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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화동 같은 친구이자 동료

by BM

그를 처음 본 것은 6년 전쯤이었다.


여느 날처럼 아침에 출근해서 내 책상에 앉았서 서둘러 컴퓨터를 켜서 이메일을 체크하고 있는데 갑자기 인기척이 느껴져서 보니 못 보던 사람이 내 옆에서 서 있었다.


새로 온 직원이라고 자기소개를 하면서 반갑게 인사를 했다.


깔끔한 검은색 양복 그리고 그 안에 하얀색 와이셔츠에 검은색 넥타이와 검은색 구두의 누가 봐도 평범한 직장인 차림이었다. 장발은 아니었지만 호주 사람들에 비하면 장발에 가까운 까만색의 숯이 많아 보이는 그는 한눈에 봐도 전형적인 아시아인이었다.


안녕하세요, 히로유키 신도입니다. 그냥 히로(Hiro)라고 불러주세요.

그 순간 바로 일본인이구나. 자신의 일본 이름을 이야기하면서 부르기 쉬운 닉네임을 권하는 그의 얼굴이 꽤나 정겨워 보였다. 그것이 그의 첫인상이었다. 당시 회사에는 일본인이 전혀 없었다. 그래서 왠지 가깝게 느껴졌었다. 아무튼 잠깐의 자기소개를 끝내고 그 친구는 다른 동료들 자리로 이동해서 인사를 했고 나는 다시 업무에 돌아왔다.


다음날 아침 출근. 나의 자리는 그 친구의 책상을 반드시 지나가야 하는 것이라 "굿모닝"이라고 인사를 했다. 그 친구도 반가운 미소를 지으며 "굿모닝"으로 답을 했다. 컴퓨터를 켜서 로그인을 한 후 업무를 시작할까 할 찰나에 히로가 내 자리에 와서 같이 커피 한잔 하자고 했다.


마침 커피가 생각났었고 어차피 혼자 갈 생각이었기에 흔쾌히 같이 가자고 하면서 내가 자주 가는 커피숍으로 안내했다. 사무실을 나와서 커피숍으로 가는 길은 5분 정도 걸어야 하는 거리인데 같이 걸으면서 개인적인 것들을 부담스럽지 않은 범위 내에서 이것저것 물었다. 결혼은 했지만 주재원으로 2년 정도 혼자 시드니에 지내게 됐다고 했다. 지낼 집을 구했냐고 했더니 알고 보니 나와 같은 동네 주민이었다. 주문한 커피를 들고 다시 사무실로 들어오는 길에서도 뭐 이것저것 시시콜콜한 호주 이야기를 했던 기억이 난다.


그 뒤로 히로와 나는 자연스럽게 모닝커피를 같이 마시는 동료가 되었다. 커피는 그와 나의 공통분모였다. 그는 늘 일찍 출근하는 편이었는데, 내가 아침에 출근하기를 기다렸다가 같이 커피를 마시러 가주는 배려를 보여주었다. 우리 사이가 가까워진 것에는 그 모닝커피의 루틴이 많은 역할을 해 주었다. 그 짧은 시간에 그 친구는 새로운 도시에서의 일상들을 공유하였다. 월요일에는 주말에 어디 어디를 갔다 왔으며 나 보고도 가보라고 공유해 주었고 주중에는 특별한 것이 없어도 늘 소소한 뉴스나 정보들을 공유했으며 금요일에는 신나는 주말 계획을 말하기도 했었다.


사실 그 친구가 오기 전에 나는 늘 혼자 모닝커피를 사서 얼른 자리로 돌아와서 일을 시작하는 것이 루틴이었다. 입사 초기에는 팀 사람들끼리 다 같이 모닝커피를 마시러 나가곤 했는데 언젠가부터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것들이 없어지고 다들 각자 자신들의 커피를 마셨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그 친구와의 아침 커피는 늘 기분을 좋게 만들었다.


