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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M

아내와 나는 공통점이 몇 가지가 있는데 그중에 하나가 여행 코드이다. 둘 다 처음 가보는 낯선 도시나 마을에서 로컬(local)처럼 살아보는 여유 있는 여행을 좋아한다.


좋은 호텔도 좋지만 로컬들이 사는 동네의 집을 에어비엔비로 빌려서 지내고, 그들이 자주 가는 카페를 가서 커피를 마시고, 그들이 가는 빵집에 가서 갓 구운 빵을 사서 아침을 만들어서 먹고, 또 그들이 걷는 동네의 골목길이나 공원을 산책하면서 그들의 삶에 온전히 빠져 들어가 보는 체험을 원한다.


사실 이런 방식의 여행이 심심해 보일 수도 있다. 특히나 우리 딸들은 별로 좋아하지는 않는다. 딸들은 인스타에 나오는 맛집이나 유명한 장소를 꼭 가야 하고 시골보다는 도시를 더 원한다. 그래도 첫째 녀석은 아내와 나의 취향을 애써 맞춰 주려고 가끔은 같이 동참해 주는 노력을 보여주지만 둘째 딸은 동참은 하지만 즐기지를 못한다.


그래도 불만은 없다. 뭐 충분히 이해한다. 그래서 아이들이랑 여행을 가면 다 같이 하는 것과 각자 따로 하는 것을 계획하곤 한다. 언젠가부터 아이들과 함께 여행을 갈 경우 그들을 우리들의 기준에 맞춰 강요하지 않는다. 각자 원하는 것들을 하기를 바라고 그런 자유로움을 준다.




호주는 생각보다 땅덩어리가 큰 나라다. 호주 지도를 구글맵에서 본 적이 있으신 분들은 다 아시겠지만 대부분의 도시들은 해안선을 따라 위치해 있다. 이렇게 땅덩어리가 큰 나라이지만 마치 서로가 먼저 해안선을 차지해야겠다는 경쟁을 한 것처럼 그렇게 오물조물 해안가에만 몰려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도시를 조금만 벗어나도 사람이 거의 살지 않는 시골들이 많다. 그런 곳에 가면 자연이 그대로 살아가는 것들을 보고 경험할 수 있다.


이번 가족 여행의 목적은 딱 두 가지였다 - "쉼" 그리고 "함께"


처음부터 아이들과도 대화를 그렇게 했다. 아무런 계획 없이 우리가 지낼 에어 비엔비 집만 예약하고 나머지는 그냥 그곳에서 정하기로 했다. 아내와 내가 원하는 그 "로컬" 같은 여행을 하기로 정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아내와 나는 올해 들어서 제대로 "쉼"을 하지 못했고, 특히 아내는 한 번도 멈추지 않고 지금까지 달려왔다. 지난번에 아내와 같이 감기로 너무 아파 엄청 고생을 하면서 느꼈다. 우리에게는 "쉼"이 그리고 잠시 "멈춤" 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최근에 아내와 나는 각자의 회사에 휴가를 내고 무조건 여행을 다녀오기로 했다.


2박 3일. 사실 여행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짧았다. 그냥 바람 쐬러 어디 잠깐 갔다 왔다고 하는 것이 더 적절한 표현인 것 같다. 호주에서 일반적으로 여행이라고 하면 적어도 일주일 정도는 시간을 내서 지금 사는 곳에서 5~6 시간쯤은 떨어진 곳으로 떠나는 것이라고 보통 이야기 한다. 그런데 호주 젊은 애들은 짧은 기간 동안 근처에 자동차를 몰고 놀러 갔다 오는 것을 로드 트립(road trip)이라고 한다. 주로 대학생들이 학교 방학 기간 동안에 그렇게 다녀오곤 합니다.


주말에다가 앞으로 금요일 그리고 뒤로는 월요일을 끼고 로드 트립(road trip) 다녀왔다. 원래는 아내와 나만 갈 생각이었는데 아이들도 동참하고 싶다고 해서 다 같이 "함께"하기로 정했다. 하지만 아무런 계획이 없는 "쉼"을 위한 로드 트립이라고 아이들에게 미리 당부했다.




Gerringong - 이번 쉼을 위해 정한 마을(Town) 이름이다. 구글 맵에서 보는 바와 같이 시드니에서 자동차로 고작 2시간이면 충분히 도착하는 곳이다. 작은 마을이지만 바다가 이쁘고 평지도 있으며 적당히 언덕도 있어서 내려다보는 풍경도 제법 있는 바닷가 시골 마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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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ogle map


이 작은 바닷가 마을은 몇 해 전에 여름휴가를 다녀오면서 시드니로 돌아오는 길에 우여히 잠깐 들렀던 곳이었다. 마을이 너무 조용하고 아담하고 이쁘기도 해서 다음에 잠시 쉬러 오면 좋겠다고 생각해 둔 곳이었다.


혹시 궁금하실 구독자분들을 위해서 이 마을 사진들을 몇 장 올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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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얼굴 보고 같은 지붕 아래에서 밥 먹는 것이 가족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각자의 바쁜 일상으로 인해 서로를 더 모르고 지내는 경우가 많다. 아내와 나도 출퇴근하는 시간대가 서로 다르고 쉬는 날도 다르다 보니 최근엔 더욱더 그런 느낌을 많이 받았다.


