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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영랑 정원예술가 Feb 04. 2023

아버지의 꽃밭, 나의 첫 정원 인상

 천상의 화원처럼 12달 꽃을 피워주시던 Gardener , 나의 아버지

 가끔씩 누군가 묻는다 

"어디에서 정원,  꽃 밭에 대한  애정을 키웠는지, 어떤 계기가 있었는지?" 그러면 내겐 코끝을 찡하게 하는 

아버지의 모습이 먼저 다가온다. 나는 어린 시절, 꽃밭에 파묻혀 살았다  심지어 겨울이면, 방 아래목에 

바나나 나무가 들어와 살고 이른 봄부터  늦가을까지 집 주변에 꽃 들이 피고 지고 또 피었다. 어린 시절의 

아버지를 생각하면 딱 2가지 모습만 기억난다. 낮잠 주무시는 아버지와 꽃밭에 앉아 있는 아버지.

저 위 그림의 평상에 앉은 이는 나의 아버지이다. 마고자나 조끼 혹은 저고리를 입고 계신 모습 아버지 직업은 농사인데 아버지가 밭일, 논일하는 모습은 본 기억이  없다.  


1910년생, 48세에 외동딸을 얻으신 아버지를 내가 처음 기억하는 것이 할아버지 때가 되어서  이기도 하지만,권 씨 집성촌인 우리 마을에서는 나이 50이 넘는 사람이 논 밭에 들어가는 일 없이, 젊은 오빠들의 품앗이로 일이 이루어져서 이기도 하다.


아버지는 그때도 조선 시대에 사람 같아 보였다. 초등학교 졸업하고 중학교 가려하니,"언문 깨쳤으니 그만 집에 있어" 라 하시고, 교회 나갔더니 " 천 주 악 " 한다고 못 가게 하시고 , 인천 시내로 고등 학교를 갔더니 뱃 사람들 학교에서 계집에 다 망친다고 성화하시며 ,학교 못 가게 돈은 안 주시면서 족보상자 다 보이는데 돈을 감추고 엄마는 몰래 차비와 책값을 주고 수시로 집안 행사에 오시는 친척들의 용돈으로 간신히 학교 다니는 비용을 충당하게 했다.  


그렇게  초등학교 이후 아버지 반대에 맞선 전쟁을 치르느라, 잘 몰랐다. 아버지가 가꿔주신 꽃밭의 의미를 

그리고,  아버지를 기억하면 늘 견고한  옆모습과 대청마루 혹은 평상에서 낮잠을 자거나-(아마도 중학교 이후의 기억이라, 방학 때만 본듯하다) 마당의 꽃을 가꾸는 모습만 기억에 떠오른다. 


그리고 내 나이 24,  

갑자기 쓰러지시고 하룻밤 사이에 돌아가신 후 한없이 후회했다 아버지와 화해도 하지 못한 채 보내드린걸, 

그리고 어느 순간 나는 정원디자이너이자, 작가로 살고 있게 되었다. 그리고 정원작가가 된 계기가 무언가를 묻는 처음의 질문에 답을 찾다가, 내 어린 시절의 아버지를 기억해 내기 시작했다. 기억속 아버지의 모습과  그 집 그 꽃밭.  

 

스무 살까지 살았던 그 집에 가득 피었던 그 꽃과  특이한 바나나 나무 아버지의 꽃밭!

20살까지 나를 가꿔준  아버지의 꽃 밭 

내 어린 시절 집 둘레는 뺑뺑 돌아가며 봄부터 가을까지 꽃이 가득 피어났다. 매화, 진달래, 복숭아, 앵두, 달리아, 장다리, 황매, 백일홍, 원추리, 백일홍, 맨드라미  그리고 꽃밭 한가운데의 그 바나나 나무와 오른쪽 끝자락의 운용 향나무 .

 

어느 곳이나 있을 것 같던  뒷동산과 집옆 텃밭, 그리고 참죽나무 개나리 울타리였지만 그냥 조금 있는 게   

아니었다. 시선을 돌리면 다 꽃이 가득 눈에 들어 왔다.

  

이른 아침 햇살과 함께 안방 동창을 핑크빛으로 물들이던 해 묵은 진달래 그리고 마루 바람창을 열면  뒤편 굴뚝 뒤로 피던 현란한 홍매와 앵두.다른 집들은 감나무와 대추 과일나무가 많았는데 우리 집은 그 흔한 감나무는 없고 과일나무는 꽃이 예쁜  매화, 앵두, 복숭아, 살구들이 둘러 피고 지었다.열매를 먹은 기억은 거의 없고 그 열매로 담근 술만 기억나는 걸 보면 아버지는  "꽃보고 술마시고"같은 꿈을 꾸셨나보다.


