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랫폼 기획자로 일을 하다 보면 늘 뭔가에 목마름을 느낀다. 다 된 것 같아도 다시 보면 뭔가가 부족하다고 느낀다. 그럴 때마다 다시 팀원들을 불러 모아서 나의 생각을 공유하고 다시 계획을 수정하거나 아니면 새로운 기능을 추가하곤 한다. 문제는 이런 목마름에 끝이 없다는 것이다. 그 이야기는 거꾸로 말하면 팀원들이 볼 때 내가 싫을 때가 많다는 것이다.
새로운 플랫품 기획을 맡아서 프로젝트를 시작하면 처음에 참 많은 꿈을 꾸게 된다. 그리고 플랫폼을 어떻게 만들어 갈지 최종 모습은 어떤 것으로 할 것인지에 대한 계획들로 늘 가득 차다. 하지만 그런 나의 꿈들과 계획들은 막상 엔지니어들과 회의를 하고 만들어 가는 협업을 시작하면서 조금씩 수정을 해야 하거나 또는 포기해야 하는 경우도 점점 늘어나게 된다. 현식과 이상의 괴리를 느끼는 순간이다. 어떤 것들은 인정하지만 그래도 어떤 경우는 포기할 수 없다.
몇 주마다 반복적으로 돌아오는 프로젝트 미팅은 말 그대로 총성 없는 전쟁터나 다름없다. 기획자는 원래의 기획 의도대로 왜 만들지 못하는지 질문하고 개발자들은 현실적인 한계와 기술적인 복잡성 등등 수많은 핑곗거리들을 나열한다. 적절한 시점에서 타협하지 못하면 결국 프로젝트가 멈추게 되기에 서로가 벼랑 끝까지 가는 토론은 가능한 하지 않는다.
막상 미팅이 잘 끝나고 했더라도 기획자들은 늘 뭔가에 목마름이 있다. 물음표가 다시 떠오른다. 내가 너무 많이 양보를 했나? 내가 더 몰아붙였어야 하는 것 아닌가? 나의 결정이 맞나? 뭔가 놓친 것은 없었나? 등등 수많은 생각들이 스쳐 지나가곤 한다. 만약 어떤 결정이 기술의 한계로 인해 내가 원하는 것을 양보하였다고 하면 기술이 먼저가 아니라 사용자가 우선이어야 하는데 혹시 내가 실수한 것 같아서 약간은 패배자 같은 느낌이 들 때도 있다.
그래서 혹시나 중요한 것을 내가 놓치기라도 하면 곧장 미팅을 다시 소집하고 다시 리뷰를 하게 된다. 결국 나의 실수로 인해 플랫폼이 원하는 형태로 완성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으로 인해 기획자들은 늘 불안하다. 그래서 가끔은 다 협의된 사항을 다시 불러오게 되는 경우도 있다. 이런 이유로 내가 늘 회의 시간에 습관처럼 입에 달고 하는 말들이 있다. "I just want to make sure......" 또는 "can I confirm......"
내가 입사를 할 때부터 친하게 지내는 개발자가 있다. 오래 같이 알고 지내는 사이라서 사석에서도 농담도 잘한다. 한 번은 같은 플랫폼 프로젝트에 참가해서 함께 일한 적이 있었다. 언젠가 그분이 프로젝트 회의가 끝나고 다 같이 커피타임을 하는데 갑자기 나에게 다가와서는 내 귀에 속삭이면서 말한 적이 있었다.
혹시 완벽주의자인가요?
물론 이건 순전히 나의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기획자들은 완벽주의에 빠지기 쉽다고 본다. 설령 본인이 그런 캐릭터가 아니더라 하더라도 환경에 의해서 그렇게 변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다. 아니 환경이 정말 중요하다. 어떤 환경에서 일을 하느냐에 따라서 완벽주의에 쉽게 빠질 수도 있다고 본다.
한국에서 외국계 컨설팅 회사에서 일할 때였다.
당시 업계에서 소문이 자자할 정도의 큰 규모의 컨설팅 프로젝트를 내가 일하던 회사가 수주를 받았고 그 프로젝트에 투입되었다. 규모가 워낙에 커서 외 내부적으로 관심이 엄청났고 그만큼 프로젝트에 일하는 사람들에게 스트레스도 엄청났다.
프로젝트가 지연되면서 나쁜 소문들이 돌았다. 누군가 총대를 메고 책임을 져야 한다고. 화가 난 고객은 수시로 내가 일하던 컨설팅회사의 임원에서 직접 전화를 걸어서 불평을 했다고 했다. "너네 회사 임원 당장 불러와. 지금 프로젝트가 이모양으로 흘러가는데 뭐 하는 거야!"라고 소리를 버럭버럭 지르는 일이 점점 많아졌다.