히로는 한국인의 “정” 문화에 대해서도 비슷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 친구로부터 정을 느꼈다. 가끔씩 짧은 일본 방문을 다녀오면 늘 사무실에 있는 직원들에게 조그마한 선물들을 돌렸다. 아주 작은 초콜릿 봉지를 들고 전 직원들 자리를 돌아다니면서 나눠주는 모습을 보고 새삼스럽게 한국인의 정을 느꼈다. 호주 사람들이 절대로 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한 번은 히로가 일본에 다녀오면서 일본 위스키를 사가지고 왔다고 하면서 자신의 집에 와서 같이 마시자고 했다. 그렇게 해서 나를 포함해서 당시 같이 친하게 지내던 두 명의 다른 동료를 자신의 아파트에 초대해서 음식도 요리하고 그 위스키를 마셨는데, 일본에서 위스키를 만든다는 것을 그때 처음으로 알았다. 위스키는 서구 문화라고만 생각했었다. 그 뒤로 몇 번을 더 히로가 위스키를 가져와서 좋은 시간들을 보냈던 기억이 난다.


히로는 나하고만 친했던 것은 아니었다. 어느새 회사 내에서 그를 모르는 직원이 없을 정도로 그의 친화력은 대단했었다. 가령 내가 전혀 모르던 동료를 그는 엘리베이터에서 인사를 하고 농담을 하길래 그가 누구냐고 물었더니 우연히 알게 되었는데 좋은 사람이라고 말했다. 내가 알던 그 표준의 일본인들이랑은 조금 다른 듯 보였다.


2년의 시간은 금방 지나갔다. 히로가 다시 일본으로 돌아간다고 이메일 날아왔고 송별회에 나를 초대하였다. 그의 송별회는 어마 어마 했다. 너무 많은 직원들이 와서 마치 식당을 우리가 전세 낸듯해 보였다. 한 번이라도 그와 같이 커피를 마셨거나 밥을 먹었던 사람들은 다 와서 그의 일본 귀환을 아쉬워하면서 그를 송별해 주었다.




그렇게 히로는 떠났고 그는 그 이 후로 별다른 연락이 없었다. 초반에 몇 번 사내 이메일로 어떻게 지내는지 왔다 갔다 한 것 빼고는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의 기억은 마치 담배 연기처럼 사라져 갔고 시드니 사무실에 있던 직원들과 나는 점점 히로를 기억 속에서 지워가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2년 전 이메일 한통을 받았다. 바로 그 히로였다.

다시 시드니 사무실로 발령을 받아서 가게 되었다면서 다시 볼 수 있기를 기대하고 있다면서 연락이 온 것이었다. 그러자 나의 머릿속은 다시 몇 년 전에 끝났던 그에 대한 기억들을 다시 찾기 시작했고 내심 옛 친구를 다시 만날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으로 설레기도 했다.


하지만 다시 돌아온 히로는 예전과는 좀 달랐다. 웃는 얼굴에 친화적인 행동과 말들은 여전히 그대로였지만 약간은 힘이 없어 보였다. 다시 돌아온 그는 예전과는 달리 늘 일에 바쁘고 스케줄도 여유가 없어서 내가 감히 끼어들어갈 틈이 안보였다. 다시 그가 오면 시작할 것이라고 기대했던 모닝커피도 좀처럼 같이 하기가 힘들었다.


예전과 더 달라진 것은 또 하나가 더 있었다. 이번에는 가족과 동반해서 시드니로 왔다고 했다. 그동안 히로는 아내와의 사이에 이쁜 딸이 생겼고 아내도 시드니에서 살고 싶어서 같이 왔다고 했다. 자연스럽게 나와 회사의 동료들 보다는 가족이 더 우선순위가 될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아직 아이가 어리고 그리고 아내도 시드니가 처음이라서 초기에 적응하느라 히로는 매일매일 퇴근을 일찍 했으며 재택근무도 자주 했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예전처럼 같이 만나거나 어울릴 수 있는 기회들이 없었다. 나름 기대를 좀 하고 있었던 나는 살짝 실망을 했지만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이해했다.


