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규 제품에 대한 기획안이 준비되고 회사의 높으신 분(?)들의 검토가 끝난 후에 다 같이 "Go"를 외치면 공식적으로 제품 개발에 들어가게 된다. 그런데 이런 소문들은 참 빨리 퍼진다. 얼마가 지나지 않아서 회사 내부의 곳곳에 신규 제품에 대한 소문들이 쫙 퍼지고 웬만한 사람들은 다 알게 된다.
회사에서 어떤 방향으로 신규 투자를 하려고 하는지 또는 어떤 프로젝트가 주목을 받을지 등등에 대해 관심을 많이 가지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다. 조직에서 일하면 당연한 일이다. 그렇다고 주목받는 프로젝트가 항상 좋은 것만은 아니다. 특히 자신이 그것을 책임지고 있다면 말이다.
사실은 처음에는 남들에게 주목받고 많은 사람들이 물어보고 하는 것이 나쁘지 않았고 즐거웠다. 뭔가 회사에 굉장한 공헌을 하는 것 같기도 했고 무엇보다도 회사에서 중요한 일을 나한테 맡겼다는 것 자체가 기분을 좋게 들었다. 하지만 좋았던 건 처음 시작할 때 딱 며칠뿐이었다. 그다음부터는 말 그대로 폭풍 속으로 배를 움직여 나가는 기분이었다.
일 년에 회사에서 진행하는 플랫폼 기획 및 개발건은 많지만 그래도 전략적으로 집중하는 것이 반드시 하나 또는 두 개 정도 있다. 만약 그런 플랫폼 기획을 맡아서 진행하다 보면 참 말들이 많고 특히 여러 팀들에서 도전과 함께 은근슬쩍 발을 담가 보려고 하는 이들도 있고 마치 사방팔방이 지뢰밭 같은 느낌이 들 때가 많다.
다음 회에 연재할 내용이기는 하지만 미리 말하자면 기획자는 당연히 플랫폼 "사용자"의 목소리를 가장 중요하게 귀담아 들어야 한다. 그 외의 목소리들은 나무로 치면 그냥 잔가지에 불과하기 때문에 적당한 선에서 끊어 내거나 도려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잔가지 치기가 현실적으로 쉽지는 않다. 때로는 정치가 필요할 때도 있다.
예를 들면 개발팀에 가서 신규 플랫폼 개발에 대한 브리핑을 하고 난 후 기술적인 설계를 의뢰하면 얼마 안 가서 개발팀에서 자신들이 내부적으로 테스트한 신기술이 있는데 그것을 이번 신규 플랫폼 개발에 접목시켜서 진행하고 싶다고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개발팀은 늘 새로운 기술에 대한 목마름이 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닌데 가끔씩은 속으로 "굳이 왜 내가 하는 이 프로젝트에서...."라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또 테스트 팀에 가서 플랫폼 테스트를 의뢰를 하면 테스트 팀의 팀장은 이런저런 이유를 달아서 예상보다 많은 인력투입계획을 가져와서 승인해 달라고 한다. 이걸 또 그냥 받아들일 수 없기에 며칠 동안을 들여다 보고 밀땅을 해야 한다. 고객지원팀에 가서 신규 플랫폼이 론칭될 것을 대비해서 미리 제품 지원 프로세스를 의논하면 자신들의 현재 지원 프로세스에 신규 플랫폼이 맞지 않는다고 하면서 고객 지원을 수월하게 하기 위한 제3의 추가 솔루션을 요청하고 그것들이 제품 개발에 포함될 수 있게 해달라고 한다. 아니면 지원할 수 없다고 협박(?)하면서 말이다.
이미 회사의 전략 플랫폼으로 진행되면 예산의 규모가 크다는 것이 소문이 다 나버린 상황이라서 각 팀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그 프로젝트에서 뭔가를 뽑아 먹겠다는 식이다. 그들은 말로는 제품의 성공에 관심이 많다고는 하지만 실제로 그 플랫폼이 출시되고 우리의 고객들이 어떻게 사용하게 되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는 것이다. 잿밥에만 온통 신경을 쓴다.
이럴 때면 참 기획자로서 난감하다. 자칫 여기서 흔들리고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정말 배가 산으로 가버린다. 실제로 이런 상황들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고 정리하지 못해서 실패했던 플랫폼들이 나의 지난 간 경력에서 몇몇 있다. 지금도 그때의 일들을 떠올리고 복기를 해 보면 몇 가지 이해하지 못하는 일들이 있었다.
그중에서 몇 가지 치명적인 실수를 공유해 보려고 한다.
내부자에게 휘둘리지 말아야 한다.
호주에서도 대기업에는 상하관계가 분명히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커뮤니케이션에 큰 제약이 있거나 한국의 그것처럼 딱딱한 관계는 아니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실제로 호주 직원들은 아무리 높으신 임원이 뭐라고 해도 자신의 의견을 조금의 필터링이 없이 그대로 전달하는 경우를 종종 본다. 이민을 와서 초기에 호주 회사를 다닐 때 아직 나는 한국의 직장 문화에 익숙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래서 프로젝트 기획을 하다가 어느 임원이 이런 것이 어떤가? 아니면 저런 것도 생각해 보면 어떻까?라는 제안들에 대해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인 나머지 그것들이 꼭 반드시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한 나머지 아무런 고민 없이 그런 것들을 추가했던 적이 많았다. 그러데 그런 것들이 사용자들에게 좋은 반응을 주지 못했고 급기야 왜 그런 기능들을 추가했는지에 대한 내부 검토회의를 했는데 나는 당시 그 이유를 정확하게 설명하지 못해서 굉장히 난감했던 적이 많았다. 그 뒤로부터는 임원들의 피드백에 대해서는 무조건 수용보다는 충분히 제품의 방향성이나 사용자 경험에 일치하는지 검토 후에 받아들인다.
적어도 한 명은 차가운 심장을 가져야 한다.
원래 현재 회사는 기업 고객을 대상으로 서비스와 플랫폼을 기획하였다. 하지만 몇 해 전 사내 아이디어 대상으로 선정된 서비스를 검토 끝에 실제로 론칭하기로 결정하였는데 처음으로 일반인 사용자를 대상으로 한 모바일 서비스였다. 회사에서는 창사 이후 처음으로 만드는 플랫폼이고 서비스이다 보니 투자도 많았고 관심도 역시 대단했다. 나 역시 새로운 사용자 카테고리를 경험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기에 흥분되었다. 제작 과정에서 사내 중간발표뿐만 아니라 여러 팀으로부터 다양한 피드백을 들었으며 그러다 보니 마치 회사 직원들 전부가 기획 참여자가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정도로 들떠 있었고 나도 그랬다. 한마디로 정신이 없었고 정말 배가 산으로 가는 것을 느꼈다. 그러다가 서비스 론칭이 가까워졌는데 나는 중요한 것을 놓쳤다는 것을 알았다. 실수였다. 적어도 누군가는 미리 발견할 수 있었던 문제였다. 그리고 그 누군가가 나였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다. 모두가 앞만 보고 달릴 때 많은 이들이 이런저런 말들을 많이 할 때 최소한 한 사람은 차가운 심장을 가져야 배가 절대로 산으로 안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