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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색 : 바이킹레드』

오래된 사랑을 깊숙한 서랍에 넣는 법에 대하여

by CAPRICORN

오래된 사랑을 깊숙한 서랍에 넣는 법에 대하여


아침에 눈을 떴을 때부터 마음이 두근거렸다.

얼굴에 닿는 공기가 평소보다 차갑고 선명하게 느껴졌다.

오늘은 수오를 만나는 날이었다.

근 2년 만에 다시 마주하는 얼굴.

그 생각만으로 이상하게 심장이 몸보다 먼저 깨어났다.

눈을 감았다 뜨는 사이 15년이라는 시간은 얇게 접힌 종이처럼 순식간에 펼쳐졌다.



대학생 때 처음 만났던 수오는 내 모든 연애의 기준이었고, 나의 청춘이었다.

나는 그 남자를 사랑했다고, 지금도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와 헤어진 이유는 사랑이 부족해서가 아니었다.

너무 좋아서, 마지막 페이지를 열어보고 싶지 않아서였다.

나는 늘 마지막을 남겨두는 사람이었다.

책도 그렇고, 음식도 그렇고, 드라마도 그렇다.

좋으면 좋을수록 끝을 보지 못했다.

마지막 한 문장, 마지막 한 입, 마지막 한 화.

아끼고 아끼다가 결국 영영 넘기지 못하는 결말들.

수오와의 연애도 그랬다.

아름다운 순간을 영원히 기억하고 싶어서,

나는 그에게서, 그리고 우리에게서 조용히 빠져나왔다.

그는 이유를 묻지 못해 당황했고, 헤어진 후에도 계속 연락했다.

“이럴 거면 왜 헤어졌어?”

그 질문은 오랫동안 우리 사이를 떠돌았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우리는 묘한 거리감에 익숙해졌다.

연결되어 있지만 닿지는 않는, 이름 없는 관계.



누군가를 다시 만나고 연애를 할 때마다 나는 종종 비교 대상에 수오를 꺼내들었다.

그게 항상 옳은 건 아니지만 나의 기준은 어쩔 수 없이 그에게 있었다.

연애가 흔들릴 때마다 연락했고, 그 또한 비슷한 순간에 나에게 연락했다.

우리는 서로에게 위로였고, 도피처였고, 보험 같은 존재였다.

말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겉으로는 끝난 관계처럼 보이지만 내부에는 미세하게 남아 있는 감정의 잔상.

그리고 가끔 우리는 만났고, 오랜만에 손을 잡는 사람처럼 서툴지만 자연스러운 온도를 확인했다.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관계이지만 우리 둘에게는 이해되는 관계. 우리는 서로의 과거이자 현재였고,

그러나 미래는 절대 아닌 사람이었다.



그런 수오를 만나러 간다는 생각에 아침 공기가 유난히 선명하게 느껴졌다.

창문을 열어본 순간, 바람이 코끝을 스쳤다. 그 감촉만으로도 심장이 조금 더 빨리 뛰었다.

신촌역 3번 출구를 나와 스타벅스로 향하는 길은 이상하게도

대학 시절 캠퍼스로 돌아가는 기분이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오래 묵은 감정만이 은근하게 피어올랐다.

카페 문을 열자 수오가 먼저 와 있었다.

여전히 길고 말랐고, 여전히 나를 보며 짧게 웃었다.


“오랜만이네.”

“살 좀 빠졌네?”


둘 중 누가 먼저 말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대화는 오랜 친구처럼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우리는 서로의 근황을 나누며 어색함과 익숙함 사이에서 자리에 조용히 앉았다.

커피향 사이로 수오의 향기가 아주 살짝 퍼졌다.

그 향기는 지나간 계절의 어떤 냄새와 비슷했다.


커피 한 잔을 다 마시자 우리는 자연스럽게 다음 장소로 향했다. 함께 걷는 발걸음이 낯설지 않았다.

누군가에게 설명하기 어려운 관계였지만 우리에게는 늘 익숙했다. 방 안에 들어서고 문이 닫히는 순간

우리는 조용히 서로의 온도를 확인했다.

말보다 몸이 먼저 기억해내는 감정들이 있었다.

오랜만에 피부를 스치는 순간 15년이 흘렀다는 사실이 잠시 흐려졌다.


시간은 서로의 몸 위에 조금의 주름과 조금의 여유를 남겼다.

청춘의 열기는 사라졌지만 그 자리에 더 낮고 깊은 온기가 있었다.

숨소리와 침묵이 엇갈리는 사이 우리는 우리가 지나온 시간을 이야기했다.

과거의 우리,

지금의 우리,

그리고 없을 미래.



그는 이제 두 달 뒤 결혼을 앞두고 있었다.

그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오늘 만남은 우리 둘 모두에게 마지막이라는 걸 서로 잘 알고 있었다.

어쩌면 그 때문인지 대화는 더 거칠고 감정은 더 솔직했다.

우리는 말 대신 이야기의 마지막 페이지를 서로 조심스레 덮는 심정으로 조용히 서로에게 기댔다.

모든 것이 끝난 후 우리는 조용히 옷을 정리했다.

마지막이라는 말을 하지 않아도 두 사람 모두 알고 있었다.

문 밖으로 나와 햇빛이 스치는 순간, 나는 아주 오래된 책의 마지막 장을 손끝으로 밀어 넣는 기분을 느꼈다.


아쉬움과 안도,

그리움과 해방감이 동시에 엇갈렸다.


수오는 먼저 걸어갔다.

나는 그 뒷모습을 보며 그의 새 삶과 내 인생의 새로운 챕터가 서로 다른 방향으로 단단하게 이어지길 바랐다.

이제 우리의 페이지는 더 이상 열리지 않을 것이다.


“이제 그만, 잘 가. 그동안 행복했어.”


그 말을 뱉는 순간 낯설게 가벼워지는 마음이 있었다.

쓸쓸함과 해방감이 반씩 섞여 입 안에서 천천히 녹아내렸다.

나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걸었다.

그리고 아주 느린 속도로 내 안에서 오래 머물던 한 권의 책을 조심스럽게 덮었다.


소리 나지 않게,

부스럭거리지 않게,

내가 나에게 들키지 않게.


그러나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이제 이 책은 더 이상 펼쳐지지 않으리라는 걸.

나는 그렇게 나만의 종이 책을 덮었다.

적당히 닳아 있고, 몇몇 페이지는 손때가 묻었으며, 결말은 끝내 쓰여지지 않은 채 남겨진 한 권의 책.


오늘따라 마음 한쪽이 묘하게 허전했다.

만약 우리의 마지막 장을 끝까지 펼쳤다면,

그 페이지에는 어떤 문장이 적혀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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