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마지막 날에 "프로덕트 데모 데이(Product Demo Day)" 행사가 있었다. 데모 데이는 말하자면 애플이 매년 아이폰 신제품 출시 때면 사람들을 불러놓고 발표를 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보면 되는데 우리 회사는 가끔 이런 행사를 회사 내부 직원들을 대상으로 가진다.
이 행사는 특히 프로덕트 매니저들에게는 1년 중에 중요한 일중에 하나다. 자신이 현재 맡고 있는 제품이 업그레이드 됐거나 또는 완전히 새로운 신제품에 대해서 발표하는 순간이다. 주제가 이런 것이다 보니 아무리 회사 내부 행사라고는 하지만 그 행사에 참가하는 사람들 숫자가 제법 크다. 그래서 그만큼 발표자들의 부담감이 크다.
보통 데모 데이의 준비는 매년 1월에 시작한다. 행사 시간이 한정되어 있다 보니 특별히 선정된 제품(Product)들을 위주로 세션을 진행하곤 한다. 그것을 위해 몇 번의 준비 미팅을 하는데 올초 회의에서 다행히 내가 진행하고 있던 신규 제품이 제외되었다. 물론 좋은 기회이기는 하지만 아직 완벽하지 못한 것을 괜히 서둘러 소개를 했다가 데모를 하는 동안 문제가 생기면 실망을 줄 수 있기 때문에 속으로 다행이다 싶었다.
그런데 3월 초 갑자기 팀장이 불러서 진행 중인 신규 제품을 4월 말 데모 데이에 추가하고 싶다고 하면서 할 수 있겠는지 물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을 뿐 만 아니라 현실적으로 힘들 것 같다고 그 자리에서 바로 피드백을 주었다.
하지만 팀장은 포기하지 않고 미완성이라도 좋고 문제가 생기더라도 좋으니 무조건 이번 기회에 그 제품의 쇼케이스(showcase)를 하자고 밀어붙였다. 며칠만 시간을 달라고 했다. 왜냐면 프로젝트 팀이랑 의논을 좀 해봐야 할 것 같았다.
예상했던 대로 제품 개발팀에서 반발이 많았다. 일단 준비 기간이 너무 짧고, 아직 제품 개발 과정이 진행 중이라서 완성도도 떨어질 뿐 만 아니라 당장 휴가 일정이 이미 잡혀 있는 멤버들이 있다며 불평을 쏟아부었다. 하지만 몇 번의 설득과 조율을 통해 결국 신제품을 데모 데이에서 소개하기로 정했고 우리 팀은 그 무모한 도전을 받아들였다. 그때가 3월 초. 그러니까 데모 데이까지는 딱 2달이 남아 있었던 것이었다.
일단 목표가 설정되니까 개발 팀원들도 부산하게 움직였다. 어쩌면 그것이 제품 개발에 좋은 동기부여가 될 것 같다는 긍정적인 생각을 나와 팀장은 했었다. 그렇게 3월을 온통 데모 데이를 목표로 팀원 전체가 움직였다. 하지만 생각보다 진도가 나가지 못했고 3월 말이 다 됐지만 이런저런 문제점들이 너무 많았다.
어차피 최종 데모 발표자는 나다. 결국엔 내가 판단해야 했었다. 그래서 4월 4일. 데모 데이를 약 3주를 남겨 놓은 시점에서 1차 내부 리뷰를 하기로 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만약 그때까지 원하는 정도의 준비가 안될 경우 플랜 B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나의 플랜 B는 쇼케이스 포기였다.
드디어 4월 4일. 제품 개발 전체 팀원들, 팀장 그리고 몇몇 시니어 매니저들 포함해서 약 10명의 사람들이 모여서 1차 내부 리뷰를 했다. 예상대로 준비가 아직 덜 되었다. 아직 3주가 남았지만 중간에 공휴일 등등을 빼고 나면 겨우 2주 정도 남았는데 남아 있는 문제점을 보완하기에는 부족해 보였다. 스크린을 통해 실망한 표정들이 다 보였다. 다들 눈치를 채고 질문하기도 머뭇거렸다. 하지만 나는 피드백을 요청했고 모두가 숨죽이고 있을 때 팀장의 첫마디가 나왔다.
"지금까지 열심히 일해 준 것에 너무 감사합니다. 나는 오늘 결과를 보려고 온 것이 아니라 당신들이 여기까지 포기하지 않고 열정적으로 준비해 준 것에 감사하다고 말하고 싶어서 왔습니다. 제품은 사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보여줬어요. 아주 만족합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코멘트였다. 제품의 문제점에 대한 것에 대해서는 그 어떤 코멘트도 하지 않았고 그저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몇 번이고 반복한 후 피드백을 마무리했다. 그러자, 뒤 이어서 다른 시니어 매니저들도 "수고했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그리고 "잘했어요." 등등의 비슷한 격려를 하면서 회의는 마무리되었다.
