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을 향해 달려가는 사람들

하나님의 공평은

by 채플힐달봉

수년 전, 기도모임에 참석했던 나는 나보다 서너 살 어리던 한 자매로부터 질문을 받았다.

“다은 자매님은, 어떻게 그런 상황-장애를 가진 아이를 키우는-에서도 항상 그렇게 밝으실 수 있어요? 저는 그 원동력이 뭔지 늘 궁금했어요.”

나를 두고 ‘항상 밝다 ‘고 표현해 준 그녀는 내 일상의 팔 할(八割)이 진흙탕인 것을 알리 없었다. 나는 그녀의 평가에 어리둥절했지만 왠지, 그녀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서 준비되지 않은 말들을 주절거렸다.

“글쎄요, 저는 저보다 더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알아요. 적어도 저는 그분들에 비하면 견딜만한 고통이 아닐까 싶어요. 그런 생각을 하면 감사할 수 있는 것 같아요.”

나의 성급하고 정리되지 않은 대답에 그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는 지금까지도 그녀의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그녀가 기대했던 대답이 아니었던 것이다.

실망한 눈빛이 역력한 그녀가 나에게 말했다.

”음... 그것도 결국 ’ 비교’인 거잖아요. 비교를 통해 얻은 감사는, 건강하지 않은 것 같아요. 지속력이 없어요, 언젠가 또 무너져버리고 말잖아요. “


며칠 전, 우연히 내 알고리즘에 뜬 기사 하나를 보게 되었는데 어느 초등학교 시험 문제지에 작성된 아이의 대답이, 몇 년 전 나에게 ’ 비교‘를 통한 감사가 얼마나 빈약한 것인지에 대해 의문을 남겼던 자매와의 대화를 떠올리게 했다.

어느 초등학교 시험 문제에 대한 한 학생의 답안지

비교를 통한 우월의식이 나쁜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에너지 드링크를 마셨을 때 느끼는 단기적인 각성효과처럼 우리의 의식을 반짝, 하고 깨어나게 만들어 회복과 순간적인 결단을 이끌어내기도 하니까 말이다.

그렇지만 이런 삶, 고통이 평생에 걸쳐 이어지는 삶 가운데에서 그 각성효과는 마약에 취한 환자가 금단현상에 몸을 떨면서 더 강한 마약을 갈구하는 것처럼 치명적일 뿐 아니라 더 큰 공허를 남긴다.

장애아이를 키우는 가정들은 대개 그 공허를 견디지 못해서 기진해 있거나 ’ 비교‘가 보이지 않도록 꽁꽁 자신을 감춘다.

사회로부터의 고립은, 사회적 인프라의 부족 때문이기도 하지만 부모들의 선택으로도 일어난다.

집 안에서 나의 아이만 바라볼 때보다 바깥에서 수많은 ’ 비교’들을 마주하는 것이 훨씬 더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이런 삶을 살아내는 우리가, 어떻게 ’ 공평하신 하나님‘을 인정할 수 있을까? 그 질문은 나에게 수년에 걸쳐 여러 통로로 반복적으로 제기되었다.

나의 끊임없는 의문과 요청에 대한 하나님의 첫 번째 대답은 마태복음 25장을 통해서였다.


또 하늘나라는 이런 사정과 같다. 어떤 사람이 여행을 떠나면서, 자기 종들을 불러서, 자기의 재산을 그들에게 맡겼다.

그는 각 사람의 능력을 따라, 한 사람에게는 다섯 달란트를 주고, 또 한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주고, 또 다른 한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다.

... 오랜 뒤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서, 그들과 셈을 하게 되었다.

다섯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다섯 달란트를 더 가지고 와서 말하기를 ‘주인님, 주인께서 다섯 달란트를 내게 맡기셨는데, 보십시오, 다섯 달란트를 더 벌었습니다. “하였다.

그의 주인이 그에게 말하였다. ’ 잘했다! 착하고 신실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신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많은 일을 네게 맡기겠다. 와서, 주인과 함께 기쁨을 누려라.’

두 달란트를 받은 사람도 다가와서 ‘주인님, 주인님께서 두 달란트를 내게 맡기셨는데, 보십시오, 두 달란트를 더 벌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의 주인이 그에게 말하였다. ‘잘했다, 착하고 신실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신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많은 일을 네게 맡기겠다. 와서, 주인과 함께 기쁨을 누려라.‘

그러나 한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다가와서 말하였다. ’ 주인님, 나는, 주인이 굳은 분이시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시고, 뿌리지 않은 데서 모으시는 줄로 알고, 무서워하여 물러나서,

그 달란트를 땅에 숨겨 두었습니다. 보십시오, 여기에 그 돈이 있으니, 받으십시오.‘ 그러자 그의 주인이 그에게 말하였다.

’ 악하고 게으른 종아, 너는 내가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뿌리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 알았다. 그렇다면, 너는 내 돈을 돈놀이하는 사람에게 맡겼어야 했다. 그랬더라면, 내가 와서, 내 돈에 이자를 붙여 받았을 것이다.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서, 열 달란트 가진 사람에게 주어라. 가진 사람에게 더 주어서 넘치게 하고, 갖지 못한 사람에게서는 있는 것마저 빼앗을 것이다.

