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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슬 Oct 31. 2020

베를린 난민 역사

테마 탐방에 함께 하며

베를린은 이야깃거리가 많은 도시다.

동서독 분단, 두 차례의 세계 대전을 고스란히 겪은 역사적 상징으로서의 맥락, 전 세계 젊은이들을 모여들게 하는 창의적이고 매력적인 예술 활동, 자유로운 분위기로 유럽의 실리콘 밸리로 불리는 스타트업 성지로서의 이미지 그리고 최근에는 엄청난 난민 유입으로 더 다채로워진 거리의 모습 등등. 그래서 방문객들을 위한 각종 투어 프로그램이 셀 수도 없이 많다.

 

내가 참여했던 2016년 역사 테마 시티 투어는 베를린에서도 고풍스럽기로 소문난 젠다멘마크트(불어로 기병대라는 의미 Gendarmenmarkt)가 있는 거리에서 약 300년 전 종교의 자유를 찾아 프랑스를 떠나 베를린에 왔던 프렌치들 이야기로부터 시작했다. 

이들을 위그노 (Huguenot 불어. 프랑스의 개신교 신도)라 불렀는데, 이 프랑스 상공인 출신 난민들을 받으면서 이들에게 세금을 올렸다고도 한다. 그것이 1675년 이야기( 위그노를 설명한 https://www.youtube.com/watch?v=Jv23ousd5so 자료에는 당시 독일로 피신한 위그노 난민이 3만여명이었다고 한다)

유럽 주변국 9개와 국경을 인접한 독일은 한일 관계 처럼 옆나라 프랑스와 언어적으로도 영향을 많이 주고 받았는데, 알다시피 거의 일상어로 쓰는 모카포트도 프렌치식 발음이고 '기회'라는 단어도 '샹스' (Chance)라고 불어식 발음을 한다. 젠다멘 광장에는 프랑스 교회와 독일 교회가 나란히 서 있다. 독일과 프랑스가 서로 주거니 받거니 선물한 교회라고. 


니콜라이교회 뒤편의 유대인 거주 지역에 대한 설명은 유대인 배척의 역사가 오래된 것임을 새삼 깨닫게 해주었다. 14세기경 독일 지역에 유대인 이주하면서 유대교와 기독교 갈등이 생겨서 15세기에 이들의 유입이 금지되었는데, 유대인들이 교육받으려면 세금 더 내야하는 등 차별의 암울한 역사가 있다고. 1935년 미국에 유입된 유대인중 25%가 독일 유대인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유독 내 흥미를 크게 끌었던 The house of one. 유대교 기독교 무슬림 세 종파가 하나로 마음을 모아 만드는 건축물이었는데, 크라우드펀딩에 의존하느라 부지만 정해놓고 아직 공사가 시작되지 못했다고. 200개 업체가 이 프로젝트을 놓고 경쟁할 정도로 베를린 시민들에게는 큰 의미를 가진 프로젝트였다고 한다. 흥미로웠던 점은 난민역사에 종교적인 차이와 유사성도 매우 중요한 요소인데, 이 프로젝트의 경우 차이보다는 유사성에 초점을 맞춤으로서 화합으로 나아갈 방향을 제시했다는 점이다. 세 종교가 각자 지키는 성일을 함께 표시한 달력 설명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초대 노동자로 온 터키 이주민들이 주로 자리잡은 크로이츠베아그(십자가언덕) 지역은 원래 가난한 이주민들의 주거지역으로 슬럼화되다가 베를린시에서 전격적으로 예술 중심으로 지원을 하면서 핫하게 떠올랐지만 그로인해 집값이 치솟아 원주민이 외곽으로 밀려나는 젠트리피케이션의 중심지다. 

베를린의 중심 미테 지역과 크로이츠베아그 경계선은 동서분단 장벽이 있던 곳으로 1900년대 초반 베를린 주민이 400만명이었을 때는 훔볼트 대학 인근과 더불어 베를린 3개 산업구의 하나였다고 한다. 

크로이츠베아그 내 코트버스토어 지역은 방직산업이 융성했는데, 상공인 출신 위그노들의 중요한 삶의 자원이었다고 한다. 

1960년대 1천 7백만명 터키 이민 노동자에 이어 폴란드에서도 초청 노동자로는 세 번째 규모로 독일에 많이 왔다고. 지금도 마찬가지. 저임금 일자리에 폴란드인들이 많이 종사한다. 한국의 간호사와 광부들이 독일에 오게 된 것은 1970년대.  

이밖에도 19세기까지는 기독교도가 카톨릭 신자와 결혼하는게 독일에선 어려웠다는 것, 도시 사람들이 전쟁중에 많이 죽고 옛동독 지방에서 도시로 이주해왔다는 것, 북독일 지역에 있는 베를린은 개신교 영향이 강해서 크리스챤 문화가 일반적이지만, 크리스마스트리는 70년전까지만 해도 일반적이지 않았다는 것 등등을 알게 된 알찬 투어였다. 

유럽대륙의 제국 흥망성쇠 역사와 현대 국제교류 상황에서 국가간 사람들의 이동과 교류는 것은 극히 자연스러웠다고 볼 수 있다. 2015년 독일이 난민을 대거 받아들였을 때, 난민 반대를 외치는 사람들에 대항해서 거리로 쏟아져 나온 많은 시민들이 외친 '우리도 난민이었다'는 말에 많은 사람들이 공감했던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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