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를 위해 그대로 남는다는 것
30년 전.
탑리역으로 발신인이 ‘서울 장위동’이라고 쓴 편지 한 통이 배달되었습니다.
탑리역 역무원님들께
안녕하세요. 저는 지금부터 약 30년 전 대학생 시절에 탑리역 역무원 중 한 분에게 도움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 당시 차비가 없어 전전긍긍하던 제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시고,
“학생, 이리 와”
하시고, 차표 한 장과 추가로 필요한 차비를 주셔서 저는 무사히 집으로 갈 수 있었습니다.
그 후, 그 은혜를 갚으려는 마음은 있었으나, 마음뿐이고 실행에 옮기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하루 한 번씩 왕복하는 동해남부선 철도를 이용해야 하는 까닭에 탑리역에 내리면 이틀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경제사정에 객지에서 하룻밤 더 묵는다는 것은 비용만으로도 만만찮은 저였습니다.
저를 도와준 그분의 은혜에 조금이나마 감사하는 마음을 표현하고자 고민하다가 이제야 이런 방안을 마련했습니다. 탑리역에 근무하시는 분들이 가벼운 식사라도 한 끼 드시면 좋겠다는 의미에서 이렇게 작은 촌지를 보냅니다. 저를 도와준 그분은 아마 지금은 퇴직하시고 초야에 계시겠죠. 그분께 진심으로 감사하고 그분의 그런 마음이 이 사회에 널리 널리 퍼져서 모두가 도와주는 사회가 될 수 있는 분위기가 되면 더 좋겠습니다. 더운 여름날 복무에 건강 조심하시고 안녕히 계십시오. -오래전에 탑리역을 거쳐갔던 대학생 올림 -
10년 전.
새내기 대학생 딸이 친구와 생애 첫 기차여행을 하였습니다. 딸은 탑리역에서 본 그림 같은 광경을 이야기해주었습니다.
동해역에서 출발한 기차를 탔어요. 차창 너머로 생전 처음 보는 풍경들이 영화처럼 지나고 있었어요. 얼마나 달렸을까. 긴 철길이 들판과 마을 사이를 지나는 곳에 간이역이 있었어요. 기차가 도착하자 사람들은 분주한 걸음으로 플랫폼을 빠져나갔어요.
사람들 속에 한복 차림을 한 노부부도 지나가고 계셨어요. 하얀 모시옷에 중절모 쓴 할아버지와 초록색 치마에 흰모시 저고리를 곱게 차려입은 할머니. 두 분 옷차림은 눈에 띄게 정갈하고 고와서, 지나가는 사람들의 울긋불긋한 옷차림이 초라하게 보일 정도로 빛이 났어요.
나는 옆자리에 있는 친구를 깨워 창밖을 가리켰어요. 우리는 차창에 얼굴을 바짝 대고 객차 앞을 지나가시는 두 분을 유심히 바라보았죠. 머리카락이 새하얀 백발인 할아버지는 양손에 알록달록 무늬가 있는 가방을 들고 씩씩하게 앞서 지나가시고, 그 뒤 서너 발자국 뒤에 할아버지와 똑같이 머리에 흰서리가 내린 할머니가 다소곳이 따르고 있었어요.
성큼성큼 걷는 할아버지와 뒤따르는 할머니 사이 거리가 점점 더 벌어졌어요. 그런데도 할아버지는 계속 앞만 보고 걷는 게 아니겠어요. 우리나라 오랜 전통의 남성상! 친구와 나는 마주 보고 쿡쿡 웃었답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어요. 할아버지는 플랫폼과 역사 사이에 있는 철길을 건너자마자, 양손에 든 짐을 내려놓고 바삐 할머니 쪽으로 되돌아오셨어요. 그리고 할머니에게 손을 내미셨어요. 할머니도 자연스럽게 당신의 손을 할아버지에게 맡기더군요. 두 분은 그렇게 손을 잡고 천천히 역사 쪽으로 걸어가셨어요.
우리가 탄 기차는 그 아름다운 순간을, 촬영 카메라가 롱 샷으로 주인공을 따라가는 것처럼, 고운 영상을 고스란히 보여주었어요. 차창으로 바라본 할아버지 할머니가 너무너무 예뻤어요. 태어나서 한 번도 그런 생각 안 해봤는데, 나도 저렇게 늙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진짜 예뻤어요! 우리는 두 분 뒷모습을 향해 막 손을 흔들었어요.
오랜 기다림.
돌아오는 사람들은 기차에 내려 설렘을 안고 집으로 갑니다. 외로운 사람은 그리움을 안고 혼자 떠납니다. 대합실에 앉아서 한참 동안 기다리던 사람도 막차를 타고 떠나 갔습니다. 누군가는 그후로도 몇번 추억을 안고 왔다가 다시 떠났습니다. 이제 간이역에는 손님도 역무원이 없이 비어있습니다. 하지만 누군가를 위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