아이들과의 관계는 더 설명이 필요가 없다. 가끔은 하숙생이랑 같이 사는 것인지 헷갈릴 정도로 평소에는 각자의 스케줄로 인해 얼굴 보기도 바쁘고 대화의 시간을 내기도 참 힘들다. 특히 첫째 딸은 이미 독립해서 따로 살다 보니 이제는 더 얼굴 보기가 힘들다. 물론 차로 5분이면 도착할 정도로 가까운 바로 옆동네에 살고 있지만 그런 물리적 거리와는 정반대로 심리적인 거리는 멀게만 느껴진다.


그래서 가끔씩 이렇게 다 같이 함께 여행을 가거나 로드 트립을 다녀오면 평소에 보지 못했던 모습도 보게 되고 무엇보다도 평소에 하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잔뜩 계획을 미리 짜고 간 여행에서는 도착하자마자 계획표를 들고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장소에 꼭 가야만 하는 부담감도 생기고 계획대로 잘 되면 상관없지만 혹여나 계획대로 되지 않으면 가족끼리도 서로가 다투고 결국엔 계획대로 안 하니 못하는 여행이 돼버리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래서 이번 여행은 처음부터 "무계획"임을 발표했다. 아이들에게도 아내에게도. 목적지 마을에 도착하자마자 우리는 짐을 풀고 각자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하기로 했다. 그 어떤 것을 하던지 아무런 간섭을 안 하기로 룰을 정했다. 소파에서 핸드폰을 하던, 책을 읽던 아니면 음악을 켜고 춤연습을 하던 아니면 밖에 나가서 산책을 하던 커피숍을 가던 그 어떤 것도 잔소리를 하거나 방해하지 않기로 했다.


무계획 여행의 또 다른 장점은 아침에 늦잠을 자도 된다는 것이다. 하루하루 계획을 짠 여행을 가면 보통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서둘러야 한다. 평소에 출근하는 시간보다도 더 일찍 일어나야 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이번 여행에서 우리는 아침에 기상 시간을 정하지 않기로 했다. 각자 자기가 일어나고 싶은 시간에 일어나서 각자 알아서 아침을 챙겨 먹기로 했습니다.


2박 3일 동안 우리는 새로운 마을을 정말 로컬처럼 살아 봤다. 그들이 움직이는 동선에 맞춰서 장을 보고, 커피를 마시고, 산책도 하였습니다. 정말 제대로 쉼을 느꼈다. 언덕에서 아래로 내려다본 바닷가는 눈과 마음을 씻을 수 있었다. 갑자기 그 마을에 적응이 다 되었다.


그러다가 힘들면 다시 집에 들어와서 낮잠도 좀 자고 그러다 일어나서 푹신한 소파에서 가져간 책을 읽었다.


다 같이 저녁 준비를 해서 맛있는 집밥을 해서 먹고 늦은 저녁에는 별구경을 했으며 오랜만에 아이들과 보드 게임을 즐기면서 오랜만에 웃었다.




이번 여행은 무엇보다 다 같이 "함께"라서 너무 좋았다. 세월은 늘 빠르게 지나가는데 이제 얼마 있으면 두 딸들이 각자의 파트너들과 결혼하겠다고 할 때가 곧 올지도 모르고 그러면 이렇게 다 같이 함께 어울릴 시간이 있을까 라는 생각이 문득 스쳐 지나갔다.


마지막날 저녁에 딸들과 다음 여행 계획에 대해서 간단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이들이 성인이 되고 독립하면서 사실 가족들이 다 같이 함께 가는 여행이 줄어들었다. 오랜만에 가는 한국 방문도 이제는 각자 따로 갈 때가 많다. 그래서 1년에 한 번은 가족끼리 다 같이 그리고 함께 어디든 가기로 했다. 내년에는 "뉴질랜드"로 잠점적인 목적지로 정하고 대화를 마쳤다.


다시 집으로 돌아오고 일상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어쩐지 이번에는 돌아온 이 일상이 감사했다. 뭔가 보거나 경험한 것은 없는 여행이었지만 마음속에 차곡차곡 쌓여만 있고 버리지 못했던 오래된 고민과 걱정의 쓰레기들을 버리고 온 듯했다. 그래서 마음이 가벼워졌고 그래서 돌아온 일상이 기뼜다.


다시 집으로 돌아온 날 밤 저녁 잠자리에 들기 전에 긴 문자를 하나를 받았다. 첫째 딸이 보낸 것이었다.

".... 우리 최근 들어 서로 너무 바빠서 함께 할 시간이 많이 없었는데 이번에 하루 종일 붙어 있으면서 얼굴 보고 함께 시간 보낼 수 있어서 너무 좋았어. 다시 한번 Family time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알게 되었어. 그리고 나 자신을 되돌아볼 수 있는 시간들이었어...."


둘째 녀석도 비슷한 문자를 보냈다 - "보통 여행 갔다 오면 좀 피곤한데 이번에는 왠지 전혀 피곤하지 않았어. 이유는 잘 몰라 그런데 좋았어"라고 했다.


정말 내가 원했던 바였다. 이번 여행의 목적은 그랬다. 쉼이었으며 함께하는 가족이었다. 함께한다는 것은 그저 같은 물리적인 공간에서 같이 사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닌 것 같다. 그 목적을 이룬 것 같아서 기분 좋게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저희가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 혹시 저희가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거니와 한 사람이면 어찌 따뜻하랴. 전도서 4장 9-1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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