이 쓸모없는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아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가는 일이 있을 것이다.”

마태복음 25:14-30 (새번역)


이 말씀에서 주목할 것은 달란트를 받은 종들이 아니라 달란트를 맡기고 떠난 주인이다.

나는 모태신앙으로 자라 40년 가까이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항상 성경을 내 관점에서 이해하려 했다. 나의 필요와 나의 행복을 위한 도구로 해석해 왔다.

그러나 성경과 역사의 주인공은 내가 아니라 ’ 하나님’ 이시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이해하려 애쓸 때에야 비로소 성경 속 수많은 비유들이 깨달아진다.

한낱 피조물인 우리가 창조주의 목적을 왜곡하고 하나님을 고작 내 행복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시킬 때, 그 믿음이라는 것은 우상을 숭배하는 다른 종교와 하등 다를 것이 없어진다.

이 말씀 속에서 하나님은 각 사람의 능력에 따라, 공평하게 달란트를 맡기고 떠나셨다.

하나님의 공평이란, 똑같은 분량을 맡기시는 것이 아니라 각 사람의 처지와 상황을 고려해서 그에 맞게 분배하신다는 것이다.

돌아온 이후에도 절대적인 분량을 채우라 명하시지 않으셨다. 주신만큼의 분량을 기대하신다. 열 달란트 맡은 자에게는 열 달란트를, 다섯 달란트 맡은 자에게서는 또 다섯 달란트 남긴 것을 칭찬하신다.

맡긴 만큼의 최선을 기대하시는 분이 하나님 이시다.

주신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내가 가진 것은 고작 한 달란트이니까, 묻어 두었다가 되돌려드려도 무방하다 ‘고 생각하는 게으름은 결국 하나님의 책망을 받게 된다.

크리스천은 영원을 향해 달려가는 사람들이다. 이 땅에서의 삶이 끝이라면 공평하신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이 풀리지 않는 난제이겠지만

우리의 삶의 성과는 하늘에서 이루어질 것이므로, 이 땅에서의 삶은 그저 ‘공평하신 하나님’이라는 답을 내기 위한 풀이과정 일 뿐이다.

하나님과 대면하며 셈 할 날이 곧 올 것이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 내가 남들보다 덜 가졌다 하여 실망하거나 상대적 박탈감에 허우적댈 이유가 전혀 없다.

하나님은 더 가진 사람들에게는 더 큰 성과를 기대하신다. 우리의 결국은 하나님과 대면하여 셈 하는 그날의 결과에 달려 있다.

내게 주신 환경과 상황을 하나님은 이미 다 아시고 그것마저도 다 고려하신 후 계산하시는, “공평하신 하나님” 이시다.

예수님의 첫 번째 제자였던 베드로조차도 마지막 날까지 비교에서 자유롭지 못해 예수님께 불안한 자신의 심정을 드러냈다.


베드로가 이 제자를 보고서, 예수께 물었다.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고 한들,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 “

요한복음 21:21-22(새번역)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게 될는지 예언하시는 예수님 앞에서 그의 첫 질문은 고작 ‘쟤는 어떻게 되나요? 요한 쟤는 어떻게 되는데요?‘ 였다.

이 땅에 시선을 박고 사는 우리의 연약함은 예수님을 곁에 두고서도 영원을 바라보지 못하고 눈먼 자처럼 이 땅에서의 결과만 더듬으며 살아간다.

그런 우리에게 예수님이 주신 명쾌한 대답은 ‘걔가 무슨 상관이니? 너는 그저 나를 따라라!‘하셨다.

하나님이 나에게 남들보다 조금이라도 더 나은 상황을 주신 것은, 그에 대한 기대가 있으시기 때문이다.

이 관점이 생기는 순간, 나는 더 이상 내 처지를 비관하는, 지독스럽던 자기 연민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장애아이를 돌보기에 한국보다 조금 더 나은, 이 미국 땅에 나를 살게 하신 것은 ’ 감사‘이기도 하지만 ’ 책임’이기도 하다.

‘받은 복을 세어보아라’라는 찬양은 주신 것에 대한 감사일뿐만 아니라 주신 복에 대한 결과, 성과, 책임도 함께 따른다는 것을 인지해야만 한다.

그것이, 영원을 향해 달리는 우리의 자세이자 공평하신 하나님에 대한 인정이 될 것이다.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

곁눈질하기 바빴던 나의 시선을 하나님께 고정할 때, 나는 그제야 ‘착하고 신실한 종아, 잘하였다.‘ 칭찬받게 될 것이다.

영원을 향한 달리기에 숨이 가쁘고 쓰러질 듯 목이 말라와도, 결승선에서 두 팔 벌려 나를 기다리실 그분을 향해 주먹 불끈 쥐고 다시 일어나 달릴 수 있게 된다.

그날이 손꼽아 기다려진다.



금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