그래도 그 와중에 히로는 나를 가끔씩 찾았다. 나 외에 다른 중국인 동료가 있었는데 세 명이 같이 가끔씩 저녁을 먹곤 했었다. 매일 아침 커피를 마시던 때와는 달리 가끔씩 만나다 보니 서로 그동안 어떻게 지내는지 등등할 이야기들이 참 많았다. 히로는 늘 어린 딸에 대해서 말을 많이 했다. 차일드 케어에 등록하고 딸을 아침마다 등원하고 또 오후 되면 하원하는 것까지 등등 때로는 불평을 그러다가도 또 그런 일상이 재미있고 즐겁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기회가 된다면 가족들이랑 시드니에 좀 더 오랫동안 살고 싶다고 말했다.


하지만 히로와의 만남은 예전처럼 그렇게 자주 되지는 못했다. 그의 생활은 에전에 처음 시드니에 왔을 때와는 다른 환경이었고 나도 그때와는 다른 위치에서 일을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었다. 그래도 간간이 들려오는 그의 소식들을 보면서 그저 잘 지내고 있구나라고 속으로 응원해 주곤 했었다.



나이 50이 넘어서면 자주 만나는 지인이나 친구의 수가 눈에 띄게 확 줄어들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가 나의 에너지 부족이라고 생각한다.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선한 마음만 가지고는 힘들다. 그건 당연히 가져야 하는 것이고 더 필요한 것은 상대방과 어떻게 하던지 연결되어야 하는 이벤트가 있어야 한다. 가령 밥을 같이 먹거나 커피를 마시거나 그것도 아니면 같은 취미를 공유하는 것들이 될 수 있다.


그런데 50 대 들어서면서 현저히 내 몸과 특히 마음의 에너지 레벨이 점점 떨어짐을 느낀다. 혹자는 그건 그냥 자기를 정당화하기 위한 핑계라고 할 수 있지만 아마도 대부분 나와 같은 세대를 살고 있는 분들은 나의 이 느낌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으리라고 감히 상상해 본다.


인간관계의 변화를 컴퓨터 공학적으로 비유를 하자면 '멀티 스레드 (Multi-thread)'로 비유할 수 있겠다 싶다. 공학적으로 멀티 스레드는 병렬 처리 즉, 여러 일들을 동시에 처리하기 위한 기법으로 사용되는 것을 말하는데 각각의 스레드는 정의된 이벤트에 의해서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하고 또는 계속 기다리기도 한다. 말하자면 인간관계 각각을 스레드에 비유해 보자.


인간관계가 많아서 바쁠 때는 마치 멀티 스레드가 동작되어서 동시 다발적으로 이벤트가 발생되고 각각 독립적 일들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아무런 이벤트가 없으면 그 동시 다발적으로 동작되던 스레드들도 “비활성(Inactive)” 모드로 잠시 조용하다가 영영 이벤트가 발생되지 않으면 스레드가 죽게 된다. 죽은 스레드는 미래에 다시 새로운 이벤트로 다시 살아날 수 있지만 그것은 극히 수동적인 이벤트일 경우가 대부분이다.


요즘의 나의 인간관계가 바로 수동적인 이벤트로 잠시 동작되었다가 다시 사라지는 것으로 비유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렇게 죽어 있었던 스레드가 최근 살아났는데 그것은 한 친구로부터 최근에 연락을 받았기 때문이다. 바로 히로였다. 지난달 갑자기 날아온 메신저의 문자는 나의 눈을 의심하게 만들었다.


짧은 문자의 시작은 이랬다.

“나 다음 주면 호주를 영영 떠나게 되었어.”

그러면서 가기 전에 꼭 나를 한번 만나 보고 싶다고 연락을 한 것이었다. 약속 시간과 장소를 정하고 전화를 끊고 나서 한동안 나의 그 친구와의 스레드는 여전히 메모리를 검색하고 그리고 뭔가를 프로세싱 중이었다. 즉, 생각이 많았다는 것이다. 그것은 예상치 못한 이벤트였다.


