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를 배우고 싶어요 (보선이 눈재에게 1)

by 보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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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눈재 님. 보선입니다.


사무적인 말투로 편지를 여는 것이 싫어 조금 건방지게 첫인사를 건네보았습니다.

눈재 님의 편지를 여러 번 읽었어요. 풍덩 빠지는 구간마다 생각에 허우적대고는 다시 읽어 내려갔습니다. 빠져서 헤엄치다 보면 그곳엔 반드시 무언가 있더라고요. 이를테면 눈재 님이 마련해둔 선물, 저를 기다리고 있던 속마음, 잊고 있던 기억 등등.

편지는 발신자와 수신자가 생각을 함께 직조하는 일 같아요.

눈재 님과의 대화와 만남의 과정을 기록하게 되어 기뻐요.


제 머릿속은 일과 사랑으로 복잡해요. 일을 잘하고 싶은데 게을러서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고, 그러면서 자책감과 무력감에 빠지길 반복하고 있거든요. 일에 치이다 보니 사랑에 대한 여유가 좁아졌어요. 창피하지만 최근에 제 친구를 서운하게 한 적도 있어요. 친구가 창업했는데 제가 그 중요성을 인지하지 못한 탓에 축하를 제대로 하지 못했거든요. 지금은 일이 저를 반쯤 삼킨 상태예요. 더는 진실한 가치를 망각하지 않도록, 삶의 주도권을 저 자신에게 돌려오도록 연습하고 있답니다.


생각이 많아서인지 요즘엔 블록버스터 판타지 SF 액션 꿈을 꿔요. 주로 쫓기고 다치며 과제가 많은 인물로 등장해요. 마법사가 되어, 지구에 상륙하여 공포를 주는 외계인들을 피해 다니기도 하고, 거대한 우주선을 조작하며 은하수를 여행하기도 합니다. 용만 한 아나콘다가 아파트에 갇힌 주민들을 잡아먹는 꿈을 꾸기도 했어요. 사람들은 무리 지어 언제 베란다로 들이닥칠지 모를 뱀을 피해 다녔죠. 아파트는 뱀의 난동으로 전기가 끊기고 콘크리트 가루 범벅이 되었어요. 사람들이 조금씩 용기를 내서 쥐약을 넣은 떡 조각들을 뱀에게 먹이는 것으로 꿈이 끝났습니다. 결국에 저를 해방하기 위해선 회피가 아닌 직면을 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 같았어요.


눈재 님께서 못난 사람이 되어도 진실을 이야기하자는 말이 용기가 됩니다. 저는 보기보다 나약한 사람이거든요. 소개하자면 저는 꽤 회의적입니다. 삶 자체에서 가치를 느끼지 못하며 주변 사람들이 주는 사랑으로 삶을 이어가죠. 어차피 이러나저러나 삶엔 의미가 없다며 자유롭게 살 거라고 다짐해보지만, 제 허세란 것을 압니다. 저에겐 타협하더라도 좀 더 편하고 싶고 사랑받고 싶고 즐거워 하고 싶은 이기심이 있어요.


앞으로 편지를 주고받으며 눈재 님의 세계를 배우고 싶어요. 제 세계를 활짝 열어둔 채로요. 보석은 원석일 때보다 각을 내어 깎았을 때 더 많은 빛을 품어 반짝이게 되잖아요. 제 눈엔 눈재 님은 반짝여요. 진실하게 살기 위해 저항할수록 상처를 얻지만 사랑은 잃지 않으시는 듯해요. 물론 제가 왜 이렇게 느끼는지 구체적으로는 모르겠어요. 눈재 님은 제게 미지의 친구입니다.


우리는 딱 두 번 만난 사이이기도 하죠. 제가 레몬 꿈을 꾸던 날 눈재 님을 처음 뵈었죠. 해가 짱짱하지만 습하진 않았던 날, 저기 멀리서 눈재 님이 걸어왔어요. ‘드디어 만났구나!’ 기뻤어요. 카페에 들어가니 레몬 에이드를 팔길래 ‘오! 이거 마시려고 레몬 밥이 나온 꿈을 꿨구나!’ 싶어서 시키려니까 레몬이 다 떨어졌다고 했죠. 그래서 두유라테를 시키려고 하니까 두유도 다 떨어졌다고 했죠. 그렇게 시무룩한 상태로 아메리카노를 마시기로 하고 우리는 마주 앉았습니다. 몇 년 동안 온라인으로 내적 친밀감을 쌓은 덕분에 처음 만나는 건데도 무척 편안했어요. 그날의 평온한 무표정이 아직도 기억나요.

저는 사실 예전부터 알고 있었어요. 우리가 언젠가 만날 거라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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