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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형식 Dec 14. 2021

오렌지 향기 바람에 흩날리고

어렴풋이 행복했던 젊은 날 그 겨울밤

나는 겨울은 좋지만 추위는 싫다. 배고픈 건 참아도 추운 건 못 참겠다. 피 끓는 이십 대에도 그랬다. 입동부터 이듬해 꽃샘추위가 물러갈 때까지 줄기차게 내복을 입었다. ‘표 안 나게 입은 내복 한 벌, 열 밍크 안 부럽다.’가 겨울나기 소신이었다. 그런데 며칠 전, 방심하는 사이 추위한테 당했다.  

    

늦게까지 설거지를 마친 아내가 양손에 쓰레기봉투를 들고 어둠이 내린 밖으로 나갔다. 못 본 척하기에는 양심에 찔려 따라나섰다. 밖은 진짜 추웠다. 아파트 한쪽 쓰레기 수거함까지 30미터 남짓 걸어가는데 콧물이 찔끔했다. 슬리퍼만 걸친 발가락이 떨어질 것 같았다. 꽁꽁 묶은 쓰레기봉투를 수거함에 홱 던지고 돌아서니 찬바람이 앙칼지게 온몸을 휘감았다. 잔뜩 움츠리고 종종걸음을 걷다가 도저히 안 되겠다 싶었다. 그래서 아내한테 말했다. 

“춥다! 뛰어 가자!”       


그렇게 한 마디 던지고 쏜살같이 어둠 속을 달렸다. 헐레벌떡 아파트 현관 안쪽에 이르러 한숨 돌리고 보니, 어둠 속에서 아내가 두 손으로 시린 뺨을 감싸며 걸어오고 있었다. 나는 좀 계면쩍었다. 이기적인 남편을 향해 아내가 픽 하고 웃었다. 아내는 1989년 겨울을 떠올렸을 것이다.    

  

그해 겨울, 큰길 도로변에 ‘오렌지 향기 바람에 흩날리고’라는 이름을 가진 포장마차가 있었다. 우리는 연인 사이였고 목하 데이트 중이었다. 그 포장마차에는 사십 대 부부가 잉꼬처럼 함께 손님을 맞이했다. 우리는 희미한 전등 아래서, 안주 한 접시와 소주 한 병 그리고 사이다 한 병을 시켜 놓고 설레는 앞날을 이야기했다.    

  

아쉽게도 깊은 밤이 서둘러 왔고 우리는 헤어질 시간이 되었다. 그녀와 나는 포장마차에서 나와 가로등 불빛 아래 나란히 걸었다. 밤거리가 텅 비었고 심술궂은 찬바람만 도로를 점령한 채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버스정류장까지 그녀를 바래다주는 길에 부는 바람이 매정했다. 그녀가 바짝 붙어 팔짱을 꼈다. 걷다 보니 문득 측은해 보였다. 나는 남자로서 무언가 의미 있는 행동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말했다.

“춥제?”     


그녀는 청춘영화 여주인공처럼 웃으며 끄덕였다. 나는 남자 주인공처럼 걸음을 멈추고 외투를 벗어 그녀 어깨를 감싸 주었다. 그녀가 감동한 듯 두 눈이 반짝거렸다. 찬바람 부는 이 길이 우리 둘이 헤쳐 가야 할 앞길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가슴을 펴고 당당히 걸었다. 아! 그러나 옷 한 겹의 체감온도 차이가 그렇게 클 줄은 미처 몰랐다. 


살갗으로 파고드는 냉기는 상상을 초월했다. 이를 앙다물었지만 내 의지와 상관없이 떨리는 턱을 어떻게 할 수 없었다. 가야 할 길은 시베리아처럼 아득한데 한파는 인정사정이 없었다. 만약 내 귀를 손가락으로 건드리면, 여지없이 땅바닥에 톡 떨어질 것 같았다. 잠바를 벗어 준지 불과 5분 만에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 미안한데... 잠바 다시 벗어 주면 안 되겠나?”     


한순간 그녀가 ‘픽’하고 웃었다. 외로운 남자는 고갯길에 주저앉고 말았다. 하지만 그녀는 참을성 없는 허풍쟁이를 위해 순순히 외투를 벗어 주었다. 


이제 그 젊은 날의 오렌지 향기는 바람에 날리어 사라진 지 오래다. 이윽고 중년이 된 아내는 쓰레기 분리수거에 동행해 준 나를 위해 두부김치와 막걸리를 내놓았다. 


돌아보면 그 시절 젊은 내가 ‘당신을 위해 내 모든 것을 바치겠노라’는 맹세는 뻥이었다. 남편과 가장으로서 내가 한 일도, 어쩌면 추운 날 외투 한 벌로 전하는 따뜻함 정도였다. 그나마 내가 넘겨준 외투는 야윈 아내 어깨와 참새 같은 아이들 체온으로 데워 다시 내게 전해 오곤 했다. 그 겨울밤 한동안 잊었던 오렌지 향기가 문득 내 코를 간질이는듯하여, 이기적인 나는 어렴풋이 행복했다.              


<사진 출처: 픽사 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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