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회사에서 오랜 기간 동안 근무를 하다 보면 자신과 코드가 잘 맞는 동료가 생기곤 한다. 이런 사람들과 같은 프로젝트에서 일을 하면 힘든 일도 술술 잘 풀리는 것이 사실이다. 서로가 각자의 장정을 잘 알고 무엇보다도 그것들을 인정하기 때문에 말하자면 윈-윈 (win-win) 전략처럼 서로가 서로를 더 원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나도 지난 30년 가까운 직장 경력 기간 동안 수많은 동료들을 만났는데 그런 사람들이 몇몇 있었다. 그런 사람들은 막상 회사를 떠나도 한동안 기억에 남고 다시 같은 일을 또 하고 싶은 열정이 스물스물 올라올 때가 있다.
지금 다니는 호주 회사도 올해로 벌써 15년째다. 이렇게 길게 한 회사를 다닐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가끔씩 내가 어떻게 이렇게 한 회사에 오래 일을 할 수 있었을까 질문을 던지곤 한다. 명쾌한 정답은 없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코드가 잘 맞는 동료들이 많았다.
그들은 나의 태생에 대한 헤리티지를 이해해 주었고 각자의 일에 대한 존경심을 늘 표현해 주었으며 심지어는 힘든 일이 생길 때마다 조건 없이 도와주었다. 그런 것들이 나를 지금껏 여기 이 한 회사에 머물게 했던 것 같다.
솔직히 말하면 중간중간 이직을 하고 싶은 생각들이 많았다. 연봉을 더 올리고 싶은 욕심에 그리고 좀 더 네임 밸류가 있는 글로벌 회사로 옮기로 싶은 현실적인 욕심에 이직할 생각이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결국 마지막에 나의 선택은 늘 지금 내가 있는 곳이었다.
15년쯤 한 회사에서 같은 일을 쭉 하다 보니 2-3명쯤 일명 코드가 맞는 동료들이 생겼다. 그리고 그중의 한 명과 최근에 작은 해프닝이 있어서 오늘은 그 내용으로 글을 쓰려고 이렇게 전주가 길었다.
이야기 전개를 위해 그를 실명 대신 그냥 A라고 부르겠다.
참고로 A는 회사에서 아키텍트 (Architect, 플랫폼 설계자)로 일한다. 나처럼 이민자이며 스포츠를 좋아하는 것도 나와 비슷하다. 지난 10년간 우리는 참 많은 서비스 플랫폼을 같이 만들었다. 회사의 역사를 같이 쓰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그 과정에서 쉬웠던 적도 있었지만 어렵고 힘든 과제들이 더 많았다. 플랫폼의 전체적인 사업성과 큰 그림을 그리고 계획을 세우는 나에게는 플랫폼 설계자가 정말 중요한 동반자다. 그가 없다면 절대로 내가 꿈꾸는 플랫폼을 구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각자의 생각과 전문성을 공유하면서 여러 프로젝트에서 같이 하곤 해 왔다. 그렇게 긴 시간을 일을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서로에게 훌륭한 파트너가 되었다.
물론 중간중간 의견 충돌 (Technical fighting)이 전혀 없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은 관계로 일을 해 올 수 있었던 이유에는 크게 2가지가 있었다. 첫째는 바로 자신의 전문성을 침해하지 않고 존중해 주는 것이었고 두 번째 이유는 신뢰였다. 그리고 그중에서 굳이 더 중요한 것을 뽑자면 첫 번째였다.
그러다가 최근에 사건이 있었다.
작년 연말 3년 가까이 잘 가꾸어 왔던 제품(product)을 고민 끝에 다른 프로덕트 매니저에게 넘기고 새로운 도전을 선택했다. 긴 장고의 끝에 결정한 일이었다. 그냥 그 제품에 머물러 있으면 몸도 마음도 편해질 수도 있었다. 힘들고 어려웠던 것 다 지나가고 이제는 그 제품에 정착하고 싶은 생각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팀장이 불러서 새로운 제품 기획을 맡아서 해 볼 생각이 없냐고 문득 물었다. 팀장도 지난 3년 동안 내가 얼마나 고생을 해서 지금까지 왔는지 잘 알기에 선뜻 권하지는 않았고 전적으로 나의 판단에 맡기겠다고 했다.
