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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첩과 만년필 Dec 01. 2023

나의 스승 L의 텀블러에는...

튀르키예(터키) 여행기 - 2

"여행자들에게 최고의 스승은 또 다른 여행자다." 

즐겁지 않으면 인생이 아니다 - 린 마틴 저 / 신승미 역 | 글담 |

  여행은 다른 지역에 손님으로 가는 것이다. 모르는 것 투성이라 주위 사람들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다. 현지인들에게 물을 수도 있으나 일상생활 만으로도 바쁜 그들에게 놀러 온 여행자 주제에 이것저것 물어보는 게 미안하기도 하다. 그러나 '동료' 여행자에게는 쉽게 물을 수 있고 반대로 그들이 도움을 청하면 기꺼이 돕게 된다. 


이스탄불에 도착한 첫날 저녁 나는 간단한 음식을 먹으며 민박집 사람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처음 랄랄라 하우스에서의 4박 이외에 별다른 계획이 없던 나는 귀를 쫑긋 세우고 여러 여행자들의 말을 듣고 있었다. 그러던 중 여행자 하나가 어수선하게 민박집으로 들어왔다. 모로코에서 넘어왔다는데 지마씨와는 구면인지 서로 형 동생 하며 반갑게 이야기를 나눴다. 걸걸한 목소리로 모로코, 그리고 그전 여행지인 노르웨이 이야기를 들려줬다. 여행하는 동안 면도를 하지 않아 수염이 상당히 길었고 장기 여행자답게 피부도 검게 그을려 있었다.


이렇게 그날 저녁 거실에 나타난 L은 이번 여행의 첫 번째 '스승'이었다. 여행을 많이 해본 그와 다닌 며칠 동안 크고 작은 많은 것을 배웠지만 가장 획기적이고 기억에 남는 것은 '텀블러 와인'이었다. 


테이블에 앉아 음식을 먹다가 L이 모로코에서 산 와인을 함께 마시자며 테이블 위에 올렸다. 와인을 생산하는 지도 몰랐던 모로코 와인은 저렴한 가격에 비해 꽤 맛있었다. 마시던 유리 찻잔에 와인을 따라 마시니 색다른 분위기가 나기도 했다. 몇 잔 마시다가 그가 모로코 식당에서 와인을 마신 이야기를 해줬다. 모로코는 이슬람 국가인데 "어떻게?" 하고 묻자 텀블러에 와인을 담아갔다는 거다. 


'콜럼버스의 달걀'을 목격한 사람들의 표정이 그때 나와 비슷하지 않았을까? 아하 그러면 되는 건데!!! 


대부분의 튀르키예 식당에서는 술을 팔지 않는다.* 그래서 음식과 함께 술을 마시고 싶으면 숙소에서 마셔야겠구나 생각했는데 이런 발상의 전환도 존재했던 거다. L은 이 방법을 모로코에서 만난 유럽 여행자들에게 알려줬다니 '천재'라고 추켜 세웠다는 이야기도 웃으며 덧붙였다. 여행 초반에 '뭔가 건질 게 있을까?' 하던 내 귀에 확 꽂히는 이야기였다.


다음 날 저녁 L과 함께 숙소 근처 마트에 가 와인을 두 병 샀다. 화이트 한병 레드 한병 씩. 우리는 그다음 날 아침 식사 후 비장한 눈빛을 교환한 후 화이트 와인 한 병을 따서 텀블러 2개에 사이좋게 나눠 담았다. 어떠한 느끼한 음식을 만나더라도 맛있게 먹을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왼쪽이 고등어 케밥 오른쪽은 도리뱅뱅이 비슷한 생선 튀김

현지인 맛집투어를 함께 다니며 점심으로 먹었던 생선요리에 화이트 와인을 살짝 곁들이니 훨씬 더 맛있었다. 그 텀블러에 담긴 와인이 느끼함을 잡아 주기도 했지만 약간의 일탈(?)이 주는 쾌감도 있었다.


그날 투어를 마치고 L과 함께 본 석양도 기억에 남는다. 참르자 언덕(Çamlıca Hill)에 올라 바라본 해 질 녘 이스탄불 유럽 사이드는 참 아름다웠다. 

L의 지도하에 노을을 향한 채로 찍어봤다. 

여기저기 좋은 위치를 찾아다니며 사진을 찍는데 언덕을 내려가기 전 가방을 좀 가볍게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민박집에서 빌려온 텀블러엔 멋진 시구도 쓰여 있었다.

풀밭 적당한 장소에 나란히 앉아 텀블러를 꺼내고 남은 와인을 마셨다. L과 함께 멋진 경치를 바라보며 마신 몇 모금의 와인은 참 특별했다. 산에서 부는 바람 못지않게 우리 마음을 시원하게 해 줬고 은밀한 기쁨을 제공해 줬다. 텀블러 와인은 우리의 즐거움을 표 나지 않게 상승시켜 줬다.


붉은 노을이 끝나가고 어둠이 올 때쯤 참르자 사원에 가기로 했다. 현 튀르키예 대통령이 정치적인 목적으로 지은 여러 자미(Camii - 터키어로 이슬람 사원이란 뜻) 중 가장 규모가 크다고 한다. 시간이 너무 늦어 내부에 들어갈 생각은 못하고 밖에서 사진 만 몇 장 찍고 언덕을 내려왔다.

참르자 자미의 야경. 왼쪽에 L의 뒷모습이 보인다.

4년 만에 떠난 해외여행이고 처음 와본 여행지라 어리바리했는데 L의 지도 덕에 꿀팁도 많이 배우고 여행에 대한 감각도 되살릴 수 있었다. 같이 다니는 중에도 고맙다는 말을 했었지만 글을 쓰는 지금 고마운 마음이 더 커진다. 아직까지 지키지 못한 '한국에 가서 한번 보자'라고 했던 말을 며칠 남지 않은 올해 안에 꼭 이뤄야겠다.




* 튀르키예는 사우디 아라비아 같은 이슬람 국가는 아니고 이슬람 신자가 많은 나라다. 하지만 대부분의 식당에서 술을 팔지 않고 관광객을 상대로 하는 소수의 식당에서만 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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