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의 시작
엔젤만 신드롬은 15000명 중 한 명 꼴로 발생하는 희귀 신경 발달 장애이다.
우리에게 가장 익숙하게 알려진 유전자변형 장애는 아마도 다운신드롬이 아닐까 싶다. 다운신드롬은 두 개여야 하는 21번 염색체가 3개(Trisomy) 발현되었을 때 발생한다.
엔젤만 신드롬은 15번 염색체 이상으로 발생하는데 화음이의 경우, 엄마로부터 물려받은 15번 염색체의 미세 결실이 원인이었다.
엔젤만 신드롬은 전반적으로 다운신드롬을 가진 아이들보다 모든 면에서 수행능력이 떨어진다.
심각한 지적 장애, 발달 장애, 발화 장애, 운동 장애, 수면 장애를 동반하기 때문에 독립적인 활동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염색체 모형 그림을 보면 앞자리의 염색체일수록 크기가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상대적으로 크기가 큰 염색체에 이상이 생기면 뒷자리 염색체의 이상보다 모든 면에서 기능이 떨어진다.
엔젤만 신드롬은 말 그대로 ‘희귀’ 하기 때문에 주변에서 쉽게 접하기 어렵다. 나 역시 살면서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화음이가 엔젤만 신드롬이라는 진단을 받게 되었을 때 그것에 대한 지식이 전무했던 나는, 미래에 대한 그 어떤 예측도, 걱정의 방향성도 전혀 그려지지 않았다.
다만 ‘장애’라는 것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뿐이었다.
‘엔젤만’이라는 명명은 15번 염색체 이상을 최초로 발견한 영국인 의사 Harry Angelman의 이름을 딴 것이었는데 그 이름에 ‘Angel(천사)’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엔젤만 신드롬이라는 이름을 들으면 천사를 떠올린다. 실제로 엔젤만 신드롬을 지원하는 미국의 단체, ’Angelman Syndrome Foundation’의 로고에는 천사의 날개가 그려져 있다.
이 희귀한 발달 장애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기관이나 병원을 찾는 것도 쉽지 않다.
그런데 놀랍게도 내가 살고 있는 이곳 채플힐에, 전미를 통틀어서도 몇 군데밖에 존재하지 않는 엔젤만 신드롬 연구센터가 있다.
그 사실을 알았을 때, 내 주변 사람들은 하나같이 하나님의 예비하심이라며 놀라워했다.
남편이 포스트닥터 과정을 밟기 위해 이곳을 처음 방문했을 때 마음이 흡족했던 이유는 의외로 단순했다. 나무가 많았기 때문이다.
비행기 위에서 내려다본 풍경이 온통 초록이라, ‘아내가 정말 좋아하겠다!‘라고 생각했더란다.
나는-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참 예민한 사람이다. 기본 정서가 ‘슬픔’인 데다 날씨와 환경의 영향을 지독하게도 많이 받는다.
그 때문에 남편은 포스트닥터를 결정할 때, 본인의 전공보다는 내 무드를 더 고려했다. 미안하면서도 참 고마운 일이다.
그리하여 당도한 이곳 채플힐에서, 예기치 못한 하나님의 예비하심을 마주하게 된 것이다. 주변 모두가 ‘하나님께서 얼마나 화음이네를 사랑하시면 이처럼 섬세하게 준비해 두셨나.‘,라며 감탄했다.
말로 다 표현 못할 감사와 찬양이 이어져 나의 간증이 되었다.
그렇게 하나님의 넘치는 관심과 사랑에 마냥 감격하며 들떠있던 나에게 불현듯, ’그런데 하나님은 왜 특별히 나에게?’라는 질문이 시작되었다.
그 질문의 시작은, 한국에서 비지팅으로 1년간 이곳에 머물렀던 한 가정을 만나면서부터였다.
그들은 내가 사는 곳에서 1시간 반 떨어진 윈스톤-셀럼이라는 지역으로 연구년을 지내러 온 가정이었는데 쌍둥이 중 한 명이 엔젤만 신드롬이었다.
그 아이는 화음이보다 6살 많은 언니였다. 그들은 채플힐에 있는 엔젤만 신드롬 연구센터의 소문을 듣고 일부러 예약을 하고 이곳을 방문했다.
그들의 통역을 맡았던 통역사님과 나는 화음이의 치료과정에서 자주 왕래하며 알게 된 사이였는데 통역사님의 소개로 자연스럽게 그들과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우리는 화음이 말고는 다른 엔젤만 신드롬을 가진 아이를 만나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들과의 만남이 무척 기대되었다.
우리는 함께 식사를 하면서 이런저런 질문들과 상황들을 공유했고 나는 화음이 보다 6살 많은 언니를 관찰하면서 어린이가 될 화음이의 모습을 예측해 볼 수 있었다.
반갑고 애틋한 만남의 끝무렵에 그 아이의 엄마가 불쑥 말했다.
“한국에 있는 다른 엄마들에게 화음이네 얘기를 해도 될까요? 아마 다들, 엄청 부러워할 거예요.”
그것은 대수롭지 않은 일상적인 인사말이었을 뿐이었는데 나에게는 생각의 대전환이 일어날 만큼 충격적인 말로 다가왔다.
끊어져있던 생각의 회로가 파밧, 하고 전기 신호를 잡아내 막혀있던 혈류가 마침내 길을 찾아 흘러드는 것만 같았다. 뒤통수가 아렸다.
나를 부러워한다고? 희귀 유전 장애를 가진 아이를 낳고 전전긍긍 삶을 비관하며 주저앉은 나를, 이런 나를 부러워한다고?
이 땅에서의 행복과 불행, 고통은 모두 상대적이라는 공통점을 가진다.
비교를 통한 우월감 혹은 열등감은 지탱할 뿌리가 없어 또 다른 상대가 나타나면 언제라도 넘어지고 수시로 교체될 만큼 나약하다.
조금만 눈을 돌려도 나와의 비교 대상이 넘쳐나는, ‘상대성’이 난무하는 어그러진 세상에서 ‘공평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라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명령은 가혹하게만 느껴진다.
뇌성마비를 앓고 있는 송명희 시인의 ‘나‘라는 시가 있다.
나 가진 재물 없으나
나 남이 가진 지식 없으나
나 남이 가진 건강 있지 않으나
나 남이 없는 것 있으니
나 남이 못 본 것을 보았고
나 남이 듣지 못한 음성 들었고
나 남이 받지 못한 사랑받았고
나 남이 없는 것 갖게 하셨네
공평하신 하나님이
나 남이 가진 것 나 없지만
공평하신 하나님이
나 남이 없는 것 갖게 하셨네
어린 시절 교회에서 이 시에 곡을 붙인 찬양을 즐겨 불렀었는데 나는 늘 의문이었다.
어떻게 그녀는 하나님이 공평하시다고 선언할 수 있었는가, 그녀가 보았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내가 미처 알지 못하는 세계, 내가 아직 보지 못한 신비를 그녀는 깨달았던 것일까...
‘나를 부러워한다’는 그 엄마의 인사말이 나에게 당장에 풀리지 않는, 어렵고도 복잡한 질문을 남겼다.
공평하시다는 하나님이 ’ 상대적으로’ 좋은 이 환경에, 다른 사람들의 부러움을 자아내는 예비하신 이곳에 나를,
특별히 나를 두신 이유가 무엇일까, 하나님의 의도는 과연 무엇인가.
그날 이후, 나는 오랫동안 그 질문의 답을 찾아 헤매어야만 했다.
송명희 시인이 고백했던 ‘공평하신 하나님’을 나도 경험하고 싶어졌다.
그 신비는 과연 무엇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