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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최고의 부자, 전형필의 선택

돈이 아닌 가치를 좇은 그의 이야기

by 김형범 Mar 13. 2025

1930년대, 조선에서 가장 부유한 청년이 있었습니다. 24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막대한 유산을 물려받아 당시 기준으로도 어마어마한 부를 자랑하던 그. 그의 이름은 전형필이었습니다. 많은 이들은 그를 부러워했지만, 동시에 이해할 수 없는 사람으로 보기도 했습니다. 전형필은 자신이 가진 재산을 누구도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값비싸고 귀한 물건들을 구매하는 데 자신의 돈을 아낌없이 썼습니다. 하지만 그 물건들은 당시 사람들의 눈에는 단순히 낡아빠진 골동품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그는 일본으로 유출될 뻔한 고려청자 몇 점을 사기 위해 현재 가치로 수백억 원에 해당하는 돈을 지불했습니다. 사람들은 황당해하며 말렸지만, 그는 단호했습니다. 그 청자들이 단순한 골동품이 아니라 조선의 문화적 정수를 담고 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전형필에게 있어 그것은 단순한 물건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조선의 혼이었고, 자존심이었습니다. 그의 이런 행보는 한 권의 책을 사는 일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훈민정음 해례본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는 그 책을 구하기 위해 당시 집 열 채 값에 해당하는 거금을 지불했습니다. 사람들이 아무리 비웃어도 그는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단순한 책이 아니라 조선의 문화적 상징임을 그는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전형필의 행보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신윤복의 미인도를 비롯한 조선의 예술 작품들을 지키기 위해서도 모든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이 작품들은 이미 일본으로 넘어가거나 훼손될 위기에 처해 있었지만, 그는 이를 하나씩 되찾아왔습니다. 그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재산의 규모가 아니라, 그 재산이 무엇을 위해 쓰이는가였습니다. 그의 노력 덕분에 오늘날 우리는 신윤복의 미인도를 통해 조선의 미학과 정서를 다시금 느낄 수 있습니다.


전형필의 노력은 단순히 개인의 차원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지킨 유산들을 더 많은 사람들이 접할 수 있도록 간송미술관을 설립했습니다. 1938년, 서울 성북동에 문을 연 간송미술관은 한국 최초의 개인 미술관이자, 조선의 혼을 지키고자 했던 그의 신념이 담긴 공간입니다. 이곳에는 고려청자, 조선 백자, 훈민정음 해례본, 신윤복의 미인도 등 수많은 국보급 유산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단순히 감상을 위한 공간이 아니라, 우리가 잃어버릴 뻔했던 역사를 되찾고, 그것을 기억하게 하는 공간입니다.


특히 훈민정음 해례본은 그의 헌신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단순한 책이 아니라, 우리 글자의 기원과 조선의 문화적 자부심이 담긴 이 유산을 지키기 위해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습니다. 또한 신윤복의 미인도는 당시의 생활상과 조선의 미적 감각을 보여주는 걸작으로, 그의 손에서 되찾아지지 않았다면 우리는 이를 잃어버릴 뻔했습니다.


간송미술관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많은 이들이 찾는 공간으로, 그가 남긴 유산의 가치를 느낄 수 있는 곳입니다. 전형필은 단순히 돈이 많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돈이 아닌 가치를 좇았고, 그 가치를 통해 우리의 문화를 지키고자 했던 진정한 수호자였습니다. 그의 이야기는 우리의 과거와 현재를 잇는 다리로, 앞으로도 오랫동안 기억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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