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배우는 ‘공존’

공동체적 합의에서 오는 보호

by 채플힐달봉

진단명이 확정되자 그에 따른 조치가 빠르게 이루어졌다. 소아과, 정형외과뿐 아니라 유전과, 안과, 발달의학과, 신경과 예약이 줄줄이 이어졌다. 진료실에는 의료사회복지사도 수시로 드나들었으며 우리의 형편에 맞는 서비스를 찾아 정보를 제공해 주었다. 그들은 나-장애아이의 엄마-의 정신건강상태도 체크해 주었는데, 우울증 지표가 내 손에 들려있다는 것만으로도 장애 가정의 삶의 무게를 덜어주고자 하는 그들의 관심이 느껴졌다. 안전망이 확보되자 나는 그들 앞에서 마구 응석을 부리고 싶어졌다. 떼를 쓰고 울면 토닥여줄 것만 같았다. 나는 한 번도 그들 앞에서 눈물을 보인 적이 없었지만 내 내면의 어린아이는 항상 그들 앞에서 마음 놓고 울었다.


남편은 여전히 포스트닥터 신분으로 학교에 소속되어 있었기 때문에 우리의 형편(Income)으로는 그 모든 병원 진료와 서비스를 감당할 여력이 되지 않았다. 우리는 노스캐롤라이나 주 정부에서 운영하는 CDSA(Children’s Developmental Services Agency)의 서비스를 받기 시작했다. 그것은 발달 지연이 있는 모든 영유아(0-3세)에게 조기 개입 서비스를 제공하는 공공기관이다. 우리는 언어, 재활, 놀이, 작업치료까지 아이에게 필요한 모든 서비스를 무료로 받게 되었다. 서비스는 가정 방문이 기본이고 부모가 필요한 횟수를 정할 수 있었다. 원하면 통역사도 언제든 붙여주었다. 일반 학생들이 대체로 만 5세부터 학교에 다니는 반면, 장애 아이들은 만 3세부터 공립학교를 다닐 수 있다. 그때까지 아이들은 집에서 필요한 모든 교육을 받게 된다. 만 3세가 되어 학교를 다니게 되면 그동안 받던 서비스는 모두 학교로 전환된다. 조기 개입이 장애 학생들의 기능을 극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을 그들은 이해하고 있었다. 장애 진단을 받고 어쩔 줄 몰라 허둥거리는 부모를 대신해 나라가 경험 많은 전문가가 되어 길을 안내해 주는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도 미국이라는 나라의 이 같은 서비스가 신기하다. 이들이 가진 장애에 대한 이해는 과연 어디까지 확장되어 있는 것일까. 장애에 대한 특별대우는, 공동체적 합의에서 나온다. 사회 구성원 모두가 ‘공평‘에 대한 정의에 이견이 없어야 가능하다. 나는 미국에 살면서, 인종차별보다 장애차별의 턱이 낮다는 것을 발견했다. 내가 아시아인으로서 혼자 서 있을 때 그들은 얼마간 나를 경계한다. 하지만 휠체어를 탄 화음이와 함께 서 있으면 그 경계를 허물고 한없이 관대해진다. 그런 시선을 반복적으로 받으면서, 나는 미국인들의 그런 반응이 ‘다른 인종’에 대한 경험보다 ‘장애’에 대한 경험이 훨씬 많은 데서 비롯된 것임을 알게 되었다. 미국인들의 장애 경험은 한국인들의 그것보다 훨씬 다양하고 빈번하다. 익숙하기 때문에 낯설지 않고, 알고 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곁을 내어줄 수 있는 것이다. 차별이라는 것은 결국, 상대에 대한 경험 부족에서 나온다.

한국 사회가 장애에 대해 관대해지기 위해서는 사회적 인프라의 확장 못지않게 장애 자체에 대한 노출이 많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장애인 학교가 도시 외곽으로 밀려나 혐오시설로 숨어있지 않기를 바란다. 몇 년 전, 장애인 학교가 도시에 들어오는 것을 반대하는 지역주민들 앞에서 무릎 꿇고 눈물로 호소하는 부모들의 사진을 기사를 통해서 보았다. 그것은 비단, 그 해에만 일어난 특별한 사건이 아니다. 타이틀만 다를 뿐, 비슷한 사건은 한국 지역 곳곳에서 발생하고 있다. 불과 몇 달 전에도 장애 자녀의 부모들이 사람들 앞에서 다시 무릎을 꿇었다. ’장애인 학교’라는 구분이 따로 존재한다는 것도 차별을 부추긴다. 미국에서는 대부분의 장애 학생들이 일반 공립학교를 다닌다. 장애는 피해야 할 위험이 아니라 배워야 할 ‘공존의 대상‘이다. 비장애인들도 장애에 대해 배워야 하지만 장애인들도 비장애에 대해 배울 기회가 있어야 한다. 나는 그 교육의 기본이 학교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린아이들은 ‘다름’에 대한 경계가 모호하다. 아이들은 그 경계선을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을 만큼 유연하다.

