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질꼬질 필통 속 지우개의 으름장
너희들 까불면 다 지워버린다
한쪽 구석으로 몰린 연필들 일제히 눈을 깔고
그럼 그럼
가방 속 필통이 이리 뒹굴 저리 뒹굴
필통 속 지우개와 연필도 한데 섞여 이리 뒹굴 저리 뒹굴
어느 날 필통에서 꺼내진 지우개
연필 때가 묻은 새까만 지우개
틀리고 더러운 것 지우라고 지우개가
깨끗한 종이를 새까맣게 만드는 이상한 현상
큰소리 탕탕치던 필통 속 지우개
자기 존재의 이유를 거스르니
오히려 존재가 해로운 형국
주인이 필요 없다 던져버리기 전에
무시했던 연필들이 몰아세우기 전에
어서 빨리 제 살을 깎아내야
진짜 지우개가 될 텐데
진짜 존재가 될 텐데
문득 떠오른 문장이 꽤 근사해 보여 재빨리 연필로 종이 위에 써 내려가다
금세 마음에 들지 않아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지우개가 어디 있었는데...,
그렇게 한참을 찾다 실패한 후
마침내 큰아이의 가방 속 필통에서 지우개를 찾았다.
별생각 없이 종이 위로 지우개를 쓰윽 문질렸을 때
으악, 이게 뭐야.
새하얀 종이 위로 지저분한 검은 자국이
지우개의 궤적을 따라 길게 그려져 있었다.
필통 속에서 연필들과 함께 이리저리 뒹굴던 지우개의 몸이
연필의 심처럼 까맣게 변해 있었던 거였다.
한 때 연필을 철저히 무력화시킬 수 있는 파워를 내세우며
연필의 실수를 수정하고 깨끗한 시작을 열어야 할 지우개가
연필의 흑연을 뒤집어쓰고 오히려 종이를 더럽히는 형국을 보며
존재와 그 의미를 생각했다.
지우개가 연필의 실수를 지우지 못한다면
오히려 종이를 더럽히고 악화시킨다면
결국 지우개는 지우개로 존재할 수 없게 된다.
그럼에도 만약,
지우개가 진짜 자신이 누군지,
스스로 어떤 일을 해낼 수 있는지 확신하고 있다면
존재를 되찾는 일은 언제든지 가능하다.
다만,
온몸에 묻은 까만 때를 벗겨내고
새하얀 속살을 되찾기 위해
까만 때가 사라질 때까지 제 살을 깎아내는
그 처참한 고통을 견딜 수 있다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