미팅 후 곧바로 팀장에게서 전화가 왔다. 전화를 받자 말자 "어떻게 생각해?"라고 나에게 물었다. 나는 그 질문의 의미를 알았기에 바로 답변했다. "이 상태로는 데모 데이에 올리는 것은 무리일 것 같습니다."라고 솔직하게 말했다. 그런데 돌아온 팀장의 답변은 의외였다.
"완벽하게 준비된 것들만 올리는 곳이 무대(스테이지)는 아니지 않아? 뭐 좀 모자라고, 서툴고, 좀 틀리면 어때? 어차피 우리끼리 하는 행사이고 고객들이 없으니 괜찮아. 너무 걱정하지 마. 오늘 사실 생각보다는 더 좋던데? 짧은 기간에 그 정도 했으면 아주 잘한 거야. 좀 더 마무리해서 하면 될 것 같아."
순간 부정적인 생각만 가득했던 나 자신이 창피하게 다가왔다. 팀을 이끌고 있는 리드로서 나는 왜 팀원들이 준비해 온 그 과정들을 보지 못하고 결과만 놓고 그것을 판단하려고 했는지에 대해 반성했다.
다음날 팀원들을 다시 불러서 팀 미팅을 했다. 전날 리뷰에서 발생했던 문제점으로 인해 팀 분위기가 안 좋을 것이라는 나의 예상과는 달리 다들 기분이 좋아 보였고 오히려 좀 더 에너지를 느꼈다. 뭐지? 데모 준비에 부정적이던 팀원들조차도 갑자기 이런저런 아이디어를 공유하면서 더 적극적으로 나왔다.
미팅 후에 친한 시니어 개발자와 따로 이야기를 나눴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었다. 그의 말로는 전날 미팅에서 너무 많은 문제점들이 나와서 실망을 하고 있었는데 팀장이 그런 것들에 대한 언급은 없이 과정에 감사하다는 말로 칭찬해 줘서 동기 부여가 되었다고 했다.
4월 30일 데모 데이. 다행히 데모는 큰 문제없이 잘 진행되었고 칭찬과 좋은 피드백을 받았다. 향후 계획에 대한 관심 어린 조언들도 받아서 말 그대로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되었다.
데모 데이를 마무리하고 나서 문득 한국에서 일할 때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 수없이 많은 프로젝트를 할 때마다 늘 "발표"에 압박을 많이 받았다 그리고 그것들은 엄청난 스트레스였다. 한 번도 기분 좋게 또는 가벼운 마음으로 한 적이 없었다. 왜 그랬을까? 돌이켜 보면 우리는 늘 너무 "완벽함"을 추구했던 것 같다. 부족하거나 미완성된 것은 감히 용서받을 수 없는 그런 살벌한 경쟁 사회에서 살았던 것 같다.
완벽하지 않으면 아예 무대에 올라가지 못했다. 그것은 어른이 되고서부터가 아니라 초등학교 아니 유치원을 다닐 때부터였는지도 모른다. 아주 어릴 적부터 우리는 무대는 오로지 뭔가를 아주 잘하는 상위 1%들만의 차지라고 생각하면서 자랐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렇게 뽑히고 완벽하게 준비를 해서 막상 무대에 올라가더라도 끝나고 나면 듣는 피드백은 늘 잘못된 점이나 개선해야 할 것에 대한 지적으로 시작되었다. 한 번도 준비 과정에 대한 칭찬이나 그런 노력과 열정에 대한 감사의 말은 없었다.
잘못된 것들을 바로바로 지적해서 빨리 개선하고 다시 수정된 제품을 시장에 출시하는 것만이 최고의 미덕이라고 생각했던 시절이었다. 그 과정에 참여했던 참여자들의 수고와 힘든 고민과 스트레스에 대한 감사함은 늘 뒷전이었다.
지난주 팀장의 말처럼 무대는 꼭 완벽하게 준비된 자만 올라갈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조금 부족하더라도 괜찮고 누구라도 올라갈 수 있는 곳이어야 한다. 무대는 평등한 곳이어야 한다.
솔직히 팀장의 그 말을 듣고 나서 부담스러웠던 모든 것들이 내 어깨 위에서 내려온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감사하다는 그 말이 한참 동안 울림으로 남아 있었다. 동시에 늘 팀원들에게 결과만으로 평가하고 딱딱하게 비전이 어쩌고 최신 기술 동향이 어쩌고 저쩌고 하는 설명만으로 동기부여를 주려고만 했었던 나의 속 좁은 마음에 후회가 밀려왔으며 깊이 반성하게 되었다.
뭐 조금 부족하면 어때? 그렇다고 인생이 끝나거나 세상이 무너지거나 하지 않는다. 부족한 것은 다시 보강하면 되는 것이고 더 중요한 것은 그걸 해보고 고민하고 노력했던 그 과정이 더 빛나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것에 대한 감사는 마음속에만 가지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표현해야만 한다는 것을 느낀 일주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