나에게 어떤 일을 맡겼다. 대충 뭘 해야 하는지 이해를 하고 나서 곧장 나는 언제까지 필요하냐고 물었다 (한국에서 그렇게 일했기 때문에). 팀장은 되려 웃으면서 나한테 당신이 얼마의 시간이 필요한지 생각해 보고 나한테 알려주면 된다고 얘기했었다. 설령 내가 그 필요한 시간이 지나도 일을 마무리하지 못하면 나의 능력을 의심하기 전에 우선 혹시 무슨 문제가 있는지 괜찮냐고 먼저 물어보았다. 그러면서 혹시 자신이 도와줄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편하게 말하라고 충고까지 덤으로 주었다.
한국에서 마감은 일하는 사람이나 주어진 환경에 상관없이 늘 미리 정해져 있었고 우리는 늘 그것에 맞추는 기계처럼 일을 해야만 했었다. 그러다 보니 야근은 기본이었고 주말도 일을 해야만 하는 경우가 너무 잦았다. 정말 인간의 최소한의 배려심은 없었다. 대학 졸업 후 90년대 초반에 우리나라 직장의 분위기는 대충 그렇게 비슷했고 그것이 나의 호주 이민의 결정적인 이유이기도 했다.
이야기가 약간은 다른 길로 빠진 것 같은데 아무튼 그렇게 Product Manager 일을 시작한 초반에 참 많은 배려와 지원들을 팀장뿐만 아니라 같이 일하는 동료들에게 많이 받았다. 덕분에 나중에 나도 시간이 지나서 시니어가 되고 새로운 직원들이 들어와서 내가 일을 시키는 입장이 되고 나서 나도 어느 순간에 내가 받았던 방식대로 일을 하고 있음을 느꼈다. 좀 천천히 가도 좋고 오늘 꼭 마무리가 안된다고 세상이 무너지거나 고객이 싫어서 돌아서서 계약을 파기할 일이 없다는 것을 알고 나서부터는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나도 늘 상대방의 일에 최대한의 배려와 그들의 노력에 감사함을 전달하려고 한다.
한국 드라마를 보면 회사 직원이 기획안을 마무리해서 상사에게 결제나 검토를 위해 보냈는데 그 기획안에 문제가 있거나 퀄리티가 좋지 않은 경우 담당자를 불러서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큰소리로 꾸짖거나 심하면 기획문서를 던지면서 다시 수정하라고 명령하는 장면이 나온다. 조금 오버된 부분도 있지만 어느 정도는 사실이었다 내가 한국에서 일할 당시만 해도. 그렇다 보니 한국에서 일할 때는 기획안을 팀장에게 보낼 때는 무척 긴장되었다. 아무리 꼼꼼하게 이것저것 확인하고 또 점검해도 사람인지라 실수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늘 "완벽함"을 원했다. 그것도 처음부터.
호주에서는 달랐다.
Product Manager가 되고 난 후 신규 제품에 대한 기획안을 만들었고 나 스스로 이 정도면 된 것 같아서 최종 업데이트 된 문서를 팀장에게 보냈다. 팀장이 며칠 후에 커피 타임을 갖자고 했다. 보내 준 문서를 잘 읽었다고 하면서 "well done"이라고 칭찬을 해주었다 (실제로는 기획문서의 반을 팀장이 수정해 주었다). 그러면서 한마디를 했다. 제품(product)은 혼자 만드는 것이 아니라 다 "같이" 만들어가는 과정이라고 했다. 너무 완벽함을 추구하려고 처음부터 얘 쓰지 말고 스트레스도 받지 말라고 했다. 간단한 드래프트 (draft)라도 준비되면 자기한테 보내면 된다고 오히려 그것이 더 좋은 방향이라고 설명을 덧붙였다. 드래프트는 미완성이 버전이기 때문에 기대치도 낮아서 오히려 자신도 검토하기 더 편하고 작성하는 사람도 부담이 덜 되지 않겠냐고 되려 나한테 물었다.
약 30분 정도의 그 티타임은 당시 그 어떤 강의보다도 나에게 좋은 자극이었다. 그 이후로 나는 기획문서를 작성할 때마다 늘 한 번에 모든 것을 완벽하게 하기보다는 여러 번의 드래프트를 통해 다듬어 가는 과정으로 마무리하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마치 계단을 올라가듯이.
