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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형식 Jan 02. 2022

말괄량이 조카를 누가 길들이랴

여름날, 꼬마 조카와 중늙은이 삼촌의 신경전 한 판


시골 누나 집에 다녀오는 길에 여섯 살 조카를 데리고 왔다. 이름은 '김채원'이다. 채원이는 혼자서도 잘 논다. 기특할 정도다. 내가 선풍기 앞에서 하품을 하든 말든, 텔레비전을 켜놓고 졸든 말든, 저 혼자 노래하고 춤도 춘다. 무료해진 내가 슬쩍 다가가 말을 걸어도 '뭔 볼 일 있수?' 하는 듯 쳐다보기만 해서, 중년의 외삼촌을 머쓱하게 할 정도다.          


채원이는 건방지기도 하다. 제 나이보다 무려 일곱 배가 넘는 나에게 대놓고 반말이다. '이리 와봐!' '저것 해줘!' 따위의 명령형 말투는 예사고, '배불뚝이!' '바보야. 메롱!' 등 인신공격성 발언도 서슴치 않는다. 기분 좋으면 시키지도 않은 개다리춤을 선보이지만, 수틀리면 눈초리를 새초롬하게 뜨고 고집 피우는 품새가 장난이 아니다.          


집으로 돌아오던 날 누나에게 철없는 외동딸의 훈육 교사를 자청하였다. '범 무서운 줄 모르는 하룻강아지김채원'을 우리 집으로 데려와 외삼촌의 권위와 위상을 체험시켜, 마침내 어른에 대한 공경심과 반듯한 예의범절을 갖춘 참한 꼬마 아가씨로 길들일 것을 약속했다.     


채원이와 함께 집으로 온 나는 우선 말수를 줄였다. 또한 적절한 지도 조언과 언어교정 활동을 병행하였다. 역시 꼬마 아이의 적응력은 대단했다. 한 사흘쯤 지나니 효과가 보이는 듯했다. 식사 전에 '잘 먹겠습니다'와 식사 후 '잘 먹었습니다' 라는 인사말은 안 시켜도 따라 할 정도였다. 맹모삼천지교는 참 멋진 교육 방법임을 실감하였다.      


매일 오전 10시, 아들딸은 책상에 앉는다. 책상 위쪽 벽에는 '방학 한 달 잘 보내면 새 학기가 즐겁다!'라고 쓴 표어가 붙어 있다. 알뜰한 방학 생활을 위해 내가 손수 지어서 붙여준 글이다. 날씨는 덥고 에어컨은 없지만 내 새끼들은 땀을 흘리며 학습에 열중했다. 그런데 무심코 언니 오빠 모습을 보고 있던 채원이가 백지 한 장을 들고 내게 다가왔다.

"삼촌! 나도 글 써 줘! 공부할래."          


옳거니! 나는 언니 오빠의 불타는 향학열이 마침내 말괄량이 꼬마 아가씨에게 전이되었음을 직감하였다. 갑자기 튀어나온 녀석의 반말에 한마디 하고 싶었지만 대의를 위해 눈을 감았다. 그리고 백지 맨 윗줄에 채원이가 따라 쓸 문장을 큼지막하게 또박또박 써 주었다. 

- 나.는.외.삼.촌.이.최.고.좋.아.요 -          


내가 쓴 문장을 받아 든 채원이가 더듬더듬 읽었다. 아들과 딸은 '킥킥' 거렸고 나는 좀 겸연쩍었다. 하지만 뭐 어때! 글자도 익히고 어른에 대한 공경심도 기르니 꿩 먹고 알 먹는, 이른바 통합 학습이 아니겠는가. 채원이도 외삼촌의 깊은 속을 헤아렸는지 두말하지 않고 밥상 겸 책상으로 갔다.          


방바닥에 비스듬히 누워 세 명의 학동이 학업에 열중하는 모습을 보니 정말 흐뭇했다. 말괄량이 채원이가 단정한 자세로 또박또박 글 쓰는 이 모습을 누님이 봐야 할 텐데... 누님은 내게 얼마나 감사해할까. 나는 괜히 으쓱한 기분이 들어, 누나가 나에게 제공할 반대급부를 머릿속으로 헤아려 보았다.          


내가 그런 공상에 잠겨 있는 동안 아이들이 공부를 마치고 주섬주섬 뒷정리하였다. 그런데 채원이 눈치가 이상했다. 여느 때는 제가 쓴 글을 자랑하고 싶어 안달인데 학습 결과물을 그냥 가슴에 안고 오락가락하고 있었다. 나는 속으로 삐뚤빼뚤 쓴 글씨가 민망해서 그러겠거니 하고, 텔레비전 화면에 나오는 야구 경기에 몰두하고 있다.      


