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어릴 적, 내 기억 속의 엄마는 늘 집안일로 분주하셨다. 그때 우리는 대식구가 함께 살았다. 할머니, 결혼 전이던 삼촌과 고모들까지 한집에 모여 살았고, 엄마는 매일 삼시 세끼를 준비하셨다. 식사가 끝나면 설거지까지 엄마의 몫이었다. 저녁이 되면, 모두가 식사를 마친 뒤에도 엄마는 부엌에 홀로 남아 무언가를 끓이곤 하셨다. 그때 나는 그 냄새가 싫다며 부엌에 가서 투정을 부린 적도 있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알게 되었다. 그것은 외갓집에서 외할아버지가 엄마를 위해 보내주신 흑염소였다. 장손의 집에 시집온 딸이 얼마나 힘들게 지낼지 이미 아셨던 외할아버지의 배려였다. 엄마는 모든 식구들이 잠든 뒤, 조용한 부엌에서 흑염소를 끓이고 또 끓여 드셨다. 그게 유일하게 엄마의 체력을 지켜주는 방법이었다.
엄마의 삶은 내가 자라는 내내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할머니의 잔소리는 항상 있었고, 장손의 집에는 제사도 어찌 그리 많은지 한 달이 멀다 하고 지내야 했다. 늘 집안일에 쫓기던 엄마의 뒷모습만 기억에 남아 있다.
그래서일까. 나는 엄마와의 특별한 추억이 없다. 함께 찍은 사진이라고는 어릴 적 단 한 장의 가족사진, 그리고 내 아이들 돌잔치에서 찍은 몇 장이 전부다. 엄마와 다정히 안고 웃는, 그런 평범한 일상의 사진조차 없다.
엄마가 조금 편안해진 것은 할머니가 돌아가신 이후였다. 돌아가시기 전까지도 할머니는 엄마를 참 많이 힘들게 하셨다. 아버지는 끝까지 할머니를 요양병원에 모시지 않고 집에서 모셨고, 그 간호는 온전히 엄마의 몫이었다. 긴 병간호 끝에 장례식을 치르면서, 엄마는 마치 친정어머니가 돌아가신 것처럼 슬피 우셨다. 그땐 이해할 수 없었지만, 지금은 안다. 그 속마음을 내가 어찌 다 헤아릴 수 있겠는가.
몇 해 전 아버지 팔순 잔칫날, 엄마는 또 많이 우셨다. 그렇게 오랜 세월 힘들게 일만 하시다가, 이제 인생의 마지막 길목에 선 자리에서 엄마는 “아버지에게 시집온 것이 참 좋았다”라고 하셨다. 그리고 모든 공을 아버지에게 돌리셨다. 우리 가족이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건 다 아버지의 희생과 노력 덕분이라고.
엄마는 지금도 아버지를 사랑하신다. 굳이 말로 하지 않으셔도, 그냥 느낄 수 있다.
어릴 적, 아버지는 나와 남동생을 참 많이 아끼고 예뻐하셨다. 지금의 나처럼 자식을 귀여워하시고 사랑하셨다. 그럴 때면, 엄마는 꼭 이런 말씀을 하셨다. “부모가 자식을 너무 예뻐하면 일찍 죽는대.”
그 말속엔 엄마가 아버지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또 얼마나 두려워하시는지 담겨 있었다.
가끔 영상통화를 하면, 엄마는 내 안부보다도 아버지의 건강을 더 먼저 물으신다. 물론 우리 가족도 걱정하시지만, 항상 아버지가 먼저다.
그런 엄마를 보면 존경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안타깝다. 세상에 영원한 것이 없다는데… 나는 엄마가 영원히 살아주었으면 좋겠고, 엄마는 아버지가 영원히 곁에 있어 주기를 바라시는 듯하다.
오늘은 호주의 ‘어머니의 날’이다. 오늘만큼은, 내 엄마를 꼭 생각하고 싶다. 엄마에 대한 기억과 추억을 꺼내어 마음속에 꼭 안아주고 싶다.
주일예배에서 목사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혹시 여러분의 엄마가 아직 곁에 살아 계신다면, 여러분은 아직 기회가 있습니다. 사랑한다고, 감사하다고 말할 수 있는 기회 말입니다.”
사랑해요, 엄마.
진심으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