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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형식 Feb 24. 2022

꼬따꾸를 찾아서

"헐!" 이라고 해 주십시오.

'샤방 샤방’ 이라는 말이 좋습니다. 그 말을 하면 고운 햇살이 작은 원을 그리며 반짝거립니다. 오래 쳐다봐도 눈이 부시지 않는 해맑음. 겸연쩍지 않게 또는 부담스럽지 않게 좋은 마음을 전하기 딱 안성맞춤입니다. 그 말이 숨결로 나오는 순간, 모두 다 샤방 샤방해집니다.


아기들은 샤방샤방합니다. 우리 딸이 한참 말을 배우기 시작하던 무렵이었습니다. 방 안을 날아다니는 파리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무섭다고 잉잉 울던 두 살, 빌딩 위에 둥실 떠 있는 애드벌룬을 따 달라고 떼를 쓰던 아가였을 때였습니다. 딸이 방 안에서 일상에 지쳐 잠든 제 엄마의 얇은 눈꺼풀을 위로 당기며 말했습니다. 

"눈 켜! 눈 켜!"

아내가 눈을 비비며 일어나자, 이번에는 책상 쪽으로 손을 가리켰습니다.

"도니아니! 도니아니!"     


도니아니? 젊은 엄마는 생전 처음 듣는 말에 멀뚱해졌습니다. 아기는 자꾸만 애타는 목소리로 ‘도니아니’를 외쳤습니다. 뭔지 모르지만 책상 위에 ‘도니아니’라는 물건이 있나 봅니다. 아내는 연필, 동화책, 화장지, 필통 등을 차례로 들어 보였습니다. 하지만 딸은 도리질을 했고, 아내는 그놈의 ‘도니아니’ 찾기에 진땀을 뺐답니다. 그러다가 언뜻 색연필을 들어 보이자 딸이 활짝 웃으며 박수를 쳤다고 합니다. ‘도니아니’는 색연필이었습니다.


어원은 이렇습니다. 그즈음 아내는 딸한테 그림 그리기를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아내는 색연필을 아기 고사리 손을 함께 쥐고, 하얀 도화지에 동그라미를 그리면서, “동그라미 동그라미” 라고 속삭였지요. 하지만 아기는 도화지 위에 그려진 도형 명칭보다, 쓱쓱 칠하면 그림이 나타나는 도구에 쏙 빠진 것입니다. 엄마가 속삭이던  ‘동그라미’가 제 귀에는 ‘도니아니’로 들렸고, 그래서 형형색색 그림이 요술처럼 나타나는 색연필을 '도니아니'라고 한 것입니다. 아기는 엄마의 소박한 학습지도와 상관없이 나름대로의 관점으로 언어 학습을 한 것입니다. 


범상치 않는 신생 언어는 또 있습니다. 어느 날 딸이 ‘꼬따꾸, 꼬따꾸!’ 하면서 칭얼댔습니다. 아내는 또 다시 등장한 이상한 신조어의 어원을 찾으려고 했지만 '꼬따꾸'의 정체를 알 수가 없었습니다. 동그라미와 '도니아니'처럼 상호 유사성을 가지는 파생어가 아니었지요. 이번에는 두 살짜리 딸이 스스로 엄마에게 해답을 주었습니다. 아기는 아장아장 전축 앞으로 걸어가더니 마이크를 꺼내 흔들었습니다. 아하! 마이크가 바로 ‘꼬따꾸’ 였습니다. 전날 아내가 장난감 마이크를 입에 대고 딸한테 동요를 가르쳤거던요.  

 

"꽃밭에는 꽃들이 모여 살고요. 우리들은 유치원에 모여 살아요.

우리 유치원 우리 유치원, 착하고 귀여운 아이들의 꽃동산~"     

눈치채셨습니까? 노래 첫 소절 '꽃밭에'가 '꼬따꾸'라는 어휘로 딸에게 전달되고 그것이 마이크를 지칭하는 용어로 학습된 것입니다. 꼬따꾸는 마이크였습니다. 아기는 노래보다 작은 목소리가 크게 들리는 신기한 도구에 집중한 것입니다. 이번에도 엄마의 자상한 음악교육은 의도하지 않게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신조어를 탄생시킨 것입니다.      


불현듯 세상에 나와 사라진 ‘꼬따꾸’를  나도 한번 쓰고 싶었습니다. 이를테면 노래방에만 가면 마이크를 독차지하는 친구에게 “어이 친구, 이제 그만하시고 꼬따구 넘기시지.”라고 해볼까 합니다. 그러면 친구가 멀뚱해져서 대체 어느 나라 말이냐고 묻겠지요. 나는 시치미를 뚝 떼고 지구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마케마케와 하우메아라는 행성에서 쓰는 언어라고 뻥을 쳐볼까 합니다. 술 취한 친구는 눈을 껌벅거리며 '이 무슨 개소리?' 하겠지요.

      

'뿌뽕이'도 있군요. 우유병을 뜻하는 신조어입니다. ‘뿌뽕이’가 왜 우유병인지 이유는 밝혀내지 못했습니다만, 한동안 나는 딸의 별명을 뿌뽕이로 불렀습니다. 그 외도 함박수미(많이), 하겸(아이스크림), 고이돌(마요네즈)이라는 희한한 용어가 있었답니다. 영원히 풀지 못한 신비한  말들은 오롯이 딸의 것이고, 소박한 시절의 추억은 내 차지입니다.


개인적으로 ‘헐’이라는 말도 맘에 듭니다. 짧은 감탄사 ‘헐!’ 속에 중용의 미덕이 숨어 있는 듯합니다. 내 탓도 네 탓도 아닌 아이러니한 상황에 요긴하게 쓸 만합니다. 뭐라고 딱 꼬집어 해답을 낼 수 없을 때, 논리적 주장이 오히려 거추장스러울 때, 그냥 ‘헐!’이라는 한 마디가 딱 입디다. 꽉 조인 여러 개 단추 중에서 한 개쯤 풀어도 되는 너그러움이 묻어 있습니다. 


오늘 이야기가 어떠신지요? 혹시 철 지난 딸 사랑이 눈꼴시러워 못 봐주겠다는 분이 계시다면, 그냥 "헐!" 이라고 해주십시오.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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