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쓱쓱 Aug 21. 2024

어떻게 공존할 것인가

배려와 양보도 중요하지만,

 놀이터에서 아이들을 놀리다 보면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 있다.


 한정된 놀이기구의 수에 비해 아이들이 몰리는 시간 때가 되면 놀이기구를 선점하기 위해 여기저기에서 사소한 갈등이 생기는 것이다.

 특히 그네는 아이들에게 언제나 인기가 많은데, 대체적으로 우리나라 동네 놀이터는 그네가 두 개뿐이 경우가 많기 때문에 그네 양 옆에는 매번 끈끈이처럼 다닥다닥 매달린 아이들을 볼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아이들이 만족하는 그네 타기의 경우 모두 각자의 기준이 다르기 때문에 매번 갈등을 피할 수가 없게 된다는 것이다.

 종종 기다리는 사람이 있든 말든 자기가 타고 싶은 만큼 그네를 점유함으로써 기다리던 아이들을 일제히 분노에 휩싸이게 하는 기센(?) 아이가 있는가 하면, 기다리는 아이들이 영 신경 쓰여 몇 번 발을 굴려보지도 못하고 내리면서 속상한 마음에 울음을 터트리는 아이도 있다.


 이때 재미있는 건 아이들과 함께 나온 부모님들, 특히 엄마들의 태도다.

 엄청난 빌런(?)이 아닌 이상 대부분의 엄마들은 놀이터를 이용하기 시작하는 이 시기 아이들이 배워야 할 사회성과 함께 살아가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양보'와 '배려'를 가르친다.


 일반적으로 먼저 그네에서 내리길 거부하는 아이에게 친구들이 이렇게나 많이 기다리고 있으니 적당히(?) 타고 내리길 종용한다.

 물론 아이가 생각하는 적당히와 엄마의 적당히는 거의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이제 갈등은 엄마와 아이로 전환된다.

 엄마는 아이가 자기만 아는 이기적인 사람이 되지 않게 가르치기 위해 처음에는 달래다 결국 협상을 시도한다.

 앞으로 20번만 더 타자든지, 1분만 더 타자고 제안한다. 그러다 이 모든 시도가 결열 되면 끝내 갈등은 엄마의 강압진압(?)으로 일단락된다.   


 어떤 아이는 엄마가 양보와 배려를 외칠 때마다 자신의 욕구를 누르고 급하게 그네에서 내려온다.

 계속 그네를 타봤자 애들이 쏘아대는 레이저에 맞아 정신이 혼미해지는 것도 모자라 엄마가 원하는 양보와 배려를 잘하는 아이가 되고 싶기 때문에 그네를 더 타는 것이 영 즐겁지 않게 된다.

 그렇게 되면 자신이 정말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스스로 가늠하기 어렵게 될 수도 있다.

 

 "친구도 하고 싶은 가봐."  "같이해야 되는 거야." "양보하는 사람이 멋진 사람이야."


 우리가 자라면서 무수히 들어왔고 또 외치는 말들이다.

 분명 양보와 배려는 함께 살아가는 데 있어 반드시 필요한 미덕이다.

 반드시 필요한, 이라고 수식어를 붙였지만 미덕이란 아름답고 갸륵한 덕행이다.

 강조할 수도 있고 권유할 수도 있다. 하지만 강요할 수는 없다.

 행하면 좋지만 행하지 않는다고 총을 쏠 필요는 없다.


 일방적으로 요구되는 미덕은 많은 부작용을 남길 수 있다.

 그네 타기라는 단순한 상황에서도 아이들은 양보와 배려 앞에서 자신의 욕구가 무참히 무시되고 좌절되는 것에 대한 분노를 느끼거나 억압으로 인한 무기력을 느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

 나는 양보와 배려를 일방적으로 주입하는 것보다는 공존의 개념을 익힐 수 있도록 지켜봐 주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공존이란 함께 존재하는 것이다. 그리고 함께 존재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요소는 바로 조율이다.

 너와 내가 함께 존재하기 위해서, 너와 내가 함께 이 놀이터에서 그네를 타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 어떻게 서로 조율해야 하는지를 스스로 알아차릴 수 있게 도와주어야 하는 것이다.


 기다리고 있는 친구의 마음을 헤아리는 일도,

 더 오래 그네를 타고 싶은 자신의 욕구를 확인하고 표현하는 일도,

 욕구에 기반한 대화를 통해 서로의 적절한 수준이 무엇인지 조금씩 그 간격을 좁혀가는 일도 모두 공존과 조율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다.


 물론 이 과정은 매우 지난하고 많은 시간과 갈등을 유발할 수 있다.

 그냥 단선적으로 양보해야지, 어허, 배려해야 되는 거야,라고 가이드를 주면 마치 절대적 가치를 따르는 것처럼 매우 심플하게 끝날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은 언제나 내부로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결국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한다.

 스스로 고민하면서 친구와의 갈등에서 적절한 거리를 찾고 자신의 욕구를 만족시킬 수 있는 적절한 수준을 스스로 찾아야 한다.

 그래야 아이들은 대체적으로 괜찮은 상태로 자랄 수 있다.


 당연히 어른들의 놀이터에서도 마찬가지다.

 착한 사람 콤플렉스로 고통받는 사람도, 빌런 취급에 더 엇나가는 사람도 가만히 생각해 보자.


 결국 우리 모두는 안전하고 편안하게 살고 싶어 한다.

 모두가 함께 안전하고 편안하게 종종 즐겁고 가끔 행복하게 존재하고 싶어 한다.

 그것이 모두가 원하는 하나의 명제라면 어떻게 함께 공존할 수 있을지, 그리고 공존하기 위해 나는 어떻게 조율해야 할지 부딪히며 찾아나가야 한다.   


 "지금 우리가 잘 공존하기 위해서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매 순간 이 질문으로 시작한다면 조금은 함께하는 것이 더 편안해지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이전 16화 내 것과 네 것 구분하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