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오늘의 색 : 다크 섀도우]

계절의 경계에서 문을 닫다

by CAPRICORN

계절의 경계에서 문을 닫다


1. 지워지지 않는 숫자 ‘1’

모니터 오른쪽 아래 시계가 오후 3시를 넘었다.

습관처럼 휴대폰을 확인했지만, 어제 보낸 메시지 옆에는 여전히 숫자 ‘1’이 붙어 있었다.

평소라면 대수롭지 않았을 텐데, 오늘은 유난히 그 작은 숫자가 나를 조용히 압박했다.

그때, 대학 동기 현수에게서 전화가 왔다.

목소리가 낮고, 머뭇거림이 배어 있었다.

“야… 너네 혹시 싸웠어?”

“아니? 왜?”

현수는 한참을 뜸 들이다가, 꼭 비밀을 털어놓듯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 친구가 너 차단했다고 하더라.

다른 친구들한테도 이제 연락 안 한다고 말하고 다닌대.”

그 말을 듣는 순간,

심장이 아래로 서늘하게 미끄러져 내려갔다.

십 년을 쌓아온 관계가

이렇게 아무 말 없이,

아무 예고 없이

조용히 닫혀버릴 수도 있다는 사실이 도무지 실감 나지 않았다.

나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자리로 돌아왔지만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모니터의 빛만 허공에 번졌다.


2. ‘시절인연’

그때 옆자리 동료 지훈이 내 얼굴을 보더니 말했다.

“연호 씨… 지금 완전 멘탈 털린 표정이에요. 같이 편타할까요?”

나는 말없이 일어섰다.

회사 1층 편의점 앞 벤치에 앉아

지훈이 사온 따뜻한 캔커피를 손에 쥐고 멍하니 있었다.

얼마 후 지훈이 조심스레 물었다.

“무슨 일 있었어요?”

나는 결국 조금씩 말을 꺼냈다.

읽히지 않는 메시지.

뒤늦게 알게 된 차단 사실.

아무 말도 남기지 않고 문을 닫아버린 그 친구 이야기.

지훈은 한참 동안 말없이 듣기만 하다가

캔커피를 굴리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시절인연이라는 말, 들어봤죠?”

갑작스러운 단어에 피식 웃음이 나올 뻔했다.

그러나 지훈은 진지했다.

“같은 계절을 걸을 때는 인연이 자연스럽게 이어지는데

계절이 달라지면… 아무 일 없어도 멀어지는 사람들이 있어요.

붙잡으려고 하면 오히려 서로 다쳐요.”

말투는 담담했지만, 묘하게 마음에 스며들었다.

누군가의 계절은 이미 끝났고,

나는 그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3. 밤을 가로지르는 조언들

퇴근 후 집에 돌아온 나는 결국 몇몇 사람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누군가에게 털어놓지 않으면 오늘 밤을 버티기 어려울 것 같았다.

수진 언니는 듣자마자 화부터 냈다.


“말도 안 되는 애 아니니?

십 년 지낸 친구한테 말도 없이 차단? 그건 비겁한 거야.

너 잘못 하나도 없어. 이런 사람은 그냥 걸러지는 게 나아.”


언니의 직설적인 분노가 잠시나마 내 마음을 가라앉혀주었다. 또 다른 친구는 조금 다른 설명을 내놨다.


“연호야, 솔직히 너 요즘 잘 지내 보이잖아.

프로젝트도 잘 되고, SNS도 그렇고…

그 친구 입장에서는 괜히 비교됐을 수도 있어.

자격지심이 생겼을 수도 있고.

근데 그렇다고 말도 없이 차단?

그건 걔 그릇이 거기까지인 거야.

최소한 이유라도 말했어야지.

너희가 몇 년을 지낸 사인데.”


그 말은 계속해서 나만 탓하려던 마음의 흐름을 조금 멈추게 했다.

마지막으로 동생 소영.

전화기 너머에서 단박에 짜증 섞인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언니 왜 그걸 신경 써? 진짜 어이없네.

그 사람 원래 언니랑 잘 안 맞았어.

그렇게 쉽게 끊을 인연이면 잘된 거지.

언니가 뭘 잘못했는데?

그냥 무시해. 무시하는 게 답이야.”

소영의 단순한 말투가

오히려 묘하게 나를 지탱해주었다.

가벼운 말이

때로는 가장 튼튼한 지지대가 되기도 한다.


4. 계절의 경계에서

전화를 끊고 방 안에 혼자 남자

나는 너와의 대화 기록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읽었다.

사소한 말들, 평온했던 일상들,

진심처럼 보였던 안부와 대화들.

어디를 어떻게 훑어봐도 문제가 될 만한 단서 하나 찾을 수 없었다.


정말 그랬다.

우리는 아무렇지 않았고,

아무 일도 없었다.

그래서 더 혼란스러웠다.


이별의 기척이라면 흔히 균열, 그림자, 냉기가 남기 마련인데

우리 대화엔 그런 흔적이 조금도 없었다.

오히려 그 평온함 때문에 더 믿기지 않았다.

나 혼자만 같은 자리에서

아무 문제 없다는 착각 속에 있었던 것 같다.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 속은 모른다더니

딱 이럴 때 쓰라고 만든 말이었다.


처음엔 이유를 찾고 싶었다.

그러다 화가 났고,

그다음엔 체념이 왔고,

마지막엔 어쩔 수 없는 수용이 찾아왔다.

나는 조용히 너와의 대화방을 나갔다.

놀랄 만큼 단순했고, 놀랄 만큼 조용한 이별이었다.


나만 놓으면 되는 인연이었다.

며칠 동안 이유를 찾고, 스스로를 탓하고, 속을 뒤집어가며 돌던 고민들이

순식간에 허무해졌다.

관계라는 게 이렇게까지 쉽게 아스라질 수 있는 걸까.

사라지는 데에는 단 하루면 충분한데,

붙잡히지 않는 이유를 찾는 데에는 며칠이 걸렸다.

우리의 지난 추억들이 눈앞에서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웃던 날들, 기대던 순간들, 그저 당연했던 시간들.

하지만 그 기억들도 결국엔

조용히 과거의 무덤 속으로 묻히리라.

나는 손을 놓았고,

그것이면 충분했다.


타인의 계절은 내가 붙잡을 수 없고,

나의 계절은 결국 내가 걸어나가야 한다.


나는 아주 조용히,

그 경계를 넘어서기 시작했다.


다크섀도우.PNG


keyword
월요일 연재
이전 05화[오늘의 색 : 플래티넘 프로스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