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릇 아무도 알아주는 이가 없었다
생명이 완전한 잠에 빠져든 황폐한 겨울 내내
베란다 한 켠 구석 홈 사이 떨어진 씨앗의 꿈을
동그란 아기의 손톱만큼 작고 초라한 씨앗의 꿈을
그렇게 아무도 찾아봐 주는 이가 없었다
꽁꽁 얼어붙은 겨울바람과 차갑기만 했던 눈을 맞으면서도
끝까지 지켜내며 포기하지 않았던 씨앗의 꿈을
기약 없는 기다림과 아리는 외로움을 견뎌낸 씨앗의 꿈을
그러나 아무도 알지 못했다.
보잘것없이 보이는 까만 껍질 안에 움트는 생명의 원천을
거대한 바위를 뚫고 높은 벽을 타고 넘을 힘의 신비를
사랑스러운 꽃잎과 찬란한 열매를 피워낼 씨앗의 가능성을
그래서 아무도 알지 못한다.
비록 대자연의 비옥한 옥토도 따뜻한 햇살도 없지만
세월의 잔인함이 만든 먼지의 퇴적물을 딛고 피어날
가장 연약한 한 씨앗의 가장 강력한 꿈 이야기를
밖이라고 우기기엔 좀 미안한 감이 있었지만
그렇다고 안이라고 우기는 것은 더더욱 용납되지 않는 장소인 베란다는
우리 집에서 가장 최전방에서 겨울을 직통으로 맞고 있던 곳이었고
나는 빨래를 널러 베란다에 나갈 때마다
물밖으로 나온 물고기처럼
온몸에 달라붙는 차가운 공기를 견디기 위해 몸을 팔닥거리곤 했다.
유독 혹독했던 어느 겨울
찬기 가득했던 어느 겨울
그해에는 몇 회의 겨울을 잘 이겨냈던 몇몇 화분의 잎들이 꽁꽁 얼어붙었고
그간 함께했던 세월이 무색하게 순식간에 아래로 꼬꾸라졌다.
상실감과 슬픔으로 화분들을 정리하며
혹독한 겨울 날씨를 탓했다가
막연하고 무심했던 나의 돌봄을 탓했다를 반복하며
그렇게 긴 겨울을 났다.
그리고 마침내 햇살의 빛줄기가 투명해지고
공기의 냄새가 바뀌던 시간이 다가왔고
겨울 내 살아남았던 화분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대대적으로 창문을 활짝 열고
호수로 시원하게 물을 주던 나는 순간 멈칫했다.
베란다 문틈 사이에 낀 얕은 먼지층 사이에서
이름 모를 새싹이 빼꼼히 얼굴을 내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 작고 여린 새싹이
어디에서 어떻게 왔는지보다
어떻게 그 얕은 먼지 더미를 이불 삼아
그렇게 혹독한 겨울을 견뎌냈는지
어떻게 그 얕은 먼지 더미를 토양 삼아
그렇게 연하디 연한 몸통을 힘껏 밀어 올렸는지
어떻게 겨울 내내 웅크리고 있었던 씨앗의 꿈이
이토록 찬란하게 실현되었는지가
벅차게 궁금했다.
그렇게 나는 몽글몽글해진 가슴을 안고
세상 조심스럽게 새싹을 빈 화분에 옮겨 심었다.
그리고 더 조심스럽게 물을 흘려주며
세상 기특하고 감격스러운 이름 모를 씨앗의 꿈을 상상했다.
그 작은 씨앗 안에 움텼던
무한한 꿈과 끈질긴 힘을
그곳이 어디든
힘차게 뿌리를 내리고
열심히 줄기를 밀어 올리고
마음껏 잎과 꽃을 틔워내는 씨앗의 꿈을
그리하여 종국엔
자신만의 열매를 맺으며 다시 새로운 씨앗이 되는 꿈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