결국 우리 팀은 본사로부터 감사를 받게 되었고 모든 책임이 당시 프로젝트 총괄 매니저였던 시니어 부장에게로 돌아가면서 프로젝트 팀이 완전히 새로운 사람들로 교체되어 버렸다. 본사에서도 우리를 버렸다고 생각되었다. 처음 그 프로젝트를 수주할 때 파리처럼 달라붙어서 숟가락을 얻었던 그 많은 시니어 매니저들은 다 도망가고 결국은 실무를 맡았던 우리 팀이 다 모든 것들에 대한 책임을 지게 된 것이었다. 당시 그 충격은 엄청났고 그 일이 있고 나서 나는 일종의 트라우마가 생겨서 다른 프로젝트에 들어가서도 늘 책임질만 한 일은 회피하게 되었고 다른 사람들이 만들어주는 것들에 대해 의심이 생기는 버릇이 생겼으며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모든 일을 나 스스로 마무리하게 되었다. 스트레스는 그림자처럼 따라붙어 다녔으며 살아 있는 것이 다행이다 싶었다. 결국 퇴사를 했다.
호주에 이민을 와서 플랫폼 기획자가 되고 신규 플랫폼 기획을 시작하면서 나의 열정은 참 대단했다. 이민자로서 살아남기 위해서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호주에 와서 외국인들과 함께 일하면서 그들에게 뒤처지지 않기 위해서 더 많은 노력을 했던 것 같았다. 지난번 연재에서 말했던 것처럼 플랫폼 기획자는 리더십 일이다. 즉 팀을 이끌고 가야만 하는 숙명이 있다. 그러므로 인해 나는 처음부터 기획자로써 막중한 책임감을 많이 가졌던 것 같다. 내가 잘해야지 좋은 플랫폼이 만들어지고 내가 잘 못하거나 팀을 제대로 이끌지 못하면 실패한다고 믿었었다. 아마도 이것은 내가 한국에서 받은 많은 쓰라린 경험으로 인해 생긴 마음의 병들 때문이었을 련지도 모른다. 아무튼 그런 생각들로 인해 초기에 플랫폼 기획을 하는 동안 그 스트레스로 인해 거의 매일 온몸이 쑤시고 아프고 해서 물리치료를 거의 달고 살았다.
그러던 중에 마침 내가 기획했던 플랫폼 중의 하나에 심각한 문제가 생겼다. 완성이 거의 다 되어 가고 출시를 몇 달 안 남은 시점이었는데 갑자기 회사의 시니어 팀에서 제품에 대해 다시 처음부터 재고를 해야 한다는 피드백을 받았다. 그때까지 엄청난 예산을 쏟아부어가면서 만들었던 전략적인 플랫폼 개발이었기에 그 충격은 엄청났다. 나와 나의 보스는 쉽게 말해서 멘붕에 빠지게 되었고 나의 보스는 며칠을 시니어 팀들과 회의를 하면서 상황을 정리하는 일을 했다. 그 사이 플랫폼 개발은 중단되었고 나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순간적으로 이 회사에서의 플랫폼 기획은 여기 까지라는 직감을 느꼈다. 모든 책임은 처음부터 비전을 설정하고 기획하고 팀을 이끌어 갔던 나에게 모든 화살이 날아올 것이 불을 보듯 뻔했기 때문이었다. 순간 한국에서의 그 끔찍한 프로젝트가 떠오르기도 했었다.
며칠뒤 프로젝트 전체 미팅이 소집되었다. 시니어팀의 한분이 주관했다. 나와 나의 보스 그리고 개발자들 등등 그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모든 인원들이 다 첨석 했다. 비좁은 회의실에 앉은 사람도 있었고 서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회의실은 당연히 침묵이었고 아무도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순간적으로 한국에서 있었던 과거의 일들이 스쳐 지나갔다. 결국 여기까지인가?라는 생각이 들었던 적이었다. 시니어 매니저가 들어오고 회의는 시작되었다. 등에서 식은땀이 타고 내리는 것 같았다. 나의 얼굴은 이미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그런데 시니어 매니저의 첫마디는 대반전이었다.
그동안 고생했습니다. 당신들은 모두 최선을 다 했으며 당신들은 제대로 일을 했습니다. 우리는 시장과 고객들을 잘 몰랐고 그 부분에서 좀 놓친 것들이 많았습니다. 그것들은 우리 시니어팀에서 챙겼어야 하는 것들이었습니다.
순간 다들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기 바빴습니다. 뭔가 엄청난 질타와 피드백을 받을 것으로 예상했고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할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의외로 모든 책임은 시니어 팀에서 질 테니 당신들은 원래 자리로 돌아가 다시 일을 하면 된다고 했다. 그리고 그동안 고생했다는 말로 마무리를 했다.
