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발사항에 드러난 내 심리 상태 탐구
수학 시간이 되었다. 숫자가 가득한 학습지 한 장씩 나누어 주었다. 뒤쪽에 앉아있는 수학 비호감파들은 벌써 초점 없는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고 있다. 눈은 허공에 있지만 마음은 나를 향해 속삭인다. ‘선생님 저 수학 안 좋아하는 거 아시죠?’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또 수학 기본만이라도 지켜달라 사정한다.
“빵점 맞아도 좋다! 제발 글씨 좀 반듯하게 써 다오.”
국어는 맞춤법을 틀려도 앞뒤 맥락만 맞으면 되지만 수학은 아니다. 숫자 하나 틀리면 바로 땡이다. 천방지축 열세 살 남자아이들한테 입이 닿도록 이야기한다. 하지만 여전히 천하태평. 쇠귀에 경 읽기다. 숫자 0을 6자처럼 쓰고 숫자 6자를 8자 모양으로 써놓아 시험지에 빨간 소나기가 쏟아진다. 90점 먹을 녀석이 50점이라니! 담임은 가르친 보람도 없이 땅을 칠 때가 몇 번 인지 모른다.
자기도 알아보지 못하는 필체로 괴발개발 식을 써 놓고 턱짐을 쥐고 있는 무리들이 눈에 들어온다. 모른 체 다가가 시험지를 훑어보니 한숨이 절로 나온다. 곱하기 기호를 더하기처럼 써 놓고도 제가 틀린 줄 모른다. 녀석의 뒤에 서서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수학 계산식은 깔끔하게 써라 하지 않았느냐? 훈아"
"글쎄.... 그게 잘 안 되는데요. “
끄응....게으름과 무성의함을 감추고 슬쩍 닭발을 내민다. 어쭈구리 한번 해보자는 거냐. 나는 설익은 열세 살 사춘기의 예민한 부분을 툭 건드린다.
"이눔아, 너 여학생한테 편지 보낼 때도 이런 글씨로 써 보내냐?"
하지만 상대는 게으를 뿐만 아니라 넉살까지 좋다. 녀석은 이마에 난 여드름을 손가락으로 뜯으며 말했다.
"예! 걔가 평소 하던 대로 하는 것이 좋다고 해서 그렇게 쓰는데요 "
이번에는 아예 넙적한 오리발이다. 나는 개의치 않고 목소리를 가다듬는다.
"아이야, 글씨는 마음의 옷과 같은 것이란다. 이렇게 무성의하게 쓴 편지를 여학생에게 보내는 것은, 청결치 못한 팬티 차림으로 대로를 활보하는 꼴과 다름없는 것이다."
막상 말하고 나니 별로 적절하지 않은 비유인 것 같았다. 그러나 웬걸. 여드름 사춘기가 헤벌쭉 웃었다. 그리고 엉망진창으로 써놓은 수학 계산식을 지우개로 삭삭 지우고 다시 쓰기 시작했다. 녀석이 벌써 철들었나? 나는 한껏 고무되어 돌아섰다. 그런데 뒤에서 갑자기 딴 녀석이 킥킥 웃었다. 나는 돌아서서 재빨리 꿀밤 하나를 날려 응징했다.
"이눔아. 뭐가 우습냐?"
녀석은 한 손으로 제 머리통을 움켜쥐고 다른 손으로 옆에 앉은 녀석을 가리키며 고자질한다.
"그게 아니고 예. 이 자슥이 갑자기 내 팬티가 핫팬티라 한다 아닙니꺼"
아....불경스럽게도 요 녀석들은 ‘청결치 못한 팬티 차림으로 대로를 활보’라는 비유 중에서 오로지 팬티라는 용어에만 집중한 것이다. 고자질당한 녀석이 화들짝 놀라 눈이 휘 동그레 지더니 옆 자리에 있는 또 다른 녀석을 걸고넘어진다.
"야는 망사팬티라 했어요!"
얼씨구, 절씨구 자알 논다. 녀석들에게 좋은 말로 타이르기에는 이미 선을 넘었다. 말없이 두 녀석의 볼을 사정없이 당겨 징벌했다. 모르긴 몰라도 길쭉하게 잘 늘어지는 볼의 탄성이 망사로 만든 그것 버금간다. 그러고 보니 그 옆에 고개를 푹 숙인 채 웃음을 참고 있는 녀석도 수상했다. 녀석을 마저 다그쳐니 자백한다.
"나는 그냥 야광 팬티라 그랬는데요?"
이쯤 되면 끊어야 한다. 그냥 두었다가는 천지도 모르고 나아갈 철없는 중생들이다. 어느새 훈계는 물 건너갔고 더 이상 주저리주저리 입바른 소리도 따분할 터이다. 다음번 수학 시간에 더 적절하고 감동적인 비유를 들어 깔끔하고 단정한 수학 문제풀이의 중요성을 설교하는 것이 옳다.
“수학 공책 내일 검사할 거다! 또박또박 제대로 써!"
그런데, 그렇게 억지로 상황을 마무리하고 칠판 쪽으로 돌아서는 내 머릿속에 아이들이 금방 나열한 형색 색색 속옷들이 떠올랐다. 왜 뜬금없이 체신머리 없이 그것들이 떠올랐을까. 아이이 집으로 돌아간 뒤 그 상황에서 내 심리상태를 정리해보았다.
1. 동상이몽
아이들은 딴에는 여기저기 주워들은 여러 가지 속옷들을 그저 재미있고 웃기는 개그처럼 발랄하게 열거했을 뿐인데, 내가 필요 이상으로 경계하지 않았나 하는 엄숙주의 또는 고지식함.
2. 동병상련
그러니까 말잇기 놀이처럼 나도 '코끼리 팬티!" 하고 더불어 장난치고 싶은 마음이 숨어 있었던 것 같은 느낌. 우습고 재밌는 그 얘깃거리를 놓치지 않고 같이 깔깔대며 웃어넘기고 싶었던 호방한 마음. 하지만 결코 터놓고 즐거워할 수 없는 어색한 내 마음.
3. 천만다행
핫팬티 망사 팬디 야광 팬티에 머무른 아이들의 장난스러움 안심함. 외설적 광고와 음란성 예술이 뒤엉켜 혼란스러운 사이버 세태에, 아이들의 철없는 호기심에 불을 댕겨 내가 답변 못할 질문으로 이어질까 나는 얼마나 조바심했는지 모름.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