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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이스 로리의 소설 <기억전달자>를 사람들은 디스토피아 소설이라 한다. 소설의 주인공 조나스가 사는 곳은 커다란 전쟁으로 인해 인류의 멸망과도 같은 경험을 하고 난 후 생겨난 절대적 평화와 안정을 추구하는 공동체이다. 이 집단은 전쟁과 폭력과 같은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사람들의 감정과, 감정을 불러일으킬 여러 요소들을 철저히 제한하고 통제한다. 결혼, 출산, 육아, 노후까지도 완벽히 분업화 하고 공동으로 책임진다. 그로인한 부당한 죽음, 자유의 박탈은 과연 이것이 옳바른 미래상인가 한번쯤 깊이 생각하게 한다.
인간의 자유를 제한하고 누군가 그것을 통제하는 것이 결코 바람직한 것은 아님을, 그래서 그러한 미래의 모습이 가슴 한 켠 씁쓸하고 서늘하게 다가오는 것을 책을 읽는 내내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 불편한 미래의 모습을 그린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소설 속 육아시설과 노인시설 만큼은 “어, 괜찮은데?” 싶었다. 젊은 시절을 보낸 노인들은 깨끗하고 안락한 노인시설에 들어간다. 그곳엔 노인 돌봄 임무를 부여받은 사람들과 임무를 부여받기 전 자신의 적성을 찾기위한 임시 임무를 선택한 학생들에 의해 운영되어진다. 그곳에서 임무를 맡은 모든 이들은 노인들을 진심으로 공경하고 존경한다. 노인들이 임무해제(죽음)가 될 때 까지 그들은 최선을 다해 노인들을 돌본다.
“더 시간이 흘러 때가 되면 두 분은 노인의 집으로 갈 테죠. 거기서 존경받으면서 잘 보살핌을 받을 거예요. 그러다 임무 해제 때가 되면 기념식을 열어 축하를 받겠죠.” (기억전달자 p.212)
소설 속 이들에게 임무해제는 축복과도 같았다. 물론 사람의 생과 사를 누군가가 결정한다는 것은 있을 수도, 있어서도 안될 일이다. 내가 소설 속에서 긍정적이라 느꼈던 것은 축복과도 같은 임무해제(죽음)가 아닌 소설 속 노인 시설과 그 시설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였다. 때가 되면 당연히 가게 될 곳, 살아온 삶을 오롯이 인정받고 온전히 존경받는 노인들, 적절한 의무와 바람직한 사명감으로 열심히 일하는 돌봄 종사자들. 이것은 소설 속에서 쑥 꺼내와 현실에서 재현하고픈 부분이다.
나는 40대 후반이다. 내 친구들은 내게 “시할머니 모시는 내 또래 사람은 내 주변에서 너 밖에 없어.”라고들 한다. 시아버지 간병을 했던 30대 초반에도 그랬다. “시아버지 병수발 하는 내 또래 사람은 내 주변에서 너 밖에 없어.“ 그럴 때 마다 나는 부모를 직접적으로 봉양하는 세대는 아마도 우리가 마지막이지 않을까 생각하곤 한다.
시할머니와 함께 살면서 나는 종종 나의 노후를 생각한다. 나는 나의 윗대의 직접 봉양을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선택했지만, 내 아이에게 만큼은 나의 노후를 책임지라 강요하고 싶지 않다. 내가 건강하게 70을 맞이한다면 앞으로 20년 후일테지. 20년이면 지금보다 노인 요양 시설이 보편화되고 법적 보장도 늘어나겠지. 나의 세대는 할머니 세대보다 독립적이고 자의식도 강하니 시설에 대한 거부감도 지금보다는 훨씬 덜할것이다. 자식은 부모의 직접부양에 허덕이지 않아도 될 것이고, 부모는 그런 자식에게 죄스러워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소설 속 노인시설처럼 (물론 강제적 임무 해제가 없는^^) 돌봄의 대상자는 마음 편히 마지막을 준비할 수 있고, 돌봄의 주체는 지침 없이 대상자들을 도울 수 있는 그런 시설이, 그런 시스템이, 그런 인식이 하루 빨리 만들어지고, 자리 잡고, 보편화 되었음 좋겠다. 어른을 공경하지 말자는 것이 아니다. 부모를 봉양하지 말자는 것이 아니다. 부모와 자식이, 청년과 노년이 각자의 자리에서 버겁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있다. 집안일을 대체하는 기계들이 쏟아져 나오고, 사람들의 직업을 앗아갈 기술들이 나날이 발전하고 있다. 발전하는 것은 기계 뿐만이 아닐 것이다. 인공지능 뿐만이 아닐 것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 관계, 인식, 규범, 형태, 관념도 변화하고 확장되고 점점 나아질 것이다. 우리는 더이상 노후를 걱정하지 않게 될 것이고, 나는 직접돌봄의 마지막 세대로 기록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