그런데 채원이가 쓴 글을 본 아들과 딸이 빵 하고 터졌다. 뭔데? 뭔데? 얼른 채원이가 쓴 과제를 낚아채 보았다. 아뿔싸! 백지 맨 윗줄에는 분명 '나.는.외.삼.촌.이.최.고.좋.아.요'였는데 채원이가 아래에 따라 쓴 내용은 그것이 아니었다. 또박또박 써 야무지게 써 내려간 그 문장은 이랬다.

- 나.는.외.삼.촌.이.시.러' -       


맹모삼천지교가 한순간에 와르르 무너졌다. 하도 기가 막혀 "허허" 웃고 말았지만, 훈장님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아들과 딸은 나를 위해 채원이를 설득하였다.

"채원아, 외삼촌이 널 얼마나 좋아하는데 왜 그랬어?"

"외삼촌 좋아요라고 써 봐. 응? 우리 채원이 참 착하지?"          

그러자 채원이는 인심 쓰듯 “그래 좋아!” 하고 '시러' 라는 글자 위에 가위표를 그었다. 그리고 맨 밑줄에 덤으로 한 줄 써 주었다. 

- 나.는.외.삼.촌.이.최.고.좋.아.요 -     


작전을 바꾸기로 했다. 다음 날 어린 학동들이 어제 돌발상황을 잊어버린 듯한 저녁, 나는 어린 조카가 외삼촌의 따스한 목소리를 느낄 수 있도록 최대한 다정스럽게 말을 걸었다.

"채원아. 먹고 싶은 거 없어? 삼촌 지금 슈퍼 갈 건데…."          

채원이는 슈퍼 간다는 말에 두말 않고 따라나섰다. 나는 꼬마 손목을 꼭 잡고 조심조심 계단을 내려갈 참이었다. 그런데 요 녀석은 마실 나온 강아지 마냥 저 혼자 쪼르르 앞서 달려 가더니, 여기 저기를 기웃거리며 도무지 정을 나눌 틈을 주지 않았다.      

    

내가 슈퍼에서 우유와 사이다를 살 때도 그랬다. 재빨리 껌 한 통을 챙기더니 자전거와 킥보드가 지나가는 길을 겁도 없이 요리조리 피하며 저만치 앞서 갔다. 에휴, 나는 우유와 사이다가 들어 덜렁거리는 비닐봉지를 들고 아이의 꽁무니를 허겁지겁 따라갔다. 정서적 교감을 나누어 보리라는 희망 사항은 벌써 물 건너간 듯했다. 


그럭저럭 아파트 계단까지 앞서가던 녀석이 휙 돌아서며 말했다.

"여기 맞아요?"     

똑같이 생긴 아파트 입구가 헷갈린 모양이었다. 난 괜히 심통이 나서 "아닌 것 같은데" 하며 슬그머니 지나치는 척했다. 그런데 채원이는 다 알고 있다는 듯 다시 계단을 쪼르르 오르기 시작했다. 어쭈구리? 나는 재빨리 계단 밑쪽에 몸을 숨겼다. 콩콩 계단을 오르던 채원이도 내 기척을 살피려는 듯 발자국 소리를 멈추었다.      


사십대 중반 외삼촌과 여섯 살 조카의 팽팽한 신경전은 몇 초간 팽팽하게 지속되었다. 하지만 내가 고개를 삐쭉 내밀어 올려보는 순간. 태연히 아래를 내려다보는 채원이 눈과 마주치고 말았다. 채원이가 손짓을 하며 말했다.

"같이 가자. 뽀뽀해 줄게."          


으잉? 뽀뽀? 그것은 일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하는 호의였다. 나는 계단을 두 칸씩 성큼성큼 올라 채원이 옆으로 다가가 무릎을 굽혀 자세를 낮추었다. 채원이는 정말 내 왼쪽 볼에 뽀뽀를 선사했다. 내가 활짝 웃으며 손을 내밀자, 고사리 같은 제 손을 흔쾌히 맡기며 말했다.

"집에 가서 뽀뽀 한 번 더 해줄게요."          


뜬금없는 채원이의 파격적인 호의에 나는 얼떨떨해졌다. 그런 서정적 감정을 유발한 시점이 언제인지 알수 없었다. 하지만 교육의 길은 멀고 험해도 사랑으로 함께 할 수 있는 감성은 생각보다 훨씬 가까이 있는 듯하여 기분 좋았다. 하지만 상황이 또 어떻게 반전될지 아무도 모른다. 넓은 토란잎 위에 앉은 맹꽁이가 어느 방향으로 튈지 누가 알 수 있을까. 꼬마 아가씨 채원이가 제집으로 돌아갈 날이 닷새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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