며칠 전 히로와 마지막 저녁을 같이 친하게 지내던 중국인 동료와 그가 예약한 일본 식당에서 함께 했다. 식당으로 가는 길에 기차 안에서 문득 그와의 추억들이 떠올랐다. 그러면서 김광석의 노래 중에서 "혜화동"이라는 노래가 생각나서 그 노래를 가는 내내 듣고 갔다. 히로는 회사에서 만난 친한 직장 동료였지만 혜화동 노래의 가사처럼 오랜 친구 같은 느낌이 더 든다.


오늘은 잊고 지내던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네 내일이면 멀리 떠나간다고....

히로의 얼굴은 생각보다 밝아 보였다. 늘 그랬듯이 웃으면서 우리를 반겼다. 앉자마자 그가 말을 시작했다. 꼭 만나고 가고 싶었다고 했다. 어쩌면 이젠 다시 시드니에 못 올 것 같다고 했다. 요즘 같은 인터넷 세상에 물리적으로 다른 나라에 살아도 언제든지 소통이 가능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마치 군대 가는 친구처럼 시드니를 떠나는 것에 진한 아쉬움을 드러냈다.


그러면서 나와의 인연에 대해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매일 마셨던 모닝커피가 생각 날 것 같다고 하면서 그 시간들이 시드니에 있는 동안 가장 기억에 많이 남을 것 같다고 했다. 뭐 특별한 것도 아니었는데 참 많은 의미를 부여하는 것 같아서 왜 그랬는지 물어봤다.


아침마다 네가 나한테 “오늘 하루 어때?” 그리고 “다 괜찮은 거지? “라고 물었던 것이 당시 혼자서 시드니에 살면서 힘이 되었는지 모른다.라고 했다. 우리는 그가 늘 곁에 사람들이 많았고 웃고 즐겁게 잘 살고 있다고 생각했었지만 실상 그는 나름대로 새로운 환경에서 힘들었던 모양이었다.


그날 저녁 우리의 대화는 끝이 없어 보였다. 그는 부쩍 자란 딸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했고 영어 한마디도 못하던 딸이 이제는 너무 잘하고 아내도 호주 생활에 잘 적응하고 있었는데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서 너무 아쉽다고 했다. 자신은 여전히 호주에서의 삶이 더 좋고 솔직히 다시 돌아가고 싶지는 않지만 어쩔 수 없다고 했다.


히로는 역시 승진해서 돌아가는 것이 맞았다. 회사에서 새로 인수합병한 회사에서 중요한 자리를 오퍼 받고 돌아가는 것 같아 보였다. 그래서 좋은 점도 있고 나쁜 점도 있다고 굳이 우리를 위로해 주었다.


그날 저녁 그 일본식당에서 히로는 일본 정통 요리들을 정성스럽게 주문해 주었고 그동안의 만남에 감사해하며 계속 연락하고 지내고 싶다고 그리고 혹시 일본에 여행 오게 되면 꼭 연락하라고 신상 당부를 하고 마무리를 했다.


우리는 때로는 작은 것들에 감동을 받고 또는 영감을 받은 경우가 많다. 특히 힘든 시간을 지나고 있거나 또는 나이가 들어서 외롭거나 그럴 경우에 더 그렇다. 그 친구는 나의 그 두 마디에 매일 에너지를 받았고 혼자서 외롭게 힘든 주재원 생활을 잘할 수 있었다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고맙다고.


히로를 보내고 돌아오는 길에 또 생각이 났다. 더 이상 이벤트가 안 결려서 죽어 있는 나의 지난 인간관계들을 한 번씩 챙겨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혹시 아직도 연락하고 싶은 사람들이 있으면 그냥 카톡으로 “잘 지내지? “ 아니면 “ 별일 없는 거지”라고 툭 던지고 싶다.


일본 친구를 떠나보냈다. 하지만 한동안 그가 좀 그리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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