그리고 안마당에서  마당으로 향한  쪽 문을 열면  마루에 앉아 탁 바라보는 곳에 바나나 나무가 마당가의 

꽃밭 한가운데 우뚝 서 있었다.그 옆에 옥잠화, 달리아, 백일홍이 피고지고, 뒤편으로 장다리 노란 꽃이 피고 

앞쪽으론 이름도 모를 분홍 보라 하얀 꽃들이 피고지며 이른 봄부터 늦가을 까지 색과 향기를 피워 주었다.

특히 내방으로 쓰던 사랑방 창을 열면  저 호수처럼 물을 담은 논벌판 뒤, 동그마한 산자락에 솟아올라 논바닥  물위로 긴 그림자로 덮던 포프라 세그루. 마을 입구 미끈한 적송이 무리진  노송지대를 배경으로 그 여린 분홍의 복숭아꽃을 피워 주셨다. 

복숭아꽃이 필 때 저 논벌판은 호수 같았고,그 호수 끝에  곧게 하늘로 뻗어 나무와 소나무 숲을 보는 듯 했다.  

그리고 마을 입구의 노송과, 논 건너 초등학교 뒷산의 소나무 숲, 이런 것들을 배경 삼아 저 작은  도토리 

나무 한그루 심어 놓으시고, 그 아래 평상에서 아버진 맨날 낮잠을 주무셨다. 


난 방학 동안에 내내  저런 풍경을 보았는데 아마도 아버진 새벽 물고를 보 신 후  그때가 한 숨 쉬실 때였나 보다. 


하지만, 봄가을 해 질 녘엔 저렇게 그 평상에 우두커니 앉아 그 벌판을 바라보며 계시곤 했다. 

<어떤 화려한 풍경보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저 풍경>"길게 포프라 그림자를 눕히는 논과 산 능선으로  퍼져

가는 노을 빛, 그리고 아버지의 등"  <노송과, 물에 잠긴 논 위의 푸른 벼, 그 너머의 긴 포프라>


그림을 좀 더 잘 그리면, 좋겠다. 정원배치도로 배운 실력으론  그 맛도 느낌도 못 살리고 있다. 나의 정원에 대한, 꽃 밭에 대한 애정은 그렇게 시작되었다.무뚝뚝한 조선시대 아버지 하나뿐인 딸에게조차 여자라고 엄했던 사람. 하지만  제일 좋은 것을 주고 싶고, 나누고 싶은 마음이었을까  천국 같은 꽃 밭을 가꿔 주시고 귀한 바나나 나무를 심어 동네 손님이나, 사람들과 마음을 나누고 싶었던 분 마을에  사진기만 들어오면 들고 와 

바나나 나무아래서 사진을 찍게 하시던 그 시절 그런 분.


그 아버지의 대화 방식은 그러했다. 이쁜 꽃으로 보여주고, 귀한 나무로 나눠주고 그리고 지금 나 또한 한참 재미나게  잘 나가던 나이에  잘하던 일을  뒤로하고 정원디자이너로 플랜팅 디자이너로, 정원학교 선생으로 직업을 갈아탔다. 

그리고 이제 그 일을 한 지 15년 꽃을 배운 지 25년이  되었다. 이 바닥에선 아직 경험이 짧지만, 그전에 한 예술창조경영 컨설팅 덕분에 바로 정원에  플랜팅에 비주얼 아트의 시각과, 영화의 무대 같은 , 한 편의 드라마 같은 정원 인문학을, 정원예술을 접목해 열심히 연구하고  창작과 위탁 디자인을 함께 하고 있다. 


그리고 중요한 일을 할 때마다 책상 앞에 아버지를 소환해 모시고 새 일을 시작한다. 그렇게 넌지시 내 생활에 밀어 넣어 주시고, 나를 그 꽃으로 둘러쌓아 키우셨던 그 아버지의 마음으로, 그 사랑으로 나도  그 공간에 들어올 사람에게 그 사랑을 흘릴 수 있도록..

:

무지 보고 싶어요 아버지...!그리고 살아계신 동안 못해서 많이 후회했던 말 들어주세요 

:

:

" 보고싶어요!!!"할수 있다면 그시절로 돌아가 화해하고 싶어요. 마지막 전달 그말 하려고 안방문을 열었다

그만  단단한 아버지 모습에  다시 문을 닫고 더이상 말할 기회가 사라진 그말 


"저도 아버지 좋아해요!!." 이 말을 꼭 하고 싶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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