호주는 새로운 직원이 입사를 하게 되면 "Induction" 프로그램을 받게 된다. 이 프로그램은 간단히 회사 빌딩의 화장실이 어디며 근처에 맛집까지 소개해준 매니저도 있었다. 그렇지만 이 프로그램의 핵심은 자신이 같이 일하게 될 사람들을 일일이 1:1 미팅을 통해서 만나서 인사도 하고 업무를 간단하게 소개받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것은 회사의 일하는 방식 혹은 문화를 공유한다. 회사마다 일하는 방식이 다르다는 것이 호주에서는 보편화되어 있고 그것들을 존중하고 배우는 것이 하나의 문화로 정착되어 있다. 시니어가 되고 나서 나도 새로 들어오는 직원들에게 이 프로그램을 통해 나의 일하는 방식을 설명하곤 하는데 제일 먼저 말하는 것이 있다. 바로 "Create a draft and build it together".
사실 드래프트를 만들고 계속 빌드업(build-up) 해 가는 프로세스가 처음부터 완벽한 것을 한 번에 만들어가려는 과정보다 상당히 효율적이다. 무엇보다도 일을 맡아서 하는 당사자에게 부담이 적다. 드래프트는 말 그대로 미완성의 작품이기 때문에 리뷰를 하는 이들도 부담 없이 피드백을 줄 수 있고 이런 여러 번의 드래프트 과정을 지나면서 그 과정에 참여한 모두가 다 무언가를 배우게 된다.
첫째 딸이 미국계 회사에서 마케터로 파트타임으로 일하고 있다. 대학에서 마지막 학기를 공부 중이라서 일주일에 이틀은 학교를 가고 3일은 회사에서 일을 한다. 첫째 녀석은 책임감이 강하다 그리고 완벽주의자다. 뭘 시키면 꼭 혼자 마무리를 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다. 그러다 보니 학교 숙제가 생기면 늘 시간을 끌고 끌고 끌다가 마지막에 늘 고생을 한다. 그 성격이 어딜 가겠나. 회사에서도 그런 느낌이다. 하루는 커피를 마시면서 우리 회사의 드래프트 일 방식을 설명해 주면서 한번 적용해 보라고 했다. 한참뒤 저녁을 먹다가 회사에서 드래프트를 여러 번에 걸쳐서 팀장하고 리뷰하고 만들어갔더니 팀장이 너무 좋아했다는 것이었다.
드래프트를 만든다고 해서 단추가 하나쯤 풀리거나 하는 느낌처럼 느슨하게 그리고 대충 아무렇게나 뭔가를 만든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해하지 말아야 한다. 단지 핵심 사항에 먼저 포커스를 두고 완성을 하고 나머지 덜 중요한 것은 미완성으로 둔다는 의미다. 그다음 드래프트에서는 다른 중요 포인트를 상세화 하고 그러면서 점점 그 영역을 넓혀가고 결국에 모든 것들이 다 완성되는 그런 과정이다.
우리말에 첫술에 배부를 수 없다고 했다.
나는 이 드래프트가 첫술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다. 드래프트를 통해 배부를 수 없다. 하지만 여러 번 과정을 거치다 보면 결국엔 배가 부를 수 있다. 하지만 한국 문화는 여전히 "빨리빨리" 문화가 존재하고 조금함으로 인해 첫술에도 배가 부르기를 늘 희망하면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중압감을 준다. 그런 문화에서는 결코 드래프트가 적용될 수 없다. 호주사람들은 참 느긋하다. 아마도 어릴 적 학교에서부터 그렇게 배우고 자란 덕분이라고 생각된다. 여유가 있다. 그래서 느리다. 그래도 세상은 잘 돌아간다. 당장 내일까지 안되면 지구가 멸망할 것 같이 야근하고 주말에도 일했던 그 시절이 참 원망스러울 때가 있다. 호주에 이민 와서 느림에서 일하다 보니 알겠더라. 느려도 지구는 망하지 않는구나를.
원포인트: 제품 기획에서 드래프트 잘 활용하기
1. 스토리를 짜라: 지난번 글에서 기획은 결국은 소통이라고 말했다. 사람들은 이야기(스토리)에 영감을 잘 받는다. 따라서 첫 드래프트는 스토리 텔링이 되어야 한다. 목차만 잘 잡아도 스토리 텔링이 될 수 있다
2. 숲을 먼저 그려라: 제품 기획에서 숲을 잘 그리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여기서 성공적이면 그다음은 고속도로처럼 빠르게 진행된다. 지난번 글에서 소개했던 것처럼 개인적으로 그림을 많이 활용하는 편이다.
3. 드래프트 주기를 잘 정해라: 드래프트라고 해서 너무 자주 업데이트를 해서 배포를 너무 자주 하면 피곤하다. 절절한 시간이 필요하다. 개인적으로 일주일에 한 번씩 그리고 최대 5회 내에서 마무리를 하는 것을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