미국의 아이들이 한국의 아이들보다 장애에 대한 거부가 적은 것은, 한데 섞여 함께 자라 가기 때문이다. 그렇게 습득한 유연성은 성인이 된 후에도 유지된다. 그러나 한국처럼 장애와 비장애를 철저하게 분리시키면 배울 기회를 박탈당한 채로 서로에게서 영원히 단절되고 만다. 서로가 서로에게 거리낌 없이 노출될 때에야 우리는 비로소 상대를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얼마 전, 한국에서 단기 연수를 온 몇몇 가정의 자녀들이 화음이를 따돌리는 것을 목격했다. 낯섦에 대한 반사적인 행동이었을 것이다. 무리 지어 수군거리면서 화음이가 다가오면 은근히 어깨를 밀어 넘어뜨리고 떼를 지어 몰려다녔다. 내가 그 아이들을 불러 화음이의 상황과 생태를 설명했을 때 그들 중 한 명은 자기를 혼내는 줄로 오해하고 어깨를 들썩이면서 훌쩍거렸다. 당황스러웠다. 그 아이들이 화음이의 생태를 이해하지 못한 것처럼 나 역시 그들의 생태와 사고를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배워본 적 없는 장애를 나는 일방적으로 그들에게 강요하고 있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 것일까?

적어도 그들은 1년 혹은 2년 동안 미국 사회에 머물면서 자연스레 장애와 공존하는 법을 배워갈 것이다. 바라옵기는, 그 아이들의 기억에 나의 개입이 무서운 아줌마의 호통으로만 남지 않았기를 바란다.


몇 년 전, 한국을 방문했을 때 시어머니와 함께 온천을 갔었다. 누가 보아도 장애를 가진 화음이의 등장에 탕 안에 있던 모두가 놀랐다. 그들 중 한 아주머니가 온탕 안에 앉아있던 선율이에게 다가와 대뜸 질문을 하셨다.

“너는, 저런 동생이 있는데 학교 생활 괜찮니?”

나는 너무 황당하고 깜짝 놀라서 선율이를 얼른 뒤로 물러나게 한 뒤, 그분께 다소 불쾌한 어조로 그 질문의 의도가 무엇인지 물었다. 그분은 손사래를 치며 오해하게 했다면 미안하다고 사과한 뒤, 자신에게도 장애를 가진 딸이 있다고 했다. 그녀에게는 딸이 둘 있는데 그중 언니에게 장애가 있었다. 그녀의 고민은 장애를 가진 딸이 아니라 비장애인 둘째 딸이었다. 장애인 언니를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학교에서 왕따를 당했다고 했다. 이제 중학교에 들어간 둘째는 사춘기에 들면서 그런 놀림을 버티지 못해 수시로 학교 옥상에 올라간다고 했다. 안전망이 없는 사회에서는 부모조차도 그 어린 마음을 보호하지 못한다.


‘다름‘을 받아들이고 차별을 끊어내야만 한다는 도덕 교육이 책 안에만 갇혀있을 때 우리는 기형적인 괴리를 경험하게 된다. 체득되지 않은 교육은 무용지물이다. 시험 영어만 들입다 파다 좋은 대학에 들어갔지만 외국인 앞에서 회화 한 마디 시원스레 뱉어내지 못하는 것과 꼭 같다.


우리가 미국에서 잠시 방문했다는 것을 알게 된 그분이 선율이에게 “너는 참 다행이다.”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그녀가 느꼈을 상대적 박탈감이 얼마나 클지 감히 가늠할 수가 없었다. 나는 그분의 말에 소리 내어 울었다. 나는 지금도 그분이 말한 ‘다행‘ 속에서 내가 가진 특권을 가슴 아픈 책임으로 받아들인다. 부디, 한국 사회가 해외여행 중 어쩌다 받게 되는 인종 차별에만 부르르 떨며 분노하기보다 우리 사회 속에 엄연히 존재하는 무수한 차별을 뼈저리게 반성하는 사회가 되기를 간절히 바라본다.



*제목 이미지 출처: https://futurechosun.com/archives/7995
금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