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체로부터의 도피
질문하는 사람은 어떤 식으로든 성장할 수 있다.
왜냐하면 질문하는 행위는 기존의 상태를 흔들어 미세하게라도 움직이게 하기 때문이다.
만약 아주 조금씩이라도 움직일 수 있다면 분명히 전과 다른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고 일단 조금이라도 변화할 수 있다면 그것은 새로운 경험일 수 있고 새로운 것을 경험할 수 있다면 우리는 어떤 식으로든 확장되므로 결국 성장으로 나아갈 수 있다.
아이가 태어나 말하기를 시작하는 시점은 그야말로 질문이 폭발하는 시기다.
언어란 사고와 직접적으로 연결되기 때문에 언어가 개념화되기 시작하는 아이는 오감을 통해 들어오는 주변의 모든 정보를 무서운 속도로 습득한다. 주로 세상의 기표와 기의를 매칭하는 일을 거의 24시간 풀 가동하면서 아이는 대상과 자신을 개념화한다.
그리고 이 중요한 작업의 기초가 되는 것이 바로 질문이다.
아이는 끊임없이 질문하며 자신 안에서 변화를 만들고 생각의 회로를 연결하고 새로운 것들을 경험하며 자신과 세계에 대한 인식을 확장한다.
"이건 뭐예요?" "이건 왜 그래요?" "왜 안 돼요?" "어떻게 해요?" "언제 할 수 있어요?"
아이들은 대게 이 질문 5종 세트를 앵무새처럼 반복하며 세상으로 자신을 확장해 나간다.
그런데 이런 질문 공세가 어느 시점에 도달하면 서서히 줄어들게 된다. 바로 본격적으로 교육이 시작되는 시기다.
사회화의 근간이 되는 교육이 시작되면서 아이들은 질문하는 법을 서서히 잊어버리게 되는 것 같다.
정해진 틀 안에서 주어진 질문에 대한 답을 빠르게 찾는 스킬을 반복적으로 연습하는 아이들에게 질문하는 법은 점점 잊혀진다.
그리고 그렇게 자란 아이들은 어른이 되어서도 사회가 던진 문제에 대한 답을 찾아 끊임없이 헤맨다.
무엇보다 스스로 질문을 만들어 낼 수 없다는 것은 참 슬픈 일이다.
그것은 자기됨의 형태가 흐릿해지고 있다는 증거일 수 있고 주체성을 잃어가고 있다는 것일 수도 있다. 그것도 아니라면 깊은 무기력에 빠져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렇듯 더 이상 질문하지 않게 된다는 것은 우리를 멈추게 만든다.
그리고 멈춘 것들은 대게 죽어있는 것들이 많다.
그런 의미에서 정신과 마음이 멈춘다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유기체는 움직일 수 있어야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나의 생각과 말과 글이 어떤 형태이든 답이 되길 원하지 않는다.
나는 나의 생각과 말과 글이 최종적으로 누군가에게 질문이 되었으면 좋겠다.
반감으로 인한 질문이어도 좋고 공감을 토대로 한 의문이어도 좋다.
상대방에게 그리고 결국 스스로에게 질문하지 않게 되면 멈출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움찔'도 괜찮고, '발끈'도 좋다.
왜 그런지에 대해 스스로 질문할 수 있다면 우리는 어떻게든 나아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