다음날 프로젝트 팀 미팅을 했다. 마무리 차원의 마지막 회의였다. 특정 주제는 없었다. 그저 긴 여정의 마지막에 뭔가 다들 할 말들이 있을 것 같아서 모이자고 했다. 각자 자신들이 했던 실수나 시행착오를 인정하고 공유했고 다음에는 어떤 식으로 더 나아질 것이라는 말들을 했다. 그 어느 누구도 특정 사람의 잘못이나 책임을 따지지 않았다. 결국 그 플랫폼은 시장에 나가기도 전에 없었던 것으로 되었지만 모두에게 해피 엔딩이었고 적어도 배운 것이 많았던 사건이었다. 나는 아직도 인터뷰를 하면 이 사건을 나의 최대 실패 경험담으로 자신 있게 말하고 다닌다. 실패는 나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완벽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일이 있고 나서 참 많은 생각을 했었다. 한국이었으면 나는 이미 퇴사를 고민했을 법한 일이었다. 분명히 내가 놓치고 챙기지 못한 것들이 많았으며 그것들을 미리 보고하지 못한 것도 나의 커뮤니케이션 문제로 얘기할 수 있었다. 하지만 회사에서는 개인의 책임으로 몰아가지 않았고 시니어들의 책임으로 마무리되었다. 그 사건은 내가 호주에서 플랫폼 기획자를 성장하면서 중요한 터닝 포인트였다고도 할 수 있다.
그동안 기획자는 또는 PM은 무조건 완벽해야 하고 실수도 하면 안 된다는 나의 의식에 못 박혀 있던 그 불안감으로부터 해방되는 날이었기도 했다. 나의 완벽주의 추구는 나의 잘못이 아니라 어쩌면 한국에서 일하면서 받은 나의 그 주위의 환경으로 인해 생긴 마음의 병이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이후로는 설령 내가 실수하거나 잘못된 판단을 해서 플랫폼이 이상한 방향으로 만들어지게 되더라도 그건 오로지 나의 책임만은 아니다고 스스로를 위로하면서 다독여 주었다. 그만큼의 여유로 인해 좀 더 오유 연한 생각들을 하게 되었으며 결국 제품개발은 기획자 혼자가 아니라 "팀이 다 같이" 만들어가는 과정이라는 것을 경험하게 되었다.
사실 그 일이 있기 전에 나는 솔직히 완벽주의를 추구했다. 그러다 보니 참 많은 사람들과 충돌하고 나 스스로를 참 많이 몰아붙이며 평가에서도 여유롭지 못했다. 잘하면 좋았지만 조금만 못해도 나의 자존감이 바닥을 치곤 했다. 하지만 그 일이 있고 나서 기획자로서 나의 마음가짐이나 태도를 상당히 많이 바꾸었다.
그래도 여전히 나는 새로운 플랫폼을 기획하면 참 많은 질문들 던지고 돌다리를 몇 번이고 두드리고 또 두드리고 하는 습관들이 있다. 그래서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 조금은 더 피곤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완벽주의자라고 불리고 싶지는 않다. 그저 좀 더 꼼꼼하다는 말을 더 듣고 싶다.
원포인트 : 회사에서 완벽주의 병을 고치기 위한 몇 가지 처방
1. 실수를 인정해라: 가끔씩은 사람들이 다 모인 자리 나 이메일에서 자신의 실수나 잘못을 인정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특히 호주에서 회사 생활을 하면서 실수를 인정하고 사과하는 문화에 대해서 정말 열린 마음으로 받아 주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알았다. 실수를 했다고 해서 직원에게 불이익을 주거나 자르지는 않는다.
2. 도움을 요청해라: 혼자 다 완벽하게 하려고 하지 말고 팀원에게 요청하기를 권한다. 가령 팀전체 중간발표가 있다면 전체적인 요약만 기획자가 하고, 나머지 기술적인 요소들은 엔지니어들에게 발표를 부탁하고 마케팅 계획은 마케팅 담당자에게 의지하는 식으로 말이다. 나중에 팀원들로부터 더 좋은 반응을 받았던 기억이 있다. 그들도 미팅에 들어가서 그저 앉아서 듣기보다는 자신이 잘 아는 것들을 발표함으로 인해 더 충성심이 생긴다고 했다.
3. 절박함을 버려라: 이번이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보다는 이번이 아니면 다음에 또 다른 기회가 또 올 거라는 마음으로 일을 하는 것을 추천한다. 회사 생활은 대학 입시나 사법고시 시험처럼 한 번의 시험으로 결정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커리어는 쌓이는 것이지 한 번으로 점프되는 것이 결코 아니다라고 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