긴 생각의 끝에 마지막이라는 맘으로 또 도전을 한 번 더 해 보기로 했다. 대신 조건을 걸었다. 내가 원하는 사람들로 팀을 만들 수 있도록 해 달라고 요청했고 팀장은 흔쾌히 수락을 했다. 당연히 A는 나의 팀 로스터에 최상단에 있었다.
프로젝트가 시작되고 역시 예상대로 힘들었다. 예상했던 것보다 더 힘든 도전들이 많았다. 지금껏 가보지 못한 길을 찾아가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그 중에서 가장 큰 리스크는 내가 그토록 원하던 A의 프로젝트 합류 시기가 늦어지기 시작했다. 나의 선에서 해결될 수 없는 문제였다. 나는 흔들렸다. 내가 흔들리자 프로젝트 팀원들도 좌왕우왕 했다. 당연한 것이다.
사실 나는 지금의 프로덕트 매니저가 되기 전에 테크니컬 솔루션 컨설턴트 그리고 시스템 분석가로 일을 했던 경력이 있었다. 즉, 기술적인 지식이나 배경이 다른 일반적인 프로덕트 매니저들보다 좀 더 있는 편이었다. 그래서 회사에서는 다들 나를 "Technical Product Manager"라고 부른다. 기술적인 복잡성이 있거나 새로운 신기술을 사용해야 하는 플랫폼이나 제품 기획이 생기면 팀장은 나한테 종종 그 일들을 맡기는 경우가 많았다. 왜냐면 이런 일들은 대부분 개발자들과 상당히 심도 있는 기술 검토 및 토론을 리드해야 하기 때문이다.
어쨌던 프로젝트 초기에 A의 부재는 곧 전체적인 제품 전략과 요구 사항들을 기술적인 그림으로 그리고 그것들을 세부적으로 기술 요소(Technical components)로 정의하는 작업들이 제대로 안되다는 의미였다. 이것은 개발자들에게는 숨어 있는 보물을 찾기 위해 필수인 보물지도와 같은 것들인데 이것이 없으니 개발자들이 실제 제품 개발을 진행할 수가 없게 되었다.
하는 수 없이 그 부분을 내가 채워갔다. 물론 A가 하는 것에 비하면 많이 부족하지만 그래도 최소한 개발자들이 일을 시작할 수 있는 정도는 만들자는 목표로 설계 그림을 그리고 스펙을 만들었다. 다행히, 개발자들도 더 이상 방황하지 않고 일을 진행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군데군데 빠지거나 더 명확한 기술적인 컨설팅이 필요한 부분들이 많았다. 그런 것들은 A가 합류하면 하기로 하고 우선 급한 불 부터 끄기로 했다.
그러던 찰나에 드디어 A에게서 소식이 왔다. 다음 주부터 풀타임으로 우리 프로젝트에서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고 메일을 보냈다. 너무 기뻤다. 이런 것이 천군만마를 얻었다는 기분인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A가 프로젝트에 본격적으로 발을 담그고 일을 하면서 그를 위해 그동안 내가 개발자들을 위해 임시적으로 했던 부분들 그리고 나의 제품 정의 문서에 기술적인 분석과 설계를 좀 더 상세하게 정의해서 개발자들에게 전달한 일들을 공유했다.
그런데 며칠 후 아침부터 채팅창에 신규 메시지 알림이 들어왔다. A가 보낸 챗이었다. 그런데 평소와 다른 톤임을 직감했다. 그리고 마지막 문장이 확 들어왔다.
You crossed the line. I feel like my job is redundant. :)
우리말로 번역하자면 "니가 선을 넘었어. 나 정리해고 될 것 같은 기분이야".
문장의 끝에 스마일 이모티콘이 없었다는 정말 심각할 뻔했다. 바로 답장을 보냈다. 무슨 말이냐고? 그랬더니 A가 하는 말이 내가 그동안 만든 큰 그림들과 나의 문서들을 검토해 봤는데 거의 자신이 해야 할 것들이 이미 다 되어있어서 놀랐다고 하면서도 한편으로 자신이 뭘 더 추가해야 하는지 고민 중이라고 말을 했다. 직감적으로 A의 마음이 불편하다는 것을 글을 통해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당장 오해를 풀어야겠다는 마음에 주저리 그때의 상황들을 설명하고 (내가 왜 그래 야만 했는지) 그리고 내가 만든 것들은 그저 임시방편 (나의 것을 품질이 안 좋다)이었으며 여전히 너의 정식 아키텍처 디자인을 기다리고 있다고 말해줬다.
하지만 이미 A의 맘은 상했었다. 짧은 채팅의 끝에 이 부분에 대해서 그가 나와 일대일 미팅을 다음 주에 하고 싶다고 제안했다.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려고 나는 일부러 "Sure, No problem"을 스마일 이모티콘과 함께 보냈다.
A와 챗이 끝나고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 내가 실수한 것이 뭔가? 담주에 미팅을 하면 무슨 말을 해야 하나?
그러고 나서 나의 문서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읽어봤다. 과연 내가 선을 "많이" 넘은 것들이 있나? 아무리 봐도 그런 것을 찾기 힘들었다. 아무튼 그런 생각들로 일주일이 지나갔다.
주일 예배시간에 목사님이 "주님은 선하시다 (God is good)"이라는 말로 설교를 하셨다. 갑자기 A가 떠오르면서 생각했다. 나는 정말 순수한 선함으로 그 일을 했을 뿐 아무런 의도는 없었다. 꼭 이런 내 선한 마음이 A에게 전달되기를 하나님에게 기도를 했다.
일주일이 지나고 A와 줌으로 일대일 미팅을 했다. 시작하자마자 내가 배경 설명을 했다. 따로 준비한 것도 아니었는데 나의 이야기는 논리가 있었고 명쾌했다. 나는 느꼈다. 긴 테이크의 나의 말을 다 듣고 난 후 A는 웃으면서 말했다. 다 이해한다. 그리고 오해는 없다. 하지만 한 번쯤 이런 대화를 해보고 싶었다고 했다. 나의 technical background가 가끔은 자신의 technical expertise와 겹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리고 너의 의도는 늘 선했고 지금도 변함이 없기 때문에 괜찮다고 말해줬다. 하지만, 우리 서로 각자의 전문성에서 선을 넘게 되면 서로 이렇게 솔직하게 대화를 하면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구체적으로 자신이 생각하는 나의 선 넘은 것의 예제를 나의 문서를 기반으로 지적을 해 주었다. 나는 인정했고 그도 인정했다.
호주 회사에서 근무하면서 이런 경험이 사실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여러 번 있었다. 그때마다 항상 나의 성격으로 인한 오해와 문제로 생긴 일들이 많았다. 이것은 어쩌면 한국에서 오랜 시간 프로젝트를 하면서 생긴 약간은 습관적인 사고방식일지도 모른다.
기본적으로 나는 프로젝트를 하면서 멤버들의 역할들이 다 다르고 각자 일들이 정해져 있다고는 하지만 반드시 그것들이 자로 선을 확실히 그으면서 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결국은 프로젝트가 성공적으로 마무리가 되면 좋은 것 아니 가라는 일종의 대승적인 관점이 많았다. 그래서 내일을 누가 하던 아니면 다른 이의 일을 내가 할 수만 있다면 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던 사람이었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호주에 이민 와서 외국인들과 모여서 프로젝트를 해보니 이들은 나와 생각이 달랐다. 아무리 한 팀으로 움직이는 프로젝트팀이지만 각자의 전문성이 존중되고 보장되기를 원했다. 혹시 누군가가 다른 사람의 일과 중복적인 일을 한다거나 아니면 해야 할 경우는 반드시 상대방의 의견을 묻고 동의를 구하는 것이 불문율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이후로 나는 프로젝트 팀을 만들면 항상 이런 부분을 세심히 챙기고 멤버들끼리 각자의 선을 넘지 않게 미리 조정하곤 했다.
결국 해프닝으로 끝났고 A와는 여전히 좋은 사이로 아직도 서로를 도와주면서 잘 지내고 있다.
하지만 이번 일로 인해 또다시 같이 일하는 좋은 동료에 대한 존중과 그들이 가지고 있는 전문성을 침범하지는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