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장된 성공
둘째 아이의 엔젤만 신드롬 진단을 받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평소 알고 지내던 언니와 통화를 하게 되었다.
그 언니는 자폐가 있는 아들을 키우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장애가 있는 아이를 키운다는 강한 동질감으로 묶였다.
알고 지낸 지 오래된 사이였지만, 내가 그 입장이 아니었을 때 그를 향해 느낀 감정은 그저 연민에 불과했었다.
그러나 ‘같은 바운더리’에 들어선 순간, 그 감정은 간사하게도 단숨에 동일시로 바뀌었다.
그간 그녀는 나와의 만남에서 얼마나 많은 공허와 외로움을 느껴 왔을까.
내가 생각하기에 인간이 가진 가장 안타까운 한계는, 내가 겪지 않은 일에는 완전히 공감할 수 없다는 것이다.
’ 인간‘이라고 일반화시킬 필요 없이, 나 말이다 나.
나는 내가 겪지 않은 아픔을 온전히 읽어낼 능력이 거의 없다. 상대가 울면 함께 눈물을 흘리기도 하지만, 그뿐이다. 돌아서면 금세 잊고, 오히려 내 일상의 하찮은 고민들에 더 깊이 아파했다.
그토록 좁은 시각으로 어찌 상대가 짊어진 그 삶의 무게를 감히 가늠조차 할 수 있었겠는가.
그간 내가 고민 없이 뱉어냈을 어쭙잖은 조언들은 결국, 지금까지도 내가 알 수 없는 보이지 않는 생채기를 무수히 남겼을 것이다.
나는 장애아이를 키우면서 비로소 장애아이를 가진 부모들의 심정을 읽어낼 수 있게 되었다.
물론, 각자의 상황이 다 다르기 때문에 여전히 완전한 합치를 이루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나의 협소하던 시각이 한 단계 확장 되었음은 분명하다.
하나님은 화음이를 통해 더 큰 바운더리의 사람들을 이해할 수 있도록 나의 지경을 넓히셨다.
“많은 부모들이 아이의 장애 판정을 받고서도 그것을 인정하기까지 평균적으로 3년의 시간이 걸린다는데, 다은은 굉장히 빨리 받아들인 것 같네.”
언니의 말에 내가 정말 그런가, 하고 생각해 보았다.
사실, 화음이는 여전히 아기였고 장애의 징후라는 것도 ‘아기의 무능함’이라는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그 당시에는 장애로 인한 어려움이 막상 피부로 와닿지는 않았다.
아마 엄마인 나 조차도 엔젤만 신드롬에 대한 정보가 별로 없는 데다 앞날에 대한 계획이라고는 애초에 타고나지 못한 즉흥적인 P(Perceiving) 성향의 사람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지금에 와 돌아보니 나의 그런 성향은 많은 부분에서 득이었다. 장애아이를 돌본다는 것은 미래가 보이지 않는 막막함이다.
내가 만약 상황적 대처에 유연하지 않은, 계획형 J(Judging) 성향을 가졌더라면 좀 더 오랫동안 괴로운 고뇌의 시간을 보내야 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늘 얼마간 나의 즉흥적이고 근시안적인 사고가 불만이었는데 지나고 보니 그 또한 다행이요, 오히려 장점이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실제로, J성향이 강한 나의 친구는 다운신드롬을 가진 자신의 딸을 돌보면서 변수가 넘쳐나는, 가늠할 수 없는 일상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고 고백했다.
그녀는 이제 그 과정들에서 자신의 고집스러운 성향을 이겨내고 오롯이 하나님의 운행하심에 자신을 내어드리는 훈련을 받게 되었다고 간증한다.
“다은아, 정말 우리의 삶은 한 치 앞도 볼 수 없고 내가 세우는 계획들이 얼마나 의미 없는 것인지 깨닫게 되는 삶인 것 같아. 그래서 더욱 하나님만 바라게 되는 삶, 그래서 더 복된 삶이라는 생각이 들어.”
2014년 8월이었던가. 우리 교회에 찬양 사역자 ‘유은성 전도사님‘이 찬양집회를 하기 위해 방문하셨다.
NC의 시골동네에 있는 한인교회-이 지역에서는 그나마 가장 큰 규모-에 유명 찬양 사역자가 방문하는 것이 흔한 일은 아니었기 때문에 젖먹이 화음이를 들쳐 안고 집회 현장에 달려가 자리를 잡았다.
나는 화음이 때문에 한 자리에 앉아 끝까지 머물 수 없어서 자모실을 들락거려야 했지만 익숙한 그의 찬양을 실황으로 들을 수 있다는 것이 참 감사했다.
찬양을 하는 중간중간 그의 짧은 간증들을 들을 수 있었는데 그가 남긴 말이 나에게 장애아이를 키우는 고단한 이 삶을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을 제공해 주었다.
크리스천의 성공은, 이 땅에서 얼마나 많은 재산을 모으느냐, 얼마나 화려한 명성을 얻느냐에 있지 않아요.
크리스천에게 있어 진짜 성공은 얼마나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느냐, 얼마나 하나님을 더 많이 아느냐 하는 것입니다.
나는 그 순간, 사방의 모든 소리들이 멈춘 것만 같았다. 번쩍이는 섬광이 내 머릿속에 훅 들어와 부유하던 잡생각들을 재배치하고 일순 그 빛을 중심으로 타닥, 하고 질서를 잡았다.
나는 그 여운을 길게 끌어안고 집으로 돌아와 남편과 함께 2인용 가죽소파에 나란히 앉아 긴 대화를 이어갔다.
우리는 그 대화의 끝에, 장애아이를 키워야 하는 이 삶은 결코 실패가 아니며 오히려 ‘성공‘으로 가는 지름길이라는 데에 동의했다.
크리스천의 성공이 ‘하나님을 더 가까이 두는 것‘이라면, 장애아이를 돌봐야 하는 우리의 삶이야말로 그 누구보다 더 큰 성공이 아니겠는가.
하나님 없이는 도무지 살아갈 수 없는 삶, 하나님 손을 붙들지 않고서는 한 발자국도 나아갈 수 없는 삶,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서는 버틸 수 없는 삶 말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을 찾을 수밖에 없는 이 삶은 성공이 보장된 삶이다.
‘장애를 가진 아이‘는 더 이상 이 땅에서 말하는 성공의 걸림돌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장하시는, 확실한 ‘성공’으로 가는 초강력 부스터 장치인 것이다.
그 장치의